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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능력 / 최승윤 목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원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능력이란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얻는 힘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이란 개인이 속해 있는 집단이나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켜 줄 때, 개인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개인의 능력이란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고, 세상이 뜻하는 바를 이루어 줄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바를 만들어 내지 못할 때 세상은 개인이나 집단을 내치고 도태시킵니다.
쉬운 예를 스포츠 세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 계약을 맺은 미겔 카브레라 라는 선수는 5년 동안 1억불, 6년 동안 1억 2000만불을 받을 것을 구단과 협상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카브레라의 몸값을 낮추기 위해서 그가 최근 수비 실력이 떨어지고 몸무게가 늘어가는 것을 감안해서 구단에서는 몸무게가 늘어나면 몸값을 깍겠다는 조건을 내거는 모양입니다. 구단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선수를 끌어들이는 것이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몸값을 낮추는 것이 목적이고, 선수들은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 높여서 몸값을 높이려고 할 것입니다.
선수 개개인의 성품과 인격과 삶의 질은 어떻든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야구만 잘하면 됩니다. 그런데 야구를 잘한다는 것은 결국 구단의 수입, 돈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구단에게 돈을 벌어주지 못하는 선수는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돈이 안 되면 그냥 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몸이 망가지는 것을 감수하고 약물을 복용합니다. 모든 운동 선수들이 약물을 복용해서라도 기록을 갱신하고, 능력을 올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고 합니다. 스포츠계만 그러겠습니까? 돈이 가치의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는 모든 영역이 다 그런 원리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요구하는 능력이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얻는 것이요,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만들어 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야 마는 것, 그런 인간상을 오늘날 사회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해 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지금부터 약 280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인데도 오늘날의 모습과 거의 틀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봇이라는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그는 포도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포도원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포도원인지, 얼마나 많은 소출을 내는 포도원인지 모릅니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나봇의 포도원이 이스르엘이란 곳에 있는 아합의 여름 별장 곁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합이 그 포도원을 탐냈습니다. 무슨 대단한 목적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봇의 포도원을 사서 자신의 나물밭으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왕이 요구하는 것이고, 또 그냥 뺏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값을 쳐서 사려고 했고, 또 나봇이 원하면 지금 갖고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합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합리적인 제안이고, 나봇에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도 그리 나쁜 조건도 아니었습니다. 실리를 따진다면 아합 왕의 제안을 듣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큰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봇은 아합 왕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거절의 이유가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찌로다”
무슨 말인가요?
“조상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이 포도원을 왕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나봇이 아합 왕에게 주기 싫어서 그냥 갖다 붙인 이유가 아닙니다.
레위기 25:23절-28절에 보면, 이스라엘에서는 땅을 팔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 경우, 가까운 친족이 그 사람이 진 빚을 모두 청산해 주고 땅을 찾아와야 하고, 그 친족도 돈이 없어서 빚을 갚아 주지 못할 경우, 희년, 다시 말해서 50년 째 되는 해에는 무조건 모든 것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나봇이 아합 왕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법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이해득실을 떠나서, 왕이 요구한 것이기 때문에 들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세상의 도리를 떠나서 그보다 높은 하나님의 법을 나봇은 생각한 것입니다. 그만큼 나봇은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아합 왕의 제안을 듣고서 레위기 말씀을 생각해서 거절한 것을 보면 나봇이 갖고 있었던 정신과 마음은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정신의 소유자라면 아합이 다스리고 있었던 시대의 모습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상 숭배로 나라가 휘청거리고 있고, 아합과 이세벨의 간교함과 포악스러움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아합 왕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떤 일을 당할 것인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요구하는 능력이란 어떤 것인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능력이요,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능력이요, 그래야만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나봇은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요, 경제적인 이해득실을 따져서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을 거부하고 사는 사람이요, 세상과 불화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어떻게 그런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두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나봇의 이 행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이세벨과 같은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뒤에서는 욕을 하고, 이세벨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씁쓸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여도, 오늘날 세상은 이세벨과 같은 사람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세벨이 보기에 아합은 한심한 인간이고, 나봇은 귀찮은 존재입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어린애처럼 밥도 먹지 않고, 누워서 끙끙대고 있는 것을 보니 얼마나 한심하겠습니까? 본문을 보면 아합은 한심하고 소심하기는 해도 그래도 그 마음 속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은 갖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나봇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유업을 왕에게 주는 것을 금하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서 근심하고 답답해 했다는 것을 보면,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살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달랐습니다.
간교하고 치밀하고 대담했습니다. 자신이 목적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을 사용할 줄 알았고, 그 권력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조종할 줄도 알았습니다. 먼저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내용이 자세하게 적혀 있지 않지만 단순히 나봇을 죽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봇이 반드시 죽어야 할 만한 이유를 적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이 적은 나봇의 죄악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이세벨의 말은 나봇이 반드시 죽어야 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저주하는 자,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되 온 회중이 돌로 쳐 죽이라고 레위기 법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것이 됩니까? 이스라엘에서 왕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워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도록 했다는 논리입니다.
그와 같은 논리는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왕 자체가 무조건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요, 왕을 말을 듣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훼방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왕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나라를 타락시키고, 하나님의 종교를 없애려는 포악한 왕에게까지 무조건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왕을 더 우선하는 것이 됩니다. 이세벨이 주장하는 것은 바로 나봇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운 왕을 무시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세운 왕을 무시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까지 무시하고, 저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논리를 내세운 것입니다.
이세벨이 전면에 나서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비류 두 사람을 앞세웠습니다.
13절에 나오는 비류란 본래 “벨리알의 아들들”이라는 단어인데, 완전히 사악하고, 악독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을 두 사람 세웠습니다.
여러분, 이세벨의 간교함과 치밀함은 이런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악독한 사람들을 세우되, 모세의 율법대로 두 사람의 증인을 세운 것입니다. 자기의 목적한 바를 사람들에게 주장하고, 설득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사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업을 하건, 무엇을 하건, 자신이 목적하는 것을 정당화 시키는 이론적인 작업을 지식인들에게 시키고, 언론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세뇌를 시킵니다. 자신들이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인들과 언론들이 뿜어대는 여러 가지 이론들을 듣고 있는 일반 사람들은 그것을 사실로 믿고, 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대로 따릅니다. 이세벨의 사주를 받은 비류들의 증언에 의해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들과 귀족들과 일반 사람들이 나봇을 성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여러분, 나봇과 함께 살았던 장로들과 귀족들과 일반 사람들은 나봇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을까요? 왕의 요구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거절할 정도의 사람이었다면 그 삶이 어떠했겠습니까? 우리가 쉽게 말하고 듣는 “신앙 따로 삶 따로”나봇의 삶이 그랬을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당시 왕이라면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왕의 요구와 부탁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거절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도 폭력을 사용해서 빼앗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좋은 가격에 돈을 지불하고 사려고 했고, 나봇이 갖고 있는 포도원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주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대단히 합리적이고, 실제적인 제안을 한 것입니다. 안들어 줄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봇이 거절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금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한 가지 사실만을 갖고도 나봇이 그 마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세벨이 나봇을 높은 곳에 앉히도록 한 것은 어쩌면 나봇이 그 마을에서 지도적인 인물이었는지 모릅니다. 금식까지 선포하라고 한 것을 보면, 나봇이 단지 하찮은 인물이 아닐 뿐더러 나봇이 왕의 요구를 거부한 것이 대단히 큰 사건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나봇을 그들을 정당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사건의 경위를 알아보지도 않고,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그냥 죽였습니다. 이세벨의 권력에 무서움을 느꼈는지, 나봇을 죽이지 않으면 그 마을 사람들을 요절낼 것이라고 은근히 협박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장로들과 귀족들과 일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살았던 의인 나봇을 죽였습니다. 의인 나봇을 죽일 만큼 그들은 무지했고, 무감각했고, 이세벨의 강압을 거절한 말한 용기가 없었습니다.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세운 목적에 합당하게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따라서 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사용해서 의로운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 사회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이세벨과 아합은 자신들이 원하고 바라던 것을 얻었습니다. 그들에게 협력한 장로들과 귀인들과 비류들은 이세벨과 아합이 주는 떡고물을 얻어 먹었을 것이니다. 의인 한 사람을 죽인 것이 그들에게는 그리 큰 사건이 아닙니다. 귀찮은 존재를 제거했을 뿐입니다. 아합 입장에서 보면 앓던 이가 빠진 시원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이세벨은 왕도 하지 못한 일을 시원스럽게, 깔끔하게 처리했으니 자신의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세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자기 앞에 나서서 껄떡대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나봇처럼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거칠 것이 없고, 못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이예요. 능력이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가질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은 꺼리낌 없이 모두 다 할 수 있는 것 자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능력은 언제나 그 능력이 목적하는 바, 그 능력이 만들어 내는 결과에 따라서 평가되는 법입니다. 능력이 목적하는 바, 능력이 만들어 내는 결과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바로 의로움입니다. 올바름입니다. 그 의로움과 올바름이란 단지 내가 스스로 생각해 낸 의로움과 올바름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제시하고 요구하는 것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올바름이고, 의로움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제시하고 요구하는 것에 충실하게 사는 것은 사회적인 올바름과 의로움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할 때, 이세벨과 아합의 능력, 장로들과 귀인들의 능력은 비류들, 악한 자들의 능력과 동일한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었고, 장로들과 귀인들과 비류들은 악한 자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만들어 내었지만 그 결과는 사회를 더욱 타락시켰고, 자신들을 죽음의 길로 끌고 갔습니다. 나봇이 죽은 다음,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그 말씀을 아합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를 곧 네 몸의 피를 핥으리라”
하나님의 이 말씀 그대로 아합과 이세벨은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다음 그 말씀 그대로 개들이 그들의 고기를 먹고 그들의 피를 핥았습니다.
열왕기하 10장 11절을 보면, “예후가 아합의 집에 속한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자를 다 죽이고, 또 그 존귀한 자와 가까운 친구와 제사장들을 죽이되 저에게, 바알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평가는 의로움과 올바름을 헌신짝처럼 벗어버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떨어졌습니다.
나봇과 그 아들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다가 죽었습니다. 불의하게 죽었습니다. 하찮게 보이는 포도원 때문에 자신과 자기 아들의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눈 한 번 질끈 감고 아합에게 포도원을 넘겼으면, 아마도 남은 여생을 풍족하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기에는 그들의 신앙 양심이 너무나 깨끗했고, 순수했습니다. 왕의 요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크게 생각했습니다. 나봇은 헛되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고, 죽기까지 했으니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대단히 작은 사건 하나를 생각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3.1 운동이나, 5. 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비하면 대단히 작고 사소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나봇 사건, 나봇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 그 사건과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들 만이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나봇 사건이 갖고 있는 메시지를 바르게 듣고 깨닫는 사람들 만이 무엇이 올바름이고 무엇이 의로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을 무엇을 위해서 쓰고 있는지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 재능과 은사와 학식과 재산과 능력은 어떤 목적과 방향을 향해서 모아지고 있는지, 어떤 결과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참된 능력,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능력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 세상이 요구하는 것들을 만들어 내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에 사용되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만들어 내는데 쓰여져야 합니다. 그것이 의로움이고, 올바름입니다.
여기서 벗어나기 시작하면 그것은 불의한 것이요, 불의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것은 내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나와 연관된 것들을 타락시키고, 사회를 어둡게 만드는데 내 자신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파는 행위입니다.
열왕기상을 기록한 역사가는 아합의 그와 같은 삶을 한 마디로 이렇게 평가를 했습니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스스로 팔렸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죄악에 그대로 내주었다는 것입니다. 죄악이 이끄는대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악의 화신인 이세벨의 충동에 의해서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마땅히 추구하고 살아야 할 의로움과 올바름을 버리고, 이세벨이 휘두는대로 휘둘리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나라 전체를 파멸로 몰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아합과 이세벨처럼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고 가시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의롭지 못한 일, 올바르지 못한 일에 자신의 몸과 영혼을 팔면서 살 수 없습니다. 개인의 역사든, 사회와 나라의 역사든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깨달은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한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를 과거에 일어났던 작은 사건, 과거의 이야기로 듣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정하는 큰 원칙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강하여 용맹을 발한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듣고 배운 사람들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능력과 재능과 은사를 무엇을 위해서 쓰시겠습니까?
아합처럼 우리의 몸과 영혼을 죄악에 팔면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의로움을 위해서, 올바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을 만들어 내면서 사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나봇의 포도원의 사건을 저와 여러분들이 선택해야만 하는 문제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과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아는 사람들이 택해야만 하는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며 살 것인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자유를 어디에다, 무엇을 위해서 쓰는가에 따라서 여러분 자신과 가정과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과 행위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또한 다르게 내려질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