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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 18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 약 1: 20 사람이 성내는 것
약 1: 18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
본 절은 하나님이 시험을 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마지막 이유이다(Burdick).
1]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한 첫 열매'(아파르켄 티나)는 구약성경에서 수확된 첫 곡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나타낸다.
* 출 23: 16 -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 출 34: 22 -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 레 23: 10 -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모든 곡식의 첫 소산물이 하나님께 바쳐지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선택되어서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첫 열매가 된다.
* 고전 15: 20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혹자는 야고보가 '우리'를 사용한 것이 보편적인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고 하나(Hort), 중생한 자들이나 당시 초대 교회의 성도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urdick, Moo). 왜냐하면 야고보는 비교의 뜻이 담겨있는 '티나'를 사용하여 피조물과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Calvin).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첫 열매가 되는가?
첫 열매는 추수 시에 처음 수확한 소산물로서 이는 추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특별하게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져야 했다.
* 레 23: 9-14 -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고 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십분의 이 에바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로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쓸 것이며 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마찬가지로 야고보 사도는 회개함으로써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을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첫 열매로 비유하였다. 그들이 특별히 하나님께 먼저 바쳐진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뜻'(불레데이스)은 피조물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 엡 1: 11 -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 벧전 1: 3 -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다.
* 엡 1: 4-5 -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따라서 야고보가 '불레데이스'를 사용한 의도는 택한 자녀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자기 공로나 외부적 환경의 영향으로 말미암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Manton, Calvin).
'진리의 말씀'이란 진리를 통하여 확증된 복음의 말씀을 말한다.
* 엡 1: 13 -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 골 1: 5 -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 딤후 2: 15 -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낳다'(아페퀴에센)은 자연적인 출생의 의미로 '창조하다'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
* 행 17: 28 -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따라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라는 말은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들 즉 첫 열매된 자들이 옛 성품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3] 인생관보다 신관이 중요합니다. : 김정남 목사
< 신앙생활의 든든한 기초 >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얼마나 풍성하시며 신실하신가 하는 하나님의 속성이 잘 나타나 있는 본문입니다. 우리가 무시로 당하는 그 숱한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옵니까? 이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입니다.
이 선물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즉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느냐가 필요합니다. “세상이 어떻다, 인간이 어떻다, 네가 어떻다, 내가 어떻다”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느냐”가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신앙생활의 든든한 기초는 하나님의 행하심(God's doing)보다는 하나님의 존재하심(God's being)에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린 신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인간이 연약한 존재이기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그런 쪽으로 관심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반대 방향으로 일을 하실 때 시험에 들고 믿음이 쉽게 흔들릴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면 차차 사람들은 철든 신자가 됩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무엇을 해 달라!”고만 하다가 철이 들면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를 생각하며 달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철이 든 신자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무엇을 기뻐하시는가?”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하나님이 해 주시지 않아도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위해 놀라운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고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바른 신앙고백이 있을 때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시험의 뜻도 알 수 있고 시험의 결과도 환히 내다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른 신앙고백만큼 위대한 예언은 없습니다.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그의 신관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이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이라도 분명히 알면 시험을 이기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생관이 아니고 신관입니다. 가치관도 중요하지만 가치관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며, 국제화 시대에 세계관도 중요하지만 세계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이것이야말로 모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토대가 됩니다.
< 사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때 >
오늘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하나님의 선하심, 그것에 대해서 속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때에 속아 넘어가게 됩니까?
1. 괴롭고 어려울 때
살면서 어렵고 힘들면 사탄이 미끼를 던집니다. “네 죄가 많아서 그래.” 우리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내가 이런 잘못을 저질러서 하나님이 나를 치신다”라고 생각하며 불안에 빠지는 양심에 대해서는 흔히 ‘사단의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잔인하고 무서운 하나님’으로 인식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마음에 그와 같은 ‘사탄의 양심’을 자꾸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심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도 부족한 시간에 사탄의 양심을 가지고 불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면 되겠습니까?
그처럼 사탄이 양심을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 너무 깊이 빠지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대로 치시면 남아 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대로 치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임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어떤 여자 집사님이 부인병에 걸려서 세 번 수술했습니다. 얼마나 시달렸는지 심신이 다 지친 어느 날 슬하에 자녀를 얻지 못해 남의 집 아이 하나를 얻어다 키우는 권사님이 구역예배 후 교제를 나누다가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죄가 많았으면 남들이 한번도 받지 않는 수술을 세 차례나 받았을꼬...”
얼마나 잘못된 충고입니까? 그런 방정이 형제관계를 깹니다. 때로는 그런 충고가 교역자의 입에서까지 스스럼없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교역자라면 하나님을 좋은 분으로 인식시키는 것은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그 말을 듣고 집사님의 낯빛이 변했습니다. 언짢아하는 표정을 보고도 설상가상으로 한마디 더 했습니다. “빨리 회개하세요!” 괴로워죽겠는 판에 공연히 찾아와서 방정을 떠는 모습에 너무 속이 뒤집힌 나머지 참지 못하고 이 집사님이 장군에 멍군을 놓았습니다. “권사님은 얼마나 죄가 많았으면 남의 집 대를 끊었수!”
아무리 기분이 상해 한 말이라도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그 말대로 잘못했다고 자식의 대를 끊은 하나님이라면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입니까? 자기감정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철저히 무너뜨리는 이 사람을 보십시오. 결국 무안해진 권사님은 집을 뛰쳐나왔고, 그 뒤 두 사람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마귀는 어느새 우리들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너는 죄가 많구나. 그래서 하나님은 너라는 존재를 싫어해!” 그러면 사단의 양심을 누르지 못한 사람은 또 생각합니다. “내게 죄가 많아서 하나님이 벌주시나 보다.” 그러면서 무서운 하나님, 인정 없는 하나님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부작용들입니까?
바른 신관을 꼭 붙잡고 “하나님은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이다!”라는 점을 결코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복음의 핵심입니다.그런데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 인정 없는 하나님으로 인식시켜서야 됩니까?
그런 의미에서 상담이나 심방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담할만한 사람이 상담하고, 심방할만한 사람이 심방을 가야 합니다. 특히 바른 신관을 가진 사람이 상담해 주고 심방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하는 것, 즉 이 복음의 전파로 큰 위로가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섣불리 심방을 한다고 다니면 생사람 잡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욕심에 이끌릴 때
우리 안에 욕심이 있으면 사탄이 다가와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족한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그런 사단의 수단에 넘어가면 급기야 하나님이 인색해 보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잘해주시면서 나에게만 못해주시는 것만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웃어주시면서 나에게는 눈을 흘기시는 하나님 같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에게는 나쁜 하나님이고, 섭섭하게 하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사실상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자주 떨어지는 것은 기복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축복도 모자랍니다. 기도하는 것도 ‘주세요’가 주제입니다. 이런 욕심 끝에 결국 원망과 불평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신관이 빗나가게 됩니다. 감사가 사라지고 원망이 남습니다. 생각할수록 분하기만 합니다. 욕심 많은 기복주의자가 신앙이 쉽게 흔들리고, 상처가 많고 삶의 기복이 많은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마귀의 장난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바른 신관을 가져야 하고, 그 신관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우리가 흔들려도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축복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진정한 축복을 판단하고 항상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절대 신뢰를 가지고 승리하는 복된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 김정남 목사
< 하나님의 3가지 속성 >
야고보서 1장 16-18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바른 신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17-18절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세 가지 속성이 나와 있습니다. 그 세 가지에 대해서 같이 살펴보기로 할까요?
1.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17절을 보십시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하나님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결국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이 확신이 없다면 수시로 다가오는 중압감과 불안감을 어떻게 견디어 내겠습니까?
가끔 성도들의 기도제목을 들을 때마다 목사의 중압감은 정말 큽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어려움이 목회자의 가슴을 누를 때가 많습니다. “원하는 것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이 가슴을 누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기에, 하나님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으로 믿기에 기도가 되고 마음이 평안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선물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고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난이든, 질병이든, 실패든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그 길을 허락하셨을까요? 어차피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야 하기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있어야만 그 다음이 있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뿐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삶을 보십시오. 우리는 부모님께 받은 것이 많습니다. 효를 아는 사람은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 철이 듭니다. 그러나 못된 사람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상처만 받았다고 생각하고 부모님에 대해 원망을 합니다. 그래서 기억 저편에 있는 무수한 진자리, 마른자리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에게는 받은 것만 있고 남에게 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겸손이 체질화된 사람은 남에게 해 준 것은 별로 기억하지 않고 받은 것은 오래 기억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남에게 준 것만 있고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만이 체질화된 사람은 받은 사실은 금방 잊어 먹고 준 사실만 오래도록 기억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왜 이렇게 주지 않느냐?”라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생각합니다. 그래서 섭섭한 것도 많고 상처도 많이 받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세를 많이 진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땅으로부터 다 받은 것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고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십니까?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십니다. 즉 똑같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 평범한 원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남과 똑같은 것을 받지 못했을 때는 불만을 품게 됩니다. 그 불만과 불평이 자기가 받은 것을 잊어먹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는 각양각색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억력이 비상합니다. 수백 개의 전화번호를 외웁니다. 사람 얼굴을 봤다 하면 잊어먹지 않습니다. 대단한 기억력입니다. 그런데 기억력 좋은 사람 치고 창의력이 좋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발명가들은 대개 기억력이 나쁩니다. 에디슨, 뉴톤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유명한 건망증 일화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창의력이 없습니다. 반대로 창의력이 좋은 사람은 기억력이 없습니다. 머리만 보아도 하나님이 이렇게 다르게 주셨습니다. 공부해서 성공할 사람이 있고 장사해서 성공할 사람이 있습니다. 은사는 각양이기에 남의 은사를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못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남과 다른 것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남과 다른 것을 받았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내가 가진 것의 의미와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러운 것이 많다면 이러한 은사의 원리를 잘 깨닫지 못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은사의 원리를 잘 모르면 은사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갖게 됩니다.
어떤 부흥회의 낮 집회에서 유명한 부흥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령의 9가지 은사를 다 받게 해 주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많이 오십시오.” 말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그 말은 진실한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상반되는 말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은사를 다 받고 아주 특별한 존재가 꼭 되어야 할까요? 9가지 은사를 다 받고 그에 합당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있는 한 가지 은사만 잘 개발해도 그 사람은 누구보다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일생 내내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변함없으신 하나님
17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어제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29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그 말씀은 그리스도를 버린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버린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때가 되면 한번 선택했기에 하나님은 언젠가는 꼭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물며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저버리시겠습니까?
3.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
흔히 야고보서는 은혜는 없고 행위만 얘기하는 서신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오해입니다. 본문 18절 말씀 하반부를 보십시오.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강력히 피력한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왜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습니까? 본문은 말합니다.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라고 말입니다. 첫 열매가 무엇입니까? 구약을 보면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놀라운 복음이 그 말씀 안에 담겨 있습니다. 첫 열매가 왜 중요합니까? 먼저 믿는 사람이 나중 믿는 사람의 표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목회해 보니까 자주 느끼는 사실은 “처음 믿는 사람은 그를 인도한 사람만큼 밖에 못 믿는다”는 사실입니다.물은 수위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도한 사람이 낮 예배만 나오면 인도 받은 사람도 낮 예배만 나옵니다.
인도한 사람이 새벽기도회에 나오면 인도 받은 사람도 새벽을 지킵니다. 인도한 사람이 교회에 한 달에 한번 나오는 사람이면 인도 받은 그 사람도 한 달에 한번 정도 나오는 경우를 자주 목격합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소중한 첫 열매가 되기를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거듭 말씀드리지만 바른 신관을 가져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 시험에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모자라서도 아니고, 인간관계가 잘못되어서 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넘어지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대개 신관이 잘못되어서 넘어지는 것입니다.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관을 통해 여러분 자신을 소중하게 지켜 가시기를 바랍니다.
5. 말씀의 들음과 행함 ( 1: 19 – 27 )
⑲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⑳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 1: 19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
1]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너희가 알거니와'(이스테)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그러므로'(호스테)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으로 중생된 사람이 되었으므로'라는 뜻이다. 이에 해당하는 '이스테'는 명령법이라기보다는 직설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Robertson).
만약 야고보가 명령법의 의도로 사용했다면 4: 4처럼 '오이다'(알다)의 명령형 '오이다테'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테'는 수신자들이 과거에 알고 있는 거듭난 사실에 대한 인정이나 권고 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야고보는 본 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세 가지를 권면한다.
2]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본문은 '듣기는 속히 하라'고 교훈한다. 이것은 우리가 듣는 모든 말을 다 믿으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듣는 말 중에는 참된 내용도 있지만, 거짓된 것이나 불확실한 것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말을 속히 듣고 이해하고 그 내용들을 잘 분별해야 할 것이다.
듣지 않고서는 참된 것을 믿을 수 없고 또 참되지 않은 것을 반대할 수도 없다. 거듭나는 것은 순간적인 현상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꾸준히 지속되는 여러 과정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Ropes).
3] 말하기는 더디 하며
이것은 말을 천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자기의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계속하여 말하거나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논쟁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게 된다.
잠언에는 입술을 제어하는 자가 지혜가 있고 말을 아끼는 자가 지식이 있다고 가르쳤다.
* 잠 10: 19 -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 잠 17: 27 -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우리는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만을 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말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거짓말이나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말이나 형제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악한 비난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 잠 6: 16-19 - 16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17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19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 잠 11: 11-13 - 11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 12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겸손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Burdick, Tasker).
4] 성내기도 더디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전혀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없지만, 금방 화를 내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이 옳지 않은 일, 상식이나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보고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화를 내더라도 많이 생각하고 오래 참은 후에 내라는 것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에 대해 잠언에는 많은 말씀으로 교훈했다.
* 잠 12: 16 -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 잠 14: 17 -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 잠 14: 29 -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 잠 15: 18 -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 잠 16: 32 -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 잠언 19: 11 -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본문은 일반적으로 분노, 증오 등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의 격분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의(義)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약 1: 20 사람이 성내는 것 -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 절이 앞 절에서 행한 권면에 대한 근거임을 나타낸다.
1]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이것은 우리가 성내기를 더디 해야 할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화를 낼 때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화를 낼 때 남을 미워하기 쉬우며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 요일 3: 15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원리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화내는 것을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성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해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삶에 위배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행위이다(Burdick, Tasker, M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