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고구려 부흥 운동
구분 | 근거지 | 중심 인물 | 실패 원인 |
백 제 부흥 운동 | 주류성 | 복신· 도침· 부여 풍 | 지배층 내분, 일본 지원군 패배 |
임존성 | 흑치상지 · 지수신 |
고 구 려 부흥 운동 | 한성 | 검모잠 · 안승 | 지배층 내분, 신라에 포섭, 발해에 통합 |
요동지방 | 고연무 · 보장왕 |
고구려와 백제 멸망의 공통된 원인은? |
▪ 국론분열(내부분열) :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 ▪ 잦은 전쟁으로 인한 국가 피폐와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일체감 상실. |
동상이몽 (同床異夢) |
신라 | 백제 멸망 → 고구려 멸망 → 당 축출 → 삼국 통일 |
당 | 백제 멸망 → 고구려 멸망 → 신라 멸망 → 한반도 지배 |
백제와 고구려 부흥 운동 실패의 공통점은? |
지배층의 내부 분열 |
신라의 당군 격퇴 지역 |
육군 | 매소성, 마전, 적성 |
해군 | 기벌포 (금강 하구) |
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의미) |
긍정적 | ▪ 자주적 통일(당을 무력으로 몰아냄) ▪ 최초의 민족 통일 ▪ 민족 문화 형성 및 발전의 계기 마련 ▪ 한민족(단일민족) 형성의 계기 마련 |
부정적 (한계성) | ▪ 민족 문제에 외세를 끌어 들임 ▪ 불완전한 영토 통일(대동강~ 원산만 이남 한정) |
(1) 백제의 멸망과 부흥 운동
1) 백제의 멸망(660)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553) → 나 ․ 제 동맹 결렬 → 관산성(옥천) 전투 백제 성왕 전사(554) →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 신라 공격 (협공) → 고구려(신라 북쪽의 30여성 침략) → 백제의 의자왕(641즉위.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대당 교통로를 끊기 위해 당항성 공격, 신라 서쪽의 대야성 등 40여 성 함락) → 대야성(경남 합천, 군사적 요충지, 서쪽 전진 기지) 함락(642년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 1만으로 대야성을 함락, 김춘추의 사위였던 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 죽임, 남녀 1000여명을 사로잡음. 죽죽 전사) → 위기를 느낀 신라의 김춘추는 개인적 원한과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고구려의 연개소문에 원병 요청(642) → 연개소문 거절 → 고구려 탈출 → 당에 원병 요청(김춘추) → 연개소문의 대당 강경책 → 당의 고구려 공격 → 안시성 싸움(645) → 실패 → 진덕여왕이(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법민을 시켜) 당 고종에게 태평송 지어 받침(비단에 수를 놓아) → 신라는 당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당의 관복을 입기 시작했으며, 독자적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썼으며,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을 시켜 태평송을 지어 받치기까지 했다.
→ 신라의 외교적 노력의 결과(당 태종은 작전을 바꾸어 신라와의 연합을 꾀함)
→ 나 ․ 당(신라와 당) 군사 동맹 결성(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당과 연합하여 멸망시킨 후 대동강 이북의 한반도를 당에 넘겨주겠다고 비밀 약속을 함.648) → 백제의 상황
(의자왕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력 쇠퇴) → 나 ․ 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김유신의 5만 신라군 탄현을 넘어 황산 공격, 소정방의 13만 당군 금강구로 진격 후 사비성 공격함. 즉, 신라는 동쪽에서 당은 서쪽에서 백제를 좌· 우 양면으로 협공한 것이다.) →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 전멸 → 백제의 멸망(660) →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 등 (5도독부 설치) → 당의 백제 지배 시작 됨.
♣ 백제 멸망의 원인
① 왕권 강화를 위한 무리한 건축 공사(무왕 : 미륵사, 왕흥사 등) 와 잦은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와 민생 곤란
② 집권층(의자왕 등)의 사치와 향락, 자만으로 국민간의 일체감 상실.
측근정치, 친인척 비리.
③ 내부 분열(신· 구 귀족 세력 간의 대립)로 통일된 방어책을 세우지 못함.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백제의 지배층은 갑론을박하며 시간을 허비하여 방어시기를 놓침)
④ 나 ․ 당 연합군 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