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실의天主實義 하권下卷
제 6편(1-2)
의지는 소멸될 수 없음을 설명하고,
아울러 사후에 반드시 천당과 지옥의 상벌로서
세인들이 행한 선악에 응보가 있음을 논함.
장정란 역
* 6-1 중국 선비가 말한다:
(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상제上帝)’를 모든 존귀한 존재 중에 가장 지존한 존재로 숭배하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인간을 지존(한 하느님)의 버금으로 귀하게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천당과 지옥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은 아마도 천주의 (진정한) 가르침이 아닌 듯합니다.
무릇 이로운 대로 나아가고 해로움을 피하라는 이유 때문에 선을 행하고 악행을 그만둔다면, 이것이 바로 ‘이로움(이利)’를 좋아하고 ‘해로움(해害)’를 싫어하는 것 (즉 공리 타산) 이요, 선을 (선 그 자체 때문에) 좋아하고 악을(악 그 자체 때문에) 미워하는 바른 뜻이 아닙니다.
우리 (중국)의 옛 성현들이 세상을 가르침에는 ‘이로움(의 취득取得)’을 말하지 않았고 오직 인의 仁義만을 말했을 뿐입니다.
군자가 선을 행함에는 (아무런 다른) 의도(의意=intention)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해(를 따지는) 의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저는 선비님의 나중 질문에 먼저 답하고, 그 다음 본래의 물음에 답하겠습니다, 그 “의를 없애라(멸의滅義)”라는 이론은 진실로 이단 (즉 불교나 도교)의 말 (즉 공空이나 무無)이며, 유교 선비들의 본연의 논의가 아닙니다.
유교의 선비들을 ‘의지를 성실히 함(성의誠意)’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합니다.
(바른 마음이) “자신을 수양하여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려서 천하를 태평”하게 한 뿌리와 바탕이(라 했으)니, 어찌 (인간의) 의지will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높다란 누각이란 단단한 기반이 없이는 세울 수 없듯이, 유교儒敎의 학문은 성실한 의지가 없으면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바로잡음(정심正心)’으로부터 ‘천하의 태평을 이룸(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무릇 실행하는 일들에 (우리) 모두의 의지 (또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게 한다면, (즉 외부로부터의 강압적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행동하게 된다면), 어떻게 그 의지가 ‘진실된지 誠’, ‘허탄한지(허虛)’ 따질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자면 시장에 가야금이 있는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자유롭게 연주해 보지 못하게 한다면, 어떻게 그것이 팔려 나갈 수 있겠습니까?
( 자유롭게 연주를 해 보게만 한다면) 그것이 옛날 (헌) 가야금이든 지금의 (새) 가야금이든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또한 의지란 형체body가 있는 (존재) 부류가 아니고 마음의 쓰임새일 뿐입니다. (마음을 써야) 비로소 의지가 바로 ‘그르게도(사邪)’, ‘바르게도(정正)’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올바른 선비(君子)’로 하여금 끝내 ‘의지를 갖지 못하게(무의無意)’한다면, (그 마음이) 언제 성실하게 될지 알 길이 없습니다.
『대학』에서 말하는 “(집을) 가지런히 함(제齊)” , “(나라를) 다스림(치治)”, “세상을 균등하게 태평을 이룸(균평均平)”은 반드시 의지의 성실함을 요체로 삼고 있습니다. (의지의) “성실함이 없으면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의지와 마음의 (관계는) 마치 시력과 눈의 (관계)와 같습니다. 눈은 도리어 보지 않을 수 있으나, 마음은 의지를 없앨 수 없습니다.
군자가 ‘없애야 할 의지(무의無意)’는 (내용 없는) 허망한 의지(虛意), 사사로운 의지(사의私意), 비뚤어진 의지(사의邪意)를 말합니다.
만약 (올바른) “의지를 없애라(*멸의滅意)”고 말한다면, 그것은 유교라는 학문의 통달하지 못한 것이요, (의지가) 선과 악의 근원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선과 악, 덕과 부덕은 모두 의지의 ‘바름 정正’과 ‘그름 사邪’에서 유래합니다. 의지가 없다면 선과 악이 없으며, 군자와 소인의 구별도 없습니다.
*6-2: 중국 선비가 말한다:
(그러나) “(인위적인) 의도를 하지 말라(무의毋意)! 반드시 선하다고 고집하지 말라! (반드시) 나쁘다고 단정하지 말라!” (고 공자가 말씀하셨으니), 세상에 유교는 진실로 그런 의론 (즉 무의毋意)을 가지고 있습니다.
*멸의滅意):
중국 선비의 앞의 질문에서 ‘의意’는‘ 의도intention’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중국 선비는 도덕 행위에서 어떠한 인위적*가식적 의도라도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 리치의 대답에서는 -인간의 도덕 행위의 근본 전제인-‘의지will’ 또는 ‘자유의지free will’의 의미로 ‘의意’가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중국 선비가 말하는 “의도가 없는(無意)’의 순수한 도덕 행위를, 리치는 ‘의지가 없는 행위’로 이해하고, 도리어 중국 선비를 향하여 그것이 불가능함을 논증하고 있다. 따라서 동일한 한문 글자 즉 ‘의意)’의 의미를 질문자(중국선비)와 대답자(마태오 리치)가 각각 상이하게 이해하고 있음에 각별히 주목해야만 한다.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그런 학문은 사람을 (자유의지가 없는) 흙이나 돌멩이처럼 만들고자 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으뜸가는 교의敎義( 즉 그리스도교의 교의)가 바로 이런 것일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하느님의 의지도 없고 손도 없는 (존재)라면, 또한 그를 흙이나 돌과 똑같은 것으로 보는 셈입니다. 이런 것을 ‘도리가 있는 학문(리학理學)’이라고 말한다면, 참으로 슬프고 슬픈 일입니다.
옛날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또한 (의도적으로) ”하지도 말고, 생각도 말고, 넘겨 나지도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경經 즉 『도덕경道德經』과 책, 즉 장자莊子)를 저술하였고, 그 추종자들이 그것들을 주석註釋한 것은, 진실로 천하(의 도리)를 바꾸어 모두 이 (도가道家의 도리) 한 가지만을 따르게 하려고 의도한 것입니다.
유독 책을 쓰는 것만은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오로지 천하(의 도리)를 바꾸려고 의도한 것만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저들이) 일단 (사태의) ”옳고 그름이란 (객관적으로) 판결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또한 어찌 ‘옳고 그름(시비是非)’를 변별”하는 논변을 하는 것입니까?
(도가에서) 세상에 ‘이름(名)’과 ‘이치(理)’를 변별하는 것만은, 유독 논변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들 도가道家는 이미 스스로 이론과 행동이 서로 모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세萬世의 스승이 되려고 한다면,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을, 저는 활쏘는 일과 같다고 봅니다. 과녁에 적중하면 “잘했다(선善)”고 하고, 적중하지 못하면 “나쁘다(惡)”고 합니다.
천주께서는 저절로 과녁을 적중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지극히 순수한 선善(만) 가지고 있으며, 털끝 만한 악惡도 없으니 그 덕德은 지극합니다.
우리들이라면, (과녁에) 적중하기도 하고 못 하기도 합니다. ( 우리들이) 수련한 그 공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닦은) 덕이 이르지 못함이 있으면, 일을 행함에 적중하지 못하니 좋은 것(善)과 나쁜 것(惡)이 섞여 있게 됩니다.
선을 행하고 악을 금하는 일에 (강력한) 의지를 갖는다고 하여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의지를 없애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밖에 의지가 없는 존재는 예를 들어 쇠붙이, 돌멩이, 풀, 나무 같은 종류들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나중에라도 덕 있는 것도 부덕한 것도,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의지를 없이 하고, (따라서) 선행과 행동 없는 것을 도리로 삼게 한다면, 그것을 우리 인간들을 우선 쇠붙이, 돌,풀, 나무처럼 되게 한 다음에, 그것들의 도리를 이루게 할 뿐인 것입니다.
입력:최마리 에스텔 수녀/20260701/PM 20:02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