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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평등이 완전한 사회를 만든다
계획경제를 주장하는 것은 시장경제가 불평등과 과도한 경쟁, 빈곤, 박탈감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이를 해소하고 평등한 상호관계 속에서 참여와 연대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만들고자하는 경제적 기초가 바로 계획경제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계획경제에서도 중앙계획기관 혹은 공장위원회나 소비자 위원회가 전문적인 학식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사실상 장악되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불평등과 소수의 지배가 시작되는 것이다. 종종 지식, 정보 자체가 권력, 혹은 부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전문가에 대한 의존이 심화되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상하관계는 굳어지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아주 세심한 장치와 배려가 없다면 관리, 계산, 중요한 기술적 역할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격차가 발생하고, 사회적 필요에 따른 분업이 나중에는 일종의 계급관계처럼 변할 수 있다. 기존 노동자국가(소련, 중국, 동구, 북한 등)들의 관료제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관료제뿐 아니라 지식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모순 등 불평등이 발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존 노동자국가의 실패를 극복하고,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서 시달려온 근로계급에게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평등의 개념이 보다 확장되고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평등이 우리의 지향일 뿐만 아니라 사회를 운영하는 가장 기초가 된다는 사실이 확인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획경제는 완전한 평등이 실현되는 체제이고, 완전한 평등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특히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관리자와 피관리자의 모순이 극복되어야 한다.
역사적 경험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초기부터 전문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앞서 살펴본 데로 계획경제에서 제기되는 계산의 문제는 구체적으로는 훈련과 지식의 문제를 제기한다. 따라서 중앙계획기관이나 공장단위의 경영진에게도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해졌다. 물론 자본주의에서도 계산의 문제는 중요하다. 건설현장에서 현장기사가 그날 쓰이는 레미콘의 양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은 시멘트포대를 나르는 일보다 중요할 수 있다. 즉 계산이 잘못되어 레미콘 차가 너무 많이 현장에 온다거나, 혹은 덜 와서 보게 되는 손실을 고려한다면 자본가 입장에서도 정확한 계산능력을 가진 기술자가 매우 소중하다.
이러한 이유로 소련에서는 초기부터 공장운영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노동자 평균임금보다 몇 배를 받는 전문경영인들을 고용했다. 그리고 유일관리제를 도입하여, 경영자에게 권한과 책임을 집중시켰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피관리대상, 사실상 피고용자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과학자들과 일반 민중들과의 차이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모스크바는 두 번 울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소련영화에서는 방송사 아나운서로 일하는 여성과 기계기술자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그 영화 곳곳에서 기술자에 대한 거룩한 칭송을 하는 대사가 종종 등장하지만 사실 그것은 극화된 위선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육체노동에 대한 칭송이 아니라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칭송일 뿐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대학교에 다니는 여성이 탄광노동자에게 시집을 가는 일이 당성의 일환으로 권장된다. 그 여성은 노동계급에 대한 헌신과 존경을 바탕으로 그러한 결단을 내린다. 그러나 육체노동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아무리 높아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간극은 메워지지 않는다. 북쪽에서 유일관리제를 대치하기 위해 도입한 “대안의 사업체계”가 전문가의 부족을 타개하고 당의 전일적 공장지배를 달성하기 위해 시도되었지만 그 역시, 전문가의 지배를 타파하는 데 역부족이었던 것처럼 심리적 치료만으로 사회적 모순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모순을 해결하는 균형적 직군
균형적 직군은 자본주의 노동분업을 혁파하고 자원배분의 정의를 제대로 세우기 위한 방안이다. 개인에 대한 자원배분의 기준이 노고와 희생에 대한 보상이라면, 보상의 기준이 되는 것은 반복적이고 고된 육체노동의 양이다. 그래서 교수도, 의사도 적정한 시간만큼 육체노동을 수행하게 함으로서 다른 사람의 정신노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균형적 직군의 개념이다. 즉 다수의 정신노동을 보장하기 위해 다수가 육체노동을 의무적으로 수행하자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균형적 직군 개념은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한국사회는 고학력사회다. 세계에서 대학졸업자 비율이 가장 높다. 그리고 그 정도는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정신노동 일자리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 대졸자가 집배원, 환경미화원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조건에서 전통적인 노동분업-즉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를 유지하는 사회주의란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없다. 사회주의는 완전한 평등, 본질적 평등을 앞세워 매력적인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현재의 생산력발전 정도는 균형적 직군을 가능케 하는가? 물론이다. 먼저 자본주의 하에서 육체노동의 상당한 부분이 모욕적이거나 낭비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유흥업소 근무자들(적게는 100만에서 많게는 400만으로 추정되는)과 주차장앞에서 손을 흔드는 주차요원들, 경호회사의 건장한 사내들이 그렇다. 이러한 육체노동을 제외하면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육체노동의 양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래서 이 육체노동을 사회적으로 배분하면, 주당 16시간, 이틀정도의 노동시간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고도의 물리학 연구자도 머리를 식히고, 사회참여의 자긍심을 갖기에 충분한 시간을 육체노동으로 할애할 수 있을 것이다. 양자역학에서도 안 깨지고 있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만들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슈뢰딩거도 군대에서 4년 넘게 복무를 했었다. 천재들의 뇌도 육체노동에 의한 소뇌의 자극에 의해 더 창조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소위 암묵적 지식으로 표현되는 생산기술과 경험인데, 이것은 비정규직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도 이직률이 높아서 문제가 되고 있다. 균형적 직군하에서 한 사람의 생산노동시간은 매우 적지만 시간이 지나 숙련도가 높아지면, 오히려 노동의 질은 높아질 수 있다. 덕분에 인문사회영역에 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과학연구에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면 사회주의 사회를 문화적으로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인식의 경계를 보다 넓혀줄 것이다.
이렇듯 균형적 직군은 사회구성원들의 노고와 희생의 양을 평등하게 배분함으로서 사회정의를 실현한다. 특히 전문가에게 집중되는 정보를 분배하는 역할을 함으로서 공장위원회나 소비자 위원회에서 각 개인의 권능을 평준화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나는 공장경영이나 재화배분계산은 잘 모르니, 전문가에게 맡겨 버리자” 식의 대리의식을 최소화시킬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사회적 의제에 대해 각 개인의 동등한 자긍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자기가 속한 공장위원회, 소비자위원회는 물론이고, 아프리카 독재국가의 기근을 해소하기 위한 지원방안을 놓고 사회적으로 쟁점이 될 때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적극적인 견해표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토론장에서 직접!
균형적 직군은 민중의 자치능력을 고양시킨다
민중의 자치능력에 대한 회의는 부르주아 혁명기에 반동체제, 혹은 구체제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대체적인 주장이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의 동력이자 계승자였던 계몽주의자들은 민중의 지배가 실현되는 정치체제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 왔는데, 그러한 부르주아 시대의 상상력이 총집결한 곳이 이민자들에 의해 건설된 미국이다.
미국 민주주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타운민주주의다. 타운은 아직도 미국행정의 기초단위이다. 초기 미국동북부에 건설된 타운에서는 1년 임기의 일종의 집행위원 11명을 선출하고, 이 사람들이 하수도, 청소 등의 타운의 운영에 필요한 직책을 맡았다. 이들은 물론 비전문가들이고, 대개가 직책이 끝나면 생업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편적이다. 미국에서 확립된 배심원제도도 따지고 보면 인민재판의 축소판인데, 마을사람 전체가 판관이 되어 피고인의 유무죄여부를 가리는 방식이 제도화된 것이 바로 배심원제도인 것이다. 물론 마을의 보안관도 선출직이고, 타운이 모여서 구성하는 카운티(군)의 판사, 검사도 모두 선출직이다. 타운민주주의는 현재까지도 동부지역에서는 훌륭히 운영되고 있고 인민의 참여가 보장되는 미국의 사법제도는 여러 결함이 지적되지만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하에서, 그리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노동분업에 의해 위기를 맞고 있고, 이미 위기가 깊어졌다. 배심원석은 고도의 전문직이 된 변호사들을 위한 관람석이 되었고, 타운민주주의는 지역의 유지들, 대자본의 인위적 여론형성에 의해 휘둘리고 있다. 시장자유와 민주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판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 부르주아이해를 대변하는 집행위원회, 독재가 아니라 만인을 위한, 만인의 지배,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대체되어야 한다. 민중에게 잠재된 자치능력을 최대한 끌어 낼 수 있는 균형적 직군하의 사회주의는 완전에 가까운 민주주의, 종국에는 국가의 소멸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평등과 참여의 원리로 운영되는 계획경제는 내부의 오류를 수정하면서, 그리고 결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집단적인 학습과정을 제공하면서 보다 완전한 사회로 전진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하면 사람들은 당독재, 개인독재로 혹은 공포정치로 이해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부르주아 독재에 대한 재치 있는 반대말이자, 노동자가 꿈꾸는 완전한 평등세상의 정치원리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원리는 균형적 직군에 기초한 계획경제의 실현으로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다음에는 계획경제와 환경문제를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