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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참 별난 사랑>의 줄거리:
참 별난 사랑
(고전13:1~7)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참 별난 사랑>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사랑은 참 별난 사랑입니다.
이런 참 별난 사랑이라는 제목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우리가 읽은 1절과 2절 말씀은 그렇다고 합시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 납득이 갑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다, 오케이!
근데, 3절의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씀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사람이 외식적으로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의 극히 일부를 남을 위하여 구제에 쓰고, 기부하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중팔구의 사람은 만약에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통틀어서 구제했다면 그것은 진심어린 사랑이 아니고는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이런 저런 희생, 시간을 희생할 수도 있고 때로는 자기의 지체 중 하나를 희생할 수도 있고, 자기의 지위나 명예를 희생할 수도 있지만,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고 한다면 이건 진심어린 사랑이 없으면 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오히려 오늘 본문을 놓고 우리가 거꾸로 얘기할 수가 있어요.
오래 참고 온유한 듯 해보여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지만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오래 참는 사람 중에서 사랑이 없는 사람이 많아요.
언제나 공손하고 무례히 행하지 않아도 사랑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게 쉽습니까? 내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구제하는 게 쉽습니까?
무례히 행하지 않는 건 세발의 피에요, 내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구제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물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와 비교하면, ‘오래 참고’부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의 사랑의 묘사들은 사실 쥐뿔도 아닙니다.
어디 갖다 댈 수 있겠어요?
도대체 무슨 뜻으로 사랑을 이렇게 말하는지…
정말 대단한 사랑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사랑이 없이 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고 얘기해놓고, 사실은 ‘오래 참고’부터 나머지까지 다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어요, 생활 속에서.
무례히 행하지도 않고, 때로는 굉장히 어느 대상에 대해서 오래 참고 있기도 하고, 시기하지 않기도 하고, 자랑 안하면서 사는 사람 많습니다.
근데 이게 사랑이래요.
무얼 갖고 말하는 건지 아직 모르겠어요.
또, 두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모습과 비교해봅니다, 언제나 우리가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의 기준은 예수님이세요, 무엇에 관한 지식이든지 간에.
그러면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삶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사랑에 대한 묘사들이 예수님에게서 문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과연 오래 참기만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성내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이 분노하셨습니다, 참지 않는 듯 한 모습을 많이 보이십니다.
예를 들어 성전정화사건에서는 채찍을 들어서 성전을 다 뒤엎어놓습니다.
여기에 어디 오래 참음과 온유함과 성내지 아니함과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까?
그리고 끊임없이 논쟁을 하십니다.
또, 대제사장이나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태도나 내용들은 정말 그 당시 사람들이 볼 때,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은 대제사장이나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받들면서 그들의 삶이 진행됐었기 때문에, 무례하기 그지없습니다.
정죄하십니다, 심지어는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저주까지 하십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또 뭘 말하는 것일까요?
또 질문이 있어요.
산상수훈의 말씀과 비교해보면 비슷한 분위기의 구절이 있고, 전혀 다른 분위기의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붙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 이건 완전히 비슷해요.
오래 참는다는 말과 온유하다는 말과 시기하지 않는다, 성내지 않는다, 이런 말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분위기의 구절이 있어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고발해서 속옷을 가지고자 하거든 겉옷까지 갖게 하며, 누구든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무엇이 다릅니까? 여러분.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사항들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바울의 사랑의 노래에 전체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뭐냐 하면 행동적 요소가 거의 빠져 있습니다, 거의.
주로 마음가짐에 대한 언급들이에요, 마음가짐의 태도들에 대한 언급들이에요.
한번 볼까요?
4절, 오래 참는다, 온유하다, 시기하지 않는다, 자랑하지 않는다, 교만하지 않는다, 물론 자랑하기 위해서 말로 떠벌이지 않는다는 게 행동이 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 하면 겉옷까지 벗어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런 행동적 요소가 다 빠져있습니다.
도대체 바울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그러면 뭘까요?
참 별난 사랑이지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바울 생각에는 자기가 생각하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을 다 팔아 구제해도 아무 소용없는 것이고, 심지어 몸을 불사르는 데에 내어주는 그런 극단적인 궁극적인 희생을 해도 소용이 없다.
주님께서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는데, 사도바울은 몸을 불사르는 데에 내어주는데도 사랑이 없으면… 대체 이 사랑은 뭘 말하는 것일까요?
또,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사랑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배치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자, 그러면 한 마디로 말해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사람과 관계를 해야 사랑이라는 게 의미가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 사랑이 뭐냐,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관계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시게 되는 상태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게 되는 상태.
조금 달리 표현하면, 사람과의 만남의 순간에 만남의 주체가 내가 아닌 하나님이 되시는 상태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그리고 이것이 은사라는 거예요.
사람을 만나고 있는데, 분명히 내가 만나고 있는데, 실제 만남에 임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사건, 이게 은사고 이게 기적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 은사로서의 기적을 기적 중에 최고의 기적이라고 일컫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모해야 될 은사 중에서 가장 사모해야 될 은사가, 모든 사람을 만날 때 그 만남의 순간에 만남에 임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상태가 되는 은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생각에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이 본문의 내용은 사람을 상대할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기에 적절하고, 혹은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그 순간에 마음의 상태를 여러 측면에서 표현하고 있는 말씀들인 것입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이런 모든 말씀들은 지금 내가 사람을 만나고 있는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떤 거냐를 말한 거라는 얘기에요.
그렇게 묘사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으며… 이런 하나하나가 사랑 그 자체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타나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신 그 사람의 마음을 묘사하자면 바로, 오래 참는다, 온유하다, 시기하지 않는다, … 이런 식으로 표현이 가능해지는 마음의 상태라 이겁니다.
그러므로 자구(字句)적으로 오래 참는다, 온유하다, 시기하지 않는다… 이런 것이 곧바로 사랑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타나실 수 있는 마음상태가 사랑이고, 이 말씀을 좀 더 들여다보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한번 보세요.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갖게 되는 마음상태가 있어요.
그 마음상태는, 참을 수 없는 마음상태, 꼭 과격하게 드러나서 참지 못하는 게 아니라 속으로 ‘어휴, 저 말하는 본새 좀 보소, 저 저 못 배운 티가 나는구먼!’ 이건 벌써 참지 못하는 거예요, 그 사람에 대해 단정 지어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4절부터 7절까지 사랑의 구체적인 내용을 의미한 이 부분은 내일 하겠어요.
오늘은 사도바울이 말한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정의에 집중해서 말씀을 나누는데, 하여간 이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이 모든 것들이 다 우리가 주체로서 사람을 만날 때에 갖게 되는 모든 마음상태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은 참지 못함이 죽는 것이고, 온유함은 저 사람을 거부하게 되는 그런 상태를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이렇게 전부 따져보면 사람을 만날 때 우리가 늘상 갖게 되는 마음가짐을 다 십자가에서 죽이는 상태로 만나고 있는 것을 말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은사란,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간에 십자가에서 내가 죽으면서 만나는 겁니다.
그래서 참지 못할 일이 생길 때 십자가에서 죽으므로 오래 참는 것처럼 보이고, 상대방에 대해 거부감이 생길 때 십자가에서 죽으므로 온유한 것처럼 보이고, 그 사람 앞에서 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대 십자가에서 죽으므로 자랑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고, 그리고 저 사람 앞에서 내가 교만한 마음이 생길 때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교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이렇게 결국 사람을 만나는 순간에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만나는 겁니다.
이게 은사이고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성령님께서 오셔서 강력하게 내 마음에 역사하심으로써 내가 십자가를 붙잡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만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이거죠.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거꾸로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어요.
오래 참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아도 오래 참는 사람 많습니다, 성격상 기질상 그리고 내 처지가 지금 참지 않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서, 그래서 참는 사람 많아요.
무례히 행치 않아요, 성격 자체가 온순하고 예절바르게 교육을 잘 받아서 누구를 만나도 무례히 행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참 재미있지요?
그러니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무리 무례히 행치 않아도, 아무리 오래 참고 있어도, 아무리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아도, 그 만남의 순간에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나타나십니까?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오래 참고,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무례하지 않고, 성격 때문에 오래 참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오래 참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이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요.
앞에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천사의 방언을 말해도 소용없다, 사람을 만날 때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산을 옮길 만한 능력 행함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믿음의 은사가 있어도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 거꾸로도 얘기가 될 수 있는 거지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만 하면 다 소용이 있게 돼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만날 때 하나님이 만남의 주체가 되셔서 나를 통해 나타나시게 되는 일인 이 사랑의 은사만 있으면, 이것이 기본적으로 이루어질 수만 있으면, 나머지 모든 은사가 다 필요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서 동원될 수 있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도 나타날 수 있고, 능력 행하는 은사, 외국어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이 모든 은사가 다 나타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사람을 만날 때 하나님이 전면적으로 주체로서 나타나시는 일이 없으면, 어떤 은사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 은사가 조금씩 경험된 기억을 갖고 있음으로써 더 신앙에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요.
이렇게 사람을 만나는데, 은사로 우리에게 가능해지므로 내 마음상태가 십자가에서 죽는 상태가 되어서 일단 하나님이 나타나시게 되면, 하나님이 나타나시게 되는 양상은 어떻겠습니까?
예측불허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습이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셨던 거예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거기에는 온유함도 안 보이고 분노함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성을 내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사랑의 정의를 따라서 그 내막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과 장사하도록 허락하는 대제사장들을 대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실 때 예수님이라는 인간으로 오신 그분의 인격을 통해서 영이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이 채찍을 들고 치신 겁니다, 단 예수님을 통해서 하신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은 대제사장을 향하여 죽은 거예요, 오래 참으신 것이고 온유하신 것이고… 근데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에 대해서 치밀어 오르는 반감이 있는데, 십자가에서 죽고 오래 참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참음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통해 나타나실 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상대방에게 분노하실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하신 저주, 이런 모든 것들은 다 이렇게 사도바울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과정을 통과하시면서 나타난 일이란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걸 구분할 수 있느냐?
내가 지금 화가 나서 저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건지, 나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오래 참는 마음상태가 되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 분노하고 계시는지를 어떻게 구분하느냐?
조그맣고 소소한 일들이지만 경험한 바에 의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분노하게 될 때는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내 마음은 평강한 데에 있으면서 분노합니다.
이게 은사라는 거예요, 이게 기적이라는 겁니다.
마치 떨기나무 가운데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떨기나무에 불이 붙지 않았습니까?
불은 붙는데 떨기나무는 재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분노하게 된다는 것은 내 마음이 불타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 마음에 재만 남아요.
화를 내고 나면 마음이 공허한 이유가 재만 남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으므로 하나님이 임하셔서 분노로 나타나시게 될 때는 내 마음은 그대로 평강 가운데 있어요, 마치 떨기나무에 아무리 불이 활활 타도 잿더미가 되지 않는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처럼 모세를 부르셔서 보낼 때, ‘이제 사람을 만날 때 네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너를 통해서 내가 나타날 것이다’라는 얘기를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바로 왕 앞에서 모세가 한 모든 얘기는 다 바로에 대한 사랑이에요.
바리새인들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보다 십자가에서 죽으므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바리새인에게 저주를 퍼부으시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바리새인을 향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어설픈 존경보다는 하나님의 나무라심과 비판이 주어져야 그게 더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는 고로 나의 심판은 의롭다’
주님이 판단하실 수 있어요, 주님이 심판하실 수 있고 얼마든지 헤아리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부인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나타나시게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이 사랑이신 거예요.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이 주님 한분이 지구에 오심을 통해서 하늘에 계신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게 사랑이 아닙니까? 이게 사랑이에요.
그 만남에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욕을 먹을 수도 있고, 나무람을 받을 수도 있고, 칭찬을 받을 수도 있고, 이끌림을 받을 수도 있고, 지혜로운 말씀을 들을 수도 있고, 지금 헤어나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길을 보여주실 수도 있지만, 하여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타나셔야 된다는 얘깁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은사요, 기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애쓸 것은 이것 한 가지에요.
사장님을 대한다, 자식을 대한다, 배우자를 대한다, 십자가에서 죽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면, 우리가 내일 살펴볼 모든 내용들이 사실은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십자가가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장의 사도바울의 말씀이 다시 한 번 기억나지 않습니까?
대단한 사건입니다, 대단한 사건.
사람을 만날 때, 십자가에서 죽으면 하나님이 나타나심으로써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참 별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참으로 생각할수록 놀라운 것은 어쩌면 십자가 안에는 이토록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또 얼마나 감사한 것은 십자가라는 단 하나의 사건 안에 들어있는 그 무궁무진한 모든 내용들을 성경이 이렇게 구구절절이 천변만화한 표현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시는지 감사하고 감탄할 뿐입니다.
하나님, 오늘 사람을 만날 때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만나는 동안에, 참 별난 사랑이 이루어져서 모든 사람들이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심을 경험하는 참으로 복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
이전 설교문을 보면서 다시금 십자가와 사랑을 올바로 구분하는 은혜의 시간 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수 년만에 다시금 읽어보는 사랑장에서 어떻게 해야 참된 사랑인가를 다시금 새겨 봅니다!
"십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