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故鄕)
백석(白石)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연지간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이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시어, 시구 풀이]
북관(北關) : 함경남도 지방의 별칭
여래(如來) : 석가모니 여래의 약칭, 부처를 높여 부르는 말
관공(關公) :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
막역지간(莫逆之間) : 벗으로서 아주 허물 없는 사이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 고향을 떠나 ‘북관’이라는 타향의 공간에서 유랑하는 시적 화자의 소외감과 고독감이 나타나 있다.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 석가모니 여래 같은 인자한 모습과 관운장 같은 긴 수염을 드리우고 있는 모습의 묘사를 통해 아버지의 이미지와의 유사성을 은근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신선 같은데’라고 하여 동화적 요소를 삽입, 과거 회상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시각적 심상을 통한 직유법을 사용하였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 화자는 ‘아무개 씨’와 진짜 부자(父子)는 아니지만 그를 아버지라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여기서 ‘아무개 씨’는 언론사 사주(社主)였던 방응모(方應謨)로 그는 백석(白石) 부친의 친구였으며, 백석에게 유학 자금을 보내 준 은인이었고, 훗날 가난한 백석을 교정부 기자로 채용해 주는 등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 막연지간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 의원의 웃음이 반갑고 따뜻하다. 의원은 ‘아무개 씨’인 그 분과 아주 허물없는 친구라고 말하고 있다. 아버지의 친구 분을 만난 것이다.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시적 화자는 여기저기 떠도는 중에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다. 갑자기 아버지의 손길처럼(고향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의원의 손길에서 이를 확인하고 있다.
[핵심 정리]
지은이 : 백석(白石, 1912-? ) 시인. 본명은 백기행(白蘷行). 평북 정주 출생. 1935년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여 등단. 그의 초기 시는 정주 지방의 사투리를 구사하거나 토속적인 소재들을 시어로 채택하여 파괴되지 않은 농촌 공동체의 정서를 드러내거나, 동화적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 이후에는 여행 중에 접한 풍물을 표현하는 기행시나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창작하였다. 시집으로 <사슴>(1936), <백석 시 전집>(1987)이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서정적, 서사적
어조 : 다정다감한 어조
심상 : 감각(시각, 촉각)적, 서술적 심상
구성 :
1-2행 북관에서 병이 들어 의원을 뵘
3-7행 신선 같은 의원이 고향을 물음
8-12행 아무개 씨와 막역지간이라는 의원
13-15행 아버지의 친구로서 진맥하는 의원
16-17행 의원의 손길에서 느껴 오는 향수
제재 : 고향
주제 : 육친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
출전 : <삼천리 문학>(1938)
▶ 작품 해설
‘고향’의 주제를 펼쳐 가는 백석(白石)의 시 중에는 시적 자아가 개인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내보이지 않는 작품이 있다. 이러한 시에서 시적 자아는 공동체의 품 속에 깊이 잠겨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는 현실의 작가 자신의 고향이라는 공동체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럴 경우 고향이라는 공동체는 삶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는 세계로 형상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의 시와는 달리 공동체의 풍요로움을 더 이상 드러내지 않는 작품들도 있다. 이러한 시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은 공동체의 풍요로움이 모두 제거된 상황 속에서 아주 빈약하게 드러나 있다. 이 인물들은 공동체적 품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가난해진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들 시에서는 공동체의 풍요로움이 완전히 소멸되어 있는 셈이다.
백석의 시 ‘고향’은 전자의 경향을 보여 주는 작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이야기식 시’의 형태로 서사적 진술을 통해 서정성을 띤다. 유랑 중 병이 든 시적 자아가 가족애와 공동체적 삶을 그리며 고독감을 극복하려는 면모를 보인다.
타향인 북관을 혼자 떠돌다 병이 든 ‘나’가 아버지뻘 되는 의원을 만나는데 그 의원이 고향을 묻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가 아버지의 친구임을 확인하고 그 일을 통해 육친과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 이야기 시이다.
‘고향’은 타관에서 떠도는 자의 절절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백석의 향수는 단지 고향의 풍물이나 인정 세태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적 소재들은 보다 깊고도 지속적인 고향의 삶의 역사와 관련을 맺으려 할 때에만 선택된다. 풍속이나 이야기로서의 설화가 시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백석의 시 세계의 주인공은 이처럼 공동체의 공간을 그리워하고 있다. 아울러 자신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큼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는 자신의 현실 모습을 확인한다. 그리고 바로 이 모순이야말로 백석의 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창조적 힘이다.
첫댓글 시작 공부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