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모곡」
1
아버지는 내 나이 8살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마흔 초반에 홀로 되셔서 6남매를 키우셨고, 불과 몇 년 후 타향을 잃어버리고 서울로 떠나야만 하셨다. 낯설고 추운 도시의 하늘 밑에서 모진 고생을 하시던 어머니를 바라보며 나는 얼마나 가슴아파했던가.
나 역시 14살 때부터 모진 고생을 해야 했지만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내가 힘들어서가 결코 아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쳐다보기에도 아깝다”고 하셨다던 그 어머니가, “저리가라는 말씀 한번 하지 않으셨다”던 그 소중한 어머니가 어린 나보다도 더 고생을 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밤새워 공장에서 일하고 학원급사로 일하면서도 어떻게든 배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버틴 것은 오로지 불쌍한 내 어머니를 끔찍이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요 어머니, 조금만 더 참으셔요. 그러면 저도 자라서 당신을 지켜낼 수 있는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배움의 길은 늦어졌고 남들 고등학교 다닐 나이에 야간 중학교에 다니고, 남들 대학 다닐 나이에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입대하여야 했고, 제대 후에도 빈곤한 삶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봄 내게 있어 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어머니는 공장 화재로 참혹하게 돌아가셨느니... 나는 차디찬 재로 변한 당신의 목숨을 가슴에 묻은 채 1년간 오열하며 어머니의 발자취를 내 일기에 기록하였다. 그러나 내 어찌 그 분의 슬픈 생애를 차마 다 기록할 수 있었으랴.
그 후 나는 노인이 되어서야 자서전을 완성하고, 드디어 가슴에 품어왔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가곡으로 만들어 당신의 거룩한 생애 앞에 드리고자 하였느니... 어머니, 부디 당신을 지켜드리지 못한 이 죄 많은 자식을 용서하옵소서.
어머니(1)
비 내리는 이 저녁 홀로 싸립문가에 서면
안개 자욱한 뜰에 추수 끝난 늦가을의 빗소리
어느새 날은 저물고 아득히도 먼 여로
눈물지던 지난날은 늘 꿈밖이었네
마른 풀 비비적이는 부서진 세월동안
어머니, 그 깊은 눈자락에 휘날리던 눈발이여
가랑비 등 적시며 홀로 가신 내 어머니
산자락도 눈물에 젖는 쓸쓸한 그 뒷모습
발꿈치 쓸어안으매 돌아보며 우셨어라.
그 눈물 강물처럼 흘러 온 산을 적시는데
굽이굽이 설움뿐인 발자취를 내 어찌 감추오리
차라리 바꾸고 싶은 벌레 같은 내 목숨
(1983년 음력 3월 17일)
이후...
나는 더욱 더 눈물겹게
사랑하고 사랑해야할 것들이 많나니
아카시아와 분수
바다와 들과 바람
그리고 4월과 진달래꽃
시(詩)와 가곡(歌曲)
그러나 무엇보다
더욱 눈물겹게 사랑해야 하느니
나의 어머니
그 분의 삶과 눈물
그 분의 손과 발
그 분의 눈동자
그리고 그 분의 슬픔 목숨
나의 生日은 죽었다.
나의 생일은 이미 나의 생일이 아니고
내 어머니의 생일인 까닭이다.
이후...
나는 더욱 더 눈물겹고 진지하게
써야할 이야기들이 있나니
세상에 많은 꽃과 나무
너와 나의 이야기
때론 어둡고 끈끈한 삶의
구석진 부분과 텅 빈 손에 대하여
채워지지 않는 소망과
잃어버린 추억과 시절에 대하여
그러나 무엇보다
더욱 더 열정적으로 써야 하느니
내 어머니의 입술과
섬세한 그 분의 가슴 속 이야기를
사뭇 아롱지게 새겨둘지니
나의 이야기는 이미 나의 이야기가 아니요
내 어머니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오오, 4월은 오는데
이 죄인은 어디에 가서
이 부끄러운 낯을 감추오리까...
(1984년 3월)
어머니 날 낳으시고
얼마나 기뻐하셨으랴
모진 아픔과 비 오듯 쏟으셨을
그 땀방울 잊은 채
핏덩이를 부둥켜안던 그 날부터
행여나 앓을세라 품안에 고이 품어
애지중지 기르시며 얼마나 아끼셨을 고
추운 날에는 더우신 그 가슴으로 감싸고
기인 밤을 다독거려 날 재우셨으리
아카시아 피던 날에 아버지 여의시고
날 붙안고 남몰래 얼마나 우셨을 고
그 눈물 한으로 맺혀 강물처럼 흘러가고
아득하고 서러운 길 홀로 걸어오셨어라
거룩하옵신 그 사랑 그 은혜 갚기도 전에
홀연히 떠나가신 님이여
내 어찌 따라죽지도 못하였던고
풀도 채 돋지 않은 그 무덤가를
내 어찌 돌아서서 나올 수 있으리오
바람 불고 비오는 밤이면 더욱 생각나 우노니
어머니,
그 슬픈 음성을 내가 듣나이다.
그 슬픈 생애를 내가 듣나이다.
한 많은 그 일생을 무엇으로 다 엮으오리
굽이굽이 설움뿐인 그 발자취를 어떻게 감추오리
모진 풍파 헤쳐 가며 홀로 고생하셨어도
참혹하고 무서운 고통만을 안고 가셨으니
내 어찌 찢어지는 이 가슴을 감당할 수 있으랴.
가엾어라 내 어머니,
영영 뵈올 수 없는 그 모습을 나는 정녕 잊을 수 없어라.
꿈에라도 한번 내 어머니 만나기를 빌고 또 비나이다.
내 어머니 날 낳으시고
얼마나 기뻐하셨으랴.
그러나 나는 그 목숨 같은 어머니 떠나보내옵고
어찌 따라 죽지도 못하였던고
아, 벌레 같은 내 목숨이여
천사 같은 내 어머니의 생명이여,
차라리 바꾸고만 싶구나.
(1983. 5. 16.)
첫댓글 김성만 작곡가 님~~
새해 들어 처음 찾아와 '(사모곡)1'을 읽어보다가
주루룩 눈물이 흘렀습니다.
6.25 전쟁을 어린 시절 겪은 사람이라면
삶의 시련을 겪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은
아마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삶이 더욱 눈물 겨웠음은
어머니를 그리는 애절함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어머니시지요. 저는 1983년 4월의 마지막날에 우리 어머니를 가슴에 묻고 지금까지 헛개비처럼 살았습니다. 사모곡은 이 세상 모든 위대한 어머니에게 바치고 싶은 가곡 입니다.
선생님.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