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마스코트를 '새'에서 '돌멩이'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반에 가서는 돌맨을 그리고 이게 저라고 많이 애용해달라고 선전도 했어요.
바위도 아닌 돌을 생각한 데엔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스스로를 '걸어다니는 새'라고 부른 건, 우선 제가 새를 참 좋아한 이유랍니다. 저는 이상가적 기질이 강하고, 현실엔 약간 부적응하며, 더구나 제 이름은 새와 관련이 있어요. 어릴 때도 날아다니는 꿈을 참 많이 꾸었답니다. 그래 저는 저의 자아를 새라고 생각했어요. 현실에 부적응하기에 아직 날 수 없는 '걸어다니는 새'로.
그런데 바꾸기로 한 겁니다. 돌멩이가 제겐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새가 날아다니고 노래를 할 수 있다면, 돌멩이는 노래도 못하고 날지도 못해요. 그냥 바닥에 박혀 있거나, 굴러다녀요. 모양도 꽃처럼 예뻐 눈을 끌지 못해요. 그런데 무엇보다 단단하고 오래가지요. 그래 내게 필요한 것은 높이가 아니라, 낮음이야. 내겐 겸손이 필요해. 낮은 데서 보는 하늘인 거야. 모양도 못나고 못생긴 게 이왕이면 더 맞겠구나 싶었어요. 새가 젊음이라면 돌멩이는 아마 늙음일 겁니다. 그게 더 맞다 싶어요.
세상에 드러난 꽃과 새 같이, 잘 난 것이 아닌 평범하면서, 아니 오히려 못남의 미덕을 지닌 돌멩이가 더 닮고 싶었어요. 개똥도 묻고, 풀줄기랑 기댈 수 있는. 아이들 같이 순수한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돌멩이. 정말 돌멩이는 아이나 할머니를 닮았어요.
그러고 보니까, 저 어릴 땐 돌멩이 갖고 많이 놀았어요. 색깔이나 모양이 신기한 것부터, 그냥 투박한 것까지. 소꿉놀이나 망치기를 할 때도, 그냥 친구로, 때론 보물로, 또 때론 매일 물을 주며 기르는 애완 대상으로, 돌멩이는 늘 같이 있었어요. 대학을 다닐 때도 돌멩이를 가끔 주웠어요. 그래서 텔레비전이나 책상, 화분엔 제가 주워온 돌멩이가 놓여 있곤 했지요. 그러던 것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하나 둘 사라지게 되었지요.
이제 다시 돌멩이를 느껴야겠어요. 세상에 퍼진 돌멩이들을 생각하면 행복해져요. 수없이 많은 돌멩이들이 있지만, 모양도 색도 같은 게 하나도 없답니다. 사람들이란 똑같아요. 저는 돌멩이 안에서 돌멩이의 인생을 읽고 느끼는 게 재미있어요. 여러분도 느껴보세요. 같이 돌멩이가 되면 더 좋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