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복음을 전하는 이유 1
사도행전 14:15-18
人生生活必要者甚多, 而有不可缺者何也? 一法律,二道德,三知識也. 無法律則盜賊繁興而民不得以聊生也, 道德壞敗則民不知禮儀而盡化爲禽獸矣. 無知識則不能與人競爭而終至野蠻矣. 然以上諸件皆非得救之道也. 擧一例有一紳士曾知法律之甚緊, 而又有高等學識人格相當, 故人稱之曰紳士也. 一日自己家以設電燈, 다마破傷無餘, 猝不可措得, 至一路傍盜官設電燈而歸揷之, 然且儼然自處曰紳士也. 猶不知其罪, 一日被人勸導至敎, 聞說敎竊人物則盜賊也云, 心始慙痛, 忍之而歸, 其後夕食時, 電燈忽然發電, 如推椎在頭, 不勝驚魂, 至堂悔改云. 此人知法律,知道德,又有知識而不知其罪, 乃聞福音而知罪, 故救援在福音, 不在於他. 福音有棄虛妄之勢, 有棄偶像之勢, 虛妄使國之文野, 及人之明暗, 在於偶像之去不去矣. 偶像使人愚昧, 偶像使人作奴隸, 偶像使人費財, 偶像使人好淫祀, 福祿自天而來, 人且自助而得矣. 彼好偶之蠻人, 屋內有多數偶像, 問之則曰 此頭痛之神, 此脚痛之神, 各肢體痛疼之時, 有神戱之故列作偶像而拜之, 如此昧知. 且手作木石之偶而日日求福, 是非愚甚乎? 故偶像使人昧知矣. 且偶像使人生奴心何也? 萬物皆有神, 到處生怖, 如傷弓之鳥, 一觸神靈, 或有敗家之患, 故擇墓地, 擇家基, 不敢動土, 啓土,取土皆有時, 不敢冒日, 使日師擇之, 手足不敢動, 生活不自由, 廚神,電神,山神,地神, 到處有神, 不敢開口, 不敢動手, 甚哉! 奴隸之害也. 祈尼丘山而生孔子云, 尼丘有能生孔子之道乎? 多偶之國不能獨在, 不見多偶之加洲乎? 又不見多偶之中人乎? 主曰不畏滅肉, 死不能滅靈者畏靈, 肉投獄者也. 人卽稟天, 何畏乎人也? 故福音棄此等之虛妄也. 某處設敎堂而請捐則不與一分, 某偶像欲建堂則不惜千金, 弘濟有一例, 韓末自宮中所養大君, 投財于五江及金剛五坮之間累百萬円也. 然而國且亡而無餘矣. 愚民佛供費財有何畀益也? 福音棄如此之虛妄也. 非但有形之偶也, 亦有無形之偶, 貪心淫心驕心等是也. 貪淫驕三者, 人皆被惑亦不能脫出, 溺死甚多矣. 自古未有貪而得者, 貪者與費者有分揀, 貪者生罪, 費者生寶矣. 貪故害人, 貪故奪人, 以利己爲主, 殺人及盜皆生於貪也. 故貪財爲萬惡之根本, 費者不欲濫費, 生之有道, 用之有道, 知寶在田中則傾産而買田, 知珠在市上, 亦傾産而買珠矣. 奪人害人而得者, 一未有保存者, 皆肉罪而得故也. 棄如此之罪者, 福音是也. 淫者不守節也, 淫於色, 淫於權, 淫於利, 見物生心, 如葭葦之動, 爲鬼為蜮. 爲猿為君子, 惑於一円之金, 市於一盃之酒, 無定見, 無主看, 是謂之人乎? 福音棄此等之虛妄也. 驕甚可憎, 得一力便聖人, 有一知便壓無知, 如水中之油, 不與衆合, 不與人和, 前日兩班有驕, 今日新班有驕, 往某國而反則氣抱一世, 蠻視自國之民, 覽一雜誌, 得某主義則便驕傲, 傍若無人, 皆新班蔑視自國之文化, 某國之文化視第一, 自國之先賢皆腐敗, 某國之先哲是偉人, 如是無骨蟲之新班, 是可憎也. 此等驕心非福音不能棄也. 福音有棄虛榮之心, 世相皆虛榮市也. 過此榮市者, 見物生心, 主謂動虛榮者曰 風葦乎! 吾敎會甲午之間甚旺盛, 人以爲政治必自敎會解決. 人皆輻湊入敎堂, 敎會常滿員, 尙洞全盛時代, 聽法會員常數千名, 會員當時人物皆屈指之人也. 然被動甚多, 而今日安在乎? 人當有不動性可也. 趙重峯當時見監司之過而不動後, 於錦山之役, 亦不動心而與七百義士殉節, 鄭圃隱至善竹橋, 見趙英珪之椎而不動遇害也. 福音能使人有不動之性遇害坦然, 太平洋破船之時光景, 能棄虛榮而就不動者福音也. 主又曰汝欲見美服者乎? 此等在大國之內也云. 當把大國內有奸淫之人, 食肉飮酒放浪貪縱者, 皆亡國之物也. 溺此虛榮, 國亡而不知, 民散而不知, 但淫樂者也. 能棄此虛榮而不動者福音也. 今日朝鮮人之虛榮心, 滔滔如海, 不溺者少矣. 泥峴七円之洋襪, 朝鮮女性, 先買去云, 甚矣, 朝鮮人之爲虛榮也! 요한腰革食蝗處野而猶能陳希律而死, 古朝鮮大官之門, 車馬常盤, 今日冷落無比, 虛榮泡沫風燈也. 不可留心而人多赴溺, 哀哉!
인생의 생활에 필요한 것이 매우 많으나 그 중에서도 빠지면 안 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법률, 둘째는 도덕, 셋째는 지식입니다. 법률이 없으면 도적들이 들끓어서 사람들이 편히 살 수가 없고, 도덕이 파괴되면 사람들이 지켜야 할 예절을 몰라서 다 새나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이 없으면 다른 사람과 경쟁할 수가 없어서 끝내는 야만적인 생활을 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의 여러 조건이 구원을 얻는 방법은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본다면 어느 한 사람의 신사가 있는데 이 사람은 일찍이 법률을 깊이 알고, 또 고등 교육을 받아 학식과 인격이 상당하여 사람들은 그를 신사라고 일컬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 집에 전등을 설치하다가 전구가 깨어지고 남은 전구가 하나도 없어 갑자기 구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관청에서 길가에 설치해놓은 전등을 훔쳐다가 집에 와서 꽂았답니다. 이 사람은 엄연히 신사라고 자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한 일이 죄 되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람들의 권유로 교회에 와서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도둑이라’는 설교를 듣고 마음에 비로소 부끄러움과 고통을 느꼈으나 그냥 참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저녁을 먹는데 갑자기 전등불이 켜지니까 마치 몽둥이가 머리를 치는 것 같아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하여 교당에 달려가 회개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법률도 알고, 도덕도 알고, 또 지식도 있지만 그가 지은 죄를 모르다가 마침내 복음을 듣고 죄를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복음에 있고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허망한 형세를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형세를 버립니다. 허망은 나라의 문명을 야비하게 만들지만 사람의 명암에 이르러서는 우상을 버리는가 버리지 않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상은 사람을 어리석게 합니다. 우상은 사람을 노예로 만듭니다. 우상은 사람에게 재물을 허비하게 만듭니다. 우상은 사람에게 음사(淫祀)를 좋아하게 만듭니다.
복록은 하늘로부터 오며 사람이 또한 스스로 자신을 도와서 얻는 것입니다. 저 우상을 좋아하는 야만인은 집안에 많은 우상을 설치해놓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이것은 머리 아픈 것을 맡는 신[頭痛神], 이것은 다리 아픈 것을 맡는 신[脚痛神]으로써 팔다리가 아플 때는 신이 농간을 부리므로 우상을 만들어 죽 늘어놓고 숭배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이렇게 우매합니다. 또한 손으로 나무나 돌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어 날마다 복을 달라고 구하니 이 어찌 어리석음이 심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을 눈멀게 합니다.
우상이 사람에게 노예근성을 가지게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물에 다 신이 있어서 가는 곳마다 두려움을 만들어줍니다. 마치 활에 상처를 입은 새가 굽은 나뭇가지를 보고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한번 신령에게 저촉되면 집안을 망하게 하는 우환이 생긴다고 하여 묘지를 고르고, 집터를 가리고, 또 흙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하여 땅을 파든지 흙을 가져오는 일에도 다 택일하여 행합니다. 그리고 날짜도 함부로 잡지 못하고 택일하는 일사[日師]를 시켜 날을 고릅니다.
손발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생활도 자유롭지 못 합니다. 부엌귀신, 번개귀신, 산신, 지신 등 가는 곳마다 귀신이 있어 입도 함부로 못 열고, 손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상에 노예가 된 피해가 이렇게 큽니다. 이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공자(孔子)가 태어났다고 하니 이구산이 어찌 공자를 낳게 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우상이 많은 나라는 독립할 수가 없습니다. 우상이 많은 아프리카를 보지 않았습니까? 또 우상을 많이 믿는 중국 사람을 보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육의 멸함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죽어도 영을 멸할 수 없는 자이고, 영을 두려워하게 되면 육이 옥에 던져지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곧 하늘에서 타고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할 것인가? 그러므로 복음은 이러한 허망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 교회당을 만들어놓고 연보를 바치라고 하였는데 한 푼도 바치지 않더니, 우상을 위하여 당집을 지으려고 하니 천금을 아끼지 않고 바쳤다고 합니다. 홍제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대한 말기에, 궁중에서 왕자를 위하여 오강(五江)과 금강산 및 오대산에 수백만 엔의 재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망하고 남은 것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불공을 하고 재물을 허비하여 보아야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복음은 이렇게 허망한 것을 버리게 합니다.
형체가 있는 우상은 말할 것도 없고, 형체가 없는 우상도 있습니다. 곧 이러한 무형의 우상은 탐심과 음탕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입니다.
탐냄, 음탕, 교만 이 세 가지는 사람들이 모두 유혹에 빠져 벗어날 수가 없고 거기에 빠져 죽는 이가 많습니다. 예로부터 탐심으로 얻은 자는 없습니다. 탐내는 자는 죄를 낳고, 비용을 쓰는 자는 보물을 낳습니다. 탐내기 때문에 남을 해치고, 탐내기 때문에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합니다. 살인하고 도둑질하는 것도 다 탐심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탐심은 만악의 근본입니다.
비용이라는 것은 함부로 쓰는 비용이 아닙니다. 비용을 만드는 데도 도리가 있고, 비용을 쓰는 데도 도리가 있으니 보물이 밭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면 재산을 다 팔아서도 그 밭을 사야하고, 구슬이 시장에 있음을 알면 역시 재산을 기울여 그 구슬을 사들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을 해쳐서 얻는 것은 한 가지도 보존되지 않습니다. 이는 다 육(肉)의 죄로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를 버린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음란은 절제를 하지 못 하는 것입니다. 여색에 넘치고, 권력에 넘치고, 이익에 넘치어 물건을 보면 욕심이 나는 마음이 마치 갈대가 움직이는 것 같아 남을 음모하기도 하고 무참히 짓밟아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 푼의 돈에 유혹되기도 하고, 한 잔의 술에 팔리기도 하여 일정한 견해도 없고 뚜렷한 주관도 없게 되니 이것을 사람이라고 이르겠습니까?
복음은 이러한 허망(虛妄)을 버리게 합니다. 교만은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한 가지 힘을 얻으면 문득 성인인 체하고, 한 가지 지식을 얻으면 문득 무지한 이를 억압합니다. 마치 물위에 뜬 기름 같아서 대중과 화합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합니다. 지난 날 양반들이 교만하였고, 오늘날 새 양반인 귀족도 교만하여 어떤 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 기세가 한 세상을 잡아 쥔 듯이 자국 국민을 야만인 취급을 합니다. 그리고 잡지책 하나를 읽고 어떤 주의사상을 좀 알게 되면 그만 교만하여져서 자기 밖에는 아무도 없는 듯이 건방을 떱니다. 이게 다 새로 생긴 양반으로 자국 문화를 업신여기고 남의 문화를 제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또 자기 나라 선현들은 부패하고 남의 나라 선철들은 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무골충(無骨蟲)의 새 양반들은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이러한 교만스러운 마음은 복음이 아니면 버릴 수 없습니다.
복음은 허영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은 다 허영의 도시입니다.이러한 허영의 도시를 지나는 자가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깁니다. 주님이 허영에 움직이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바람에 갈대라’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갑오년(1894년, 갑오경장) 무렵에 매우 왕성하였습니다. 사람은 정치가 반드시 교회로부터 해결된다고 생각하여 교회로 몰려들어오게 되니 교회는 늘 만원이었습니다.
상동교회가 전성할 시기에는 설교를 듣는 교우가 늘 수천 명이나 되고, 교우 중에는 당시에 손꼽을 만한 유명 인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외부에 의한 동요가 매우 많아서 지금은 그러한 시대가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마땅히 움직일 수 없는 성질을 가져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옛날 의병대장인 중봉(重峯) 조헌(趙憲)선생은 당시 감사가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방해하였지만, 동요하지 않았고, 후에 금산의 전투에서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칠백 명의 의사(義士)와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였습니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선생은 선죽교에 이르러서 조영규(趙英珪)의 철퇴를 보고도 충성심을 움직이지 않아 해를 당하였습니다.
복음은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움직이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평정한 마음으로 해를 만나게 합니다.
태평양에서 배가 파선할 때의 광경 중에 능히 허영을 버리고 죽음의 두려움으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한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주께서 ‘너는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보고자 하느냐? 이런 사람은 대국에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마땅히 대국에서 간음하는 자를 잡아야 합니다. 이들은 고기를 먹고, 음주하고, 방랑하며 탐욕으로 방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써 다 망국의 물건들입니다. 이런 허영에 빠지면 나라가 망하여도 알지 못하고 백성이 뿔뿔이 흩어져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단지 넘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허영을 버리고 마음을 동요하지 않는 것은 복음입니다.
오늘날 조선 사람의 허영심은 바다의 물결처럼 거침없이 일어나니 여기에 빠지지 않는 자가 적습니다. 진고개[니현泥峴]에서 7엔짜리 양말을 조선 여성이 제일 먼저 사갔다고 합니다. 참으로 지나친 일입니다, 조선 사람의 허영심이여! 요한은 가죽허리 띠에 메뚜기를 잡아먹으며 광야에 있었어도 오히려 헤롯 왕에게 진정하고 죽었습니다. 옛날 조선의 대관들의 문에는 늘 말과 수레가 메어있었으나 오늘에 와서는 쓸쓸하기가 그만이니, 허영이란 물거품과 같고, 바람 앞의 등불과 같습니다. 마음에 두는 것이 불가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그리로 달려가니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