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모험적 출발 / 누가복음 5:11
사람은 각자 안전한 생계 수단이 있어야 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의 부담이 되어 무일푼이 된다. 어릴 때 교육받는 것도 이를 위함이고, 종교를 믿는 것도 이를 위함이다.
이때 베드로의 안전한 생계 수단은 어업이었다. 이는 베드로의 선조들이 갈릴리 호수 주변에 살면서 어업을 익히 알고 바다 요리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주의 말씀대로 행하여 뜻밖에 많은 물고기를 잡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어업보다 나은 줄 알고 배와 그물, 어구를 모두 버리고 주를 따라갔으니 이것이 가장 모험적인 출발이었다.
주를 따라간 후에 어떤 방법으로 살아갈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또 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맹목적인 상태였다. 이런 위험한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동학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논과 밭을 팔고 교주에게 돈을 바치면서 곧 판서, 참판, 군수, 감사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와해되었고 성공하지 못했다. 홍경래 반란 운동 때 관서에 있던 사람들이 많은 돈을 바쳤지만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으니, 세상일은 모두 이렇게 허황되다.
이때 베드로도 이런 허영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무런 소득이 없자 주께 물었다.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님은 "인자가 중흥하여 보좌에 앉을 때 너희도 12보좌에 앉으리라"고 대답하셨지만, 역시 막연한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믿고 출발하는 베드로의 삶은 참으로 모험적인 출발이었다.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아브라함도 참으로 모험의 출발이었습니다. 세일 산의 적대적인 에서를 앞에 두고 출발하는 야곱의 걸음은 얼마나 위험했던가.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보고를 들은 여호수아의 출발 역시 모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오직 모험뿐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나라를 얻기 위해 모험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순전히 모험 중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남을 속이거나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자의 모험은 법에 걸리면 쓸모없는 모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험은 보이지 않는 나라를 위한 모험입니다. 38선을 넘어서기 위한 모험, 실제 영토 회복을 위한 모험이며, 이를 얻은 후에는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고 살아가기 위한 모험입니다. 또한 미래의 천국을 얻기 위한 모험입니다. 베드로처럼 모든 것을 버릴지라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갑시다.
우리 앞에 있는 희망은 동학자들이나 공산당이 바라는 것과 다릅니다. 시골에서 서울이 좋다는 소문을 듣고 길을 떠났습니다. 거의 다 왔을 때 다리가 아파 광주 너덜고개에 이르러 "여기서 서울까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었더니, 속이는 사람이 "지금까지 걸어온 만큼 더 가야 한다"고 합니다. 다리가 아파 돌아가고 싶었지만, 우리는 모험과 믿음의 길을 떠났으니 중간에 미혹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돌아서지 말고 꾸준히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