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림 근처 매콤한 황태무침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학사루에 들렀다
누각 하나 달랑 군청 앞에 있지만 역사적으로 거대한 사건이 이 학사루란 장소에서 시작된다
학사루는 통일신라시대 함양태수로 왔던 최치원이 자주 올랐던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유자광은 조선시대 최고의 간신으로 평가받는데다 무관에 서자 출신이기에 김종직은 그를 경멸하고 있었다.
이런 유자광도 함양에 왔을때 학사루의 절경에 감탄하여 시를 짓고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학사루에 걸었다. 그러나 유자광의 현판은 곧 사라진다. 김종직이 소인배의 글이라 하여 떼어내 불사르게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입소문을 타고 유자광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김종직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할때 제자들이 송별시회를 마련했는데 이때 초청하지도 않은 유자광이 인사를 왔다. 유자광이 김종직에게 술잔을 권하자 제일 나이 어린 제자 홍유손이 유자광에게 누가 시를 현판해서 걸어줄지 모르니 한 수 지어보라고 했다. 학사루 사건을 빗대어 유자광을 조롱한 것이다. 유자광이 김종직과 그 문하생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김종직 사후 6년 뒤 유자광에게 복수의 기회가 찾아온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수록했는데 이 글을 가지고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했다라는 공격을 하게 된 단초를 만들었던 것이다. 조의제문은 무오사화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 등이 죽임을 당하고 사림파 선비들이 유배를 당한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한다.
조선시대 사화의 시작을 만든 인연의 장소가 바로 이 학사루이다
남계서원으로 향했다
남계서원은 2019년 7월 6일,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어 다른 서원 8곳과 함께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552년(명종 7)에 창건되었으며, 정여창의 위패를 모셨다.
1566년(명종 21)에 사액을 받았으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 1603년 나촌(羅村)으로 옮겨 복원했다가, 1612년 옛터인 현재의 자리에 복원했다.
숙종 때 강익(姜翼)·정온을 추가 배향했으며, 별사에는 유호인·정홍서(鄭弘緖)를 배향했다가 1868년(고종 5)에 별사를 없앴다.
소수서원에 이어 2번째로 창건된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남아 있었다.
남계서원 중심인 강당. 강당 외부 정면에는 남계서원의 현판이, 대청마루 안쪽 내부에는 명성당이란 이름의 현판이 걸려 있다.
강당 옆에는 경판각이 있다.
경판각은 유교 경전과 문집 등 여러 경판을 수집하고 보관하던 곳이다.
앉아 매화에 대해 읊을만해서 영매헌이라 했다는데 매화는 아니 보이고 연꽃만 흐드러졌다
한창 목백일홍 꽃이 여기저기 피어 그 화사함을 뽐내고 있다
풍영루 현판 준도문. 바로 옆에 있는 청계서원으로 갔다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의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로 희생되었다.
사실 남계서원의 정여창 선생보다 역사적으로 더 이 이름을 기억 하는 이들이 많을 것 같은데 남계서원에 밀려 약간 박대를 당하는 모습이다
글에 뛰어났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였다.
노송 한 그루가 더욱 품격을 높인다
연산군 1년(1495)에는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이라 하였다.
구경재와 동재, 서재, 홍남문, 솟을삼문 등의 건물이 남아 있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거평마을에서 내려오는 천변에 이 지역의 먹거리를 해결한 들판이 펼쳐져 있다
이제 바로 앞쪽 2~3킬로 떨어져있는 정일두 선생의 고택 마을인 개평마을로 이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