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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웨스트민스터신학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반석
한국 교회의 부흥과 기복신앙 문제
한국 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공부하면서 한국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가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현재 한국 교회의 실상을 냉철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바르게 정하고,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건강한 교회로 다시 세워지게 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났던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교회성장이라는 그늘에 묻혀서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 교회가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하고 분열의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왔다는 것이다. 첫 번째 문제는 기독교의 토착화와 관련해서 일종의 혼합주의의 병폐로 나타난 현상이다. 특히 한국 교회의 본질을 왜곡시킨 주범은 기복신앙이다. 이 기복신앙은 기형적으로 표출되어 교회성장주의와 은사주의로 둔갑한다. 은사주의는 한국 교회의 독특한 현상 가운데 하나인 기도원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바르게 성장하려면 이 세 가지 요인, 즉 기복신앙, 교회성장, 은사주의가 극복되어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신학적 폐쇄성과 교권주의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요인은 결국 교회의 분열과 다툼으로 귀착한다. 한국 교회가 건강하게 회복되려면 신학의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해야 하고, 교회의 권위를 바르게 정립해야 한다.
I.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 문제
신앙생활에서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복이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복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창 12:2). 문제는 기복신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와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에서 나온 왜곡된 신앙을 의미할 때다. 그리고 이 왜곡된 신앙이 오히려 정상적인 신앙인 양 그 정체를 숨기고 교회 안에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에 문제가 있다.
사전적 의미에서 볼 때, 기복(祈福)이란 복(福)을 구하는 것이요, 신앙(信仰)이란 어떤 대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은 복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를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풀든지, 아니면 누군가를 믿고 따르면서 복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으로 해석을 하든 결과적으로 목적은 복을 구하는 데 있다. 복을 구하는 신앙이 왜 나쁜 것인가?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물질적이고 이기적 신앙양태
기복신앙의 문제점은 그것이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양태일 뿐이라는 데 있다. 한국 교회에서 우려하는 기복신앙의 양태는 결코 영적인 기복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영적”이라는 말과 “기복신앙”이란 말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발 양보해서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의 실태는 결코 영적인 기복신앙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은 자신의 물질적, 육체적 복을 위해 비는 천박한 신앙일 뿐이다(물질축복→삼박자 구원→이기주의→천박한 자본주의 신앙). 여기서 천박한 신앙이란 자신의 건강, 재물, 출세 등을 위해 날마다 시간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을 말한다. “1일 3善이면 天福이 내리고, 1일 3惡이면 天災가 임한다”는 생각은 전형적인 민중도교에서도 나온 것이고, 한국의 무교적 민간신앙에도 널리 퍼져 있는 신앙양태다. 그런데 선을 행하고 악을 금하는 목적이 복을 얻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될 때, 그것은 저차원적인 종교윤리가 된다. 기독교의 신앙은 결코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저차원적인 윤리와 동일시될 수 없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기복신앙의 설교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영적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기복신앙을 자제하고 좀 더 남을 위해 기도하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 교회가 온통 복 받으라고 외치고, 부자 되라고 축원한다. 심지어 복 받지 못하고 부자 되지 못하면 신앙이 없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의심까지 받아야 할 지경에 놓인 것이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현상인 것 같다. 돈을 많이 벌면,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고 추켜세우지만,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하는 이가 없다.
2. 보상신앙
기복신앙은 일종의 보상신앙이다. 신앙의 본질적 측면에서 볼 때, 복을 구하기 위해,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누군가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성숙한 신앙양태가 아니다. 만일 복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신앙의 대상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신앙을 포기할 것인가? 철새처럼 복을 장담하는 그런 신앙의 대상으로 옮겨 다닐 것인가? 신앙이란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대가가 이 땅에서 호위호식하며 사는 물질적인 것에 있다면 그것은 더더욱 잘못된 신앙이다.
우리는 왜 기도를 하고, 왜 전도를 하고, 왜 봉사를 하는가? 하나님께서 주실 어떤 상급을 위해서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급을 주시고 안 주시고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급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상 주실 것을 믿으라고도 했다(히11:6). 그러니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믿음대로 또 행한 만큼 충분한 상급을 주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 상급을 바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저급하고 어린 아이의 신앙인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봉사한다. 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면 보상을 기대하고 효도하지는 않는다. 그런 어른이 있다면 그는 미숙한 “어른 아이”일 뿐이다.
보상심리에서 나온 신앙양태는 헌금을 드리는 근본 목적도 변질시킨다. 교회 건축헌금을 종용하면서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만큼 확실한 투자는 없으니 힘껏 헌금을 하자고 강변하는 모습을 보면, 그 정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헌금은 가장 확실한 투자라니. 한술 더 떠서 하나님께 헌금하면 30배 60배 100배의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신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기를 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하나님께 헌금하면 곧 바로 수십 배의 이자를 쳐서 돌려준다니, 은행 이자에 비해 얼마나 높은가? 그렇다면 어느 누가 은행에 돈을 맡기겠는가? 하지만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결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달콤한 약속을 하신 분이 아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하신 것은 천국 복음이 좋은 땅에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좋은 땅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를 의미한다(마 13:23).
3. 반(反) 복음정신
기복신앙은 복음의 정신과도 상극(相剋)이다.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물질적 풍요와 정반대 조건을 내세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며(눅 6:20),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이며(마 5:10),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모와 형제자매도 버린 자(눅 14:26)라고 했다. 반대로 합당하지 않은 자는 부자요(마 19:23-24; 눅 10:23-25; 막 10:23-25),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요(눅 9:62), 어린아이와 같지 않은 자요(막 10:15; 마 18:3; 눅 18:17),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요 3:5)라고 했다.
또한 성경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구분하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경계한다(요일 2:16). 오히려 예수께서는 영혼에 유익이 되지 않으면 눈도 빼고 손도 찍어내라 하셨다(마 5:29-30). 자기 자신도 버리고 죽기까지 제자의 삶을 따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마귀에게 세 가지 유혹을 받은 것은 어떤 점에서 기복신앙의 요소들(재물/ 명예/ 권력)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다. 교회의 기복신앙은 세상의 기복현상과 다를 것이 없다. 교회에 나가서 복을 비는 것과 큰 고목 밑에서 복을 비는 것은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을 세상의 잡신들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복을 구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요, 우상숭배다. 어떤 형태로 미화한다 하더라도 교회의 기복신앙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신앙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기복신앙은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암적 요소다.
신앙의 본질과 공존하기 어려운 기복신앙은 결과적으로 성경적인 신앙일 수 없다. 그러니 기복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 해석에서도 영적인 의미를 놓치고 문자적으로 집착하며, 단장취의(斷章取意)하는 문제가 빈번하게 자행된다.
기도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기복신앙의 기도는 하나님도 들어주실 수 없다. 왜냐하면 기복신앙은 제 한 몸 잘 되기를 바라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고 강건하기를 바라는 분이시지만, 일부 특별한 사람들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분은 아니시다. 결코 하나님은 차별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다른 사람은 어려움 가운데 고통당해도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식의 신앙이다. 내 아들 대학 붙게 해달라는 기복적 기도는 다른 학생 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와 다를 바 없다. 모든 부모가 다 자기 아들 붙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누구 기도를 들어주실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기도가 아닌 기복신앙의 기도는 당연히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같은 기도를 반복해서 하는 기도, 이런 기도가 중언부언하는 기도다. 통성기도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기도라는 데 있다. 통성기도가 다 잘못된 기도는 아니지만, 대개 통성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원하는 것만 목청껏 외치다 마는 기도이기 때문에 기복신앙과 잘 어울리는 기도다.
물론 우리가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애절한 심정으로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할 때가 있다. 소리 지르며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도 있다. 어린 아이처럼 떼를 부리며 간구해야 할 때도 있다. 모든 것이 형통하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의 응답을 믿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분이시고, 우리의 억울함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억압과 고통에서 울부짖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대답하시는 분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절박한 기도를 드리는가? 우리의 기도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웃 성도의 아픔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만을 위해, 내 교회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다른 교회는 어떻게 되는 말든, 우리 교회에만 성도들이 많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사람은 어찌 되든지 간에 나만 잘 되고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기도가 대부분 하나님의 기본 법칙, 서로 나누라는 명령을 파기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은 어렵게 되고, 내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 다른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복신앙의 기도를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기복신앙은 은사 위주의 신앙으로 빠지기 쉽다. 신비주의와 은사주의가 신앙의 본질인 양 착각하게 되고, 기적을 추구하는 신앙으로 바뀌게 된다. 자기희생과 섬김의 덕목은 어느 틈에 빠져버리고 만다. 한국의 일부 기도원들이 기적과 초자연적인 은사를 내세우며 성도들을 혹세우민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것도 기복신앙으로 길들여진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인 양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 교회를 쇠퇴시키는 주범이 될 것이다.
3. 결론: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길
1) 기복신앙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올바른 신앙교육이 필요하다. 성경은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다(딤후 3:16). 성경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조명을 통해 성경을 바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복음의 본질과 신앙의 본질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런데 목회자가 기복신앙에 빠져있다면 누가 바른 교육을 시킬 수 있겠는가? 목회자의 기복신앙은 누가 바로 잡아주는가? 평신도라도 나서야 한다. 아니 평신도가 나설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제일 마지막 열매가 절제(갈 5:23)라고 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경은 그밖에도 절제의 미덕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행 24:25; 고전 9:25; 딤전 3:2, 11; 딛 1:8; 2:2; 벧후 1:6). 절제신앙과 기복신앙은 반대말이다.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은 결코 절제할 수 없다.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기복신앙에 빠지지 않는다.
2) 복음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과 행동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신 적이 없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해 사신 분이다. 심지어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분이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재산을 위해서도, 명예를 위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고 하면서, 왜 우리는 건강과 재산과 명예를 위해 그토록 사력을 다해 간구하는가?
예수님이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그의 제자가 가는 길은 제자도(弟子道)다. 제자도는 십자가의 길로 통한다. 그런데 이 길은 기복신앙과 전혀 무관한 길이요,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내어놓고 희생하는 길이다. 과연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제자의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조차 심각하게 질문해 보았는가?
II. 한국 교회의 성장주의 실태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은 외적 성장주의로 연결된다. 교회의 외적 성장주의는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다. 대부분 한국 교회들은 크고 안정적인 교회로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목회의 1순위는 언제나 “교회 키우기,” “교인 늘리기”에 집중되어 있다. 전도를 왜 하는가? 교인 늘리기 위해서인가? 교회 안에만 옹기종기 몰려있는 한국 교인들의 영적, 사회적 무기력함에서 탈피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대형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물질적인 풍요다. 이것은 교인수와 직결되는 문제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로 몰려들어야 교회는 재정적으로 자립하고 그 자립의 토대 위에 큰 교회당을 세울 수 있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가 주일성수를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동시에 교인수가 물질적 풍요로 이어지려면 헌금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십일조라는 제도는 매우 확실한 담보가 아닐 수 없다. 그밖에 각종 헌금들이 교인들의 주머니를 열게 만든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헌금을 드리는 것은 매우 훌륭한 신앙표현이다. 10의 1이 아니라 10의 3이면 어떻고 10의 5면 어떠랴. 하지만 왜 감사는 꼭 헌금(돈)으로 해야 하는가? 한국 교회 초기에는 “날연보”란 것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날”(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한다. 감사의 방법을 좀 더 다양화해야 한다. 물질만능주의에 교회까지 덩달아 춤을 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가 이제는 더 이상 “교회에 헌금(돈)을 드려라”로 들리지 않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이렇게 강조하며 걷어 들인 헌금은 대체로 어디에 사용되는가? 역시 1순위는 제 교회당 짓기에 들어간다. 한국 교회의 “교회건축 신드롬”은 교회 기복신앙의 결정체다. 이것은 교회당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오류에서 나온 것이다. 아직도 교회당을 성전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구약에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았던 신앙이 오늘날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신앙의 모범인가? 구약의 성전은 신약의 교회에 대체되었다. 성전이라는 건축물에 갇힌 하나님은 이제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시다. 교회는 바로 신자 자신들이요, 신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어디나 신자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이면 교회당이요, 예배당인 것이다.
1. 교회성장주의의 원인과 배경
1) 성장에 대한 왜곡된 시각
교회성장에는 내적 성장과 외적 성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내적 성장보다 외적 성장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 성장의 한계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몇 명 모이십니까?” 이 비수 같은 질문은 목회자들의 비전을 변질시키는 부작용을 일으킨다. “잘 되는 교회”라는 간판이 걸린 것도 왠지 서글프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마치 기독교국가나 된 것처럼 기독교에 막대한 후원과 배려가 뒤따랐다. 여기서 기독교의 성공신화가 시작됐다. 이진구의 진술을 들어보자.
한편 대형교회의 창립자들은 '천막교회'에서 시작하여 오늘의 거대한 '맘모스 교회'를 세웠다. 따라서 이들의 회고담 역시 교회 개척 당시의 산동네나 달동네에서 그들이 겪은 험난한 인생역정과 고난의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이들의 '개척 이야기'는 젊은 목회지망생이나 소형교회의 목회자들에게 하나의 '영웅신화'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영웅신화'에서도 교회의 밑거름이 된 신자들의 고난과 피땀 이야기는 '영웅'의 활약을 빛내주는 주변적 이야기로만 등장할 뿐이다.
현재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23개 교회, 세계 10대 교회 가운데 4개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다고 한다. 전 세계 초대형교회의 절반이 한국에 있는 셈이다. 개신교계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보면, 교회성장 전략과 비법에 관한 광고가 가득 차 있으며 급성장하는 교회를 소개하는 기사가 빠지는 적이 없다. 교계 신문을 구독하는 주요 독자가 목회자 지망생과 현역 목회자들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교회성장에 대한 꿈과 기대가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목회자들 중 자신의 교회를 대형교회로 키워보겠다는 꿈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메가 처치(mega church)에의 꿈! 여기에 한국 개신교의 놀라운 성장과 힘, 그리고 동시에 종교권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오늘날 성공한 교회, 즉 대형교회는 대체로 신자들의 기복적 욕구를 잘 파악하여 그들의 '주문'에 맞는 '기복상품'을 제공한 교회이다. '기복 장사'를 하는 교회는 교인의 숫자에 의하여 그 '효능'을 검증받기 때문에 무제한적 성장을 추구한다. 여기서 기복신앙과 자본주의의 성장논리가 손을 잡는다.
2. 교회성장주의의 양상
한국 교회의 성장주의가 보여주는 양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한국 교회를 약화 혹은 고사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1) 교회건축 신드롬
한국 교회는 마치 경쟁이나 하듯이 교회건축에 매달린다. 한국 교회의 건축에 대한 욕망은 결코 멈출 것 같지 않다. 과연 무엇을 위해 그토록 교회건축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 교회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단연 목회자들이다. 사실 성도들은 그토록 열광적으로 교회건축에 매달리지 않는다. 언제나 그 배후에는 목회자들의 욕심이 있다.
교회건축을 위해서라면 상식 이하의 결정과 행동도 서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리한 재정운영, 과도한 예산 편성, 막가파식 건축 집행 등으로 파산에 이르는 경우나 혹은 심각한 갈등을 야기하는 교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다보니 목회자는 개인의 영혼보다 헌금에 관심이 많다. 부흥회나 특별새벽기도회 등을 통해 성취하려는 목표가 대개 건축비 충당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특별 부흥사를 초빙해서 노골적으로 건축헌금을 강요하기도 한다. 건축헌금 징수 전문 부흥사가 파행적으로 교회를 와해시키고, “내가 본 천국”이라는 간증집회가 성도들의 닫힌 지갑을 여는 열쇠 역할을 한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기본적인 사역도 2순위로 밀려난다. 교육과 주제도 건축을 위해 실종된다. 이런 현상은 대형교회보다 중소형교회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2) 마케팅 논리
교회는 복음의 정신보다 경제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목회자는 대중의 취향에 따라 목회철학과 방법을 결정한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교인이 모이는가에 모든 관심을 집중한다. 교인수가 많으면 성공한 목회가 되고, 교인수가 적으면 실패한 목회가 된다.
당연히 목회의 길은 십자가의 길과 무관하게 되고, 성서에서 가르치는 제자도는 외면당한다. 사실 예수의 십자가는 오늘날 경제논리에 역행하는 길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교회는 그 길을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진리가 비진리로 대접 받고, 비진리가 진리를 축출한다.
3) 지성전 현상
지성전은 일종의 “대형교회 체인점”이다. 마케팅 전략이 만들어낸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진구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침식하고, 대형 약국이 동네약국의 기반을 무너뜨리듯이, 대형교회는 중소형 교회의 기반을 침식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성장의 목표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수천명 대의 교회는 만 명이 넘는 초대형교회로 성장하기 위해, 초대형 교회는 지상최대 규모의 교회가 되기 위해 다양한 선교방법을 동원한다. 대형교회의 '싹쓸이'라는 것이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하였다. 일요일만 되면 대형교회 소속 대형 버스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타 교회 소속 교인들까지 싹쓸이하여 데리고 간다고 한다. 이는 대형백화점이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재래시장 소비자들까지 싹쓸이하여 데려가는 것을 연상시킨다.
마땅히 화상설교도 문제가 많다. 지성전에서 화상으로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는 현상은 오늘날 더 이상 낯선 모습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곧바로 사이버 공간에서 드리는 예배의 훈련이 될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는 대형화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작은 교회, 건강한 공동체들이 다양하게 삶의 공간으로 스며들어갈 때 한국 교회는 회생하게 될 것이다.
3. 대책과 결론
언제부터인가 성경을 직접 읽을 줄 아는 젊은이와 의식있는 성도들이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분노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감히 평신도가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을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제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과 설교가 목사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목사라고 해서 언제나 올바른 해석을 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올바른 성경 이해를 위해서 비판의 목소리는 계속 되어야 한다.
만일 한국 교회가 이 분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교회는 생명력 없는 종교, 맥 빠진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어쩌면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한 교회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래도 목사의 설교에서 기복신앙의 어두운 그림자를 볼 수 있고 분노할 수 있는 성도들이 있기에 한국 교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
기복신앙은 정말 나쁜 것인가? 그렇다. 기복신앙은 정말 나쁜 신앙이다. 교회는 결단코 이 기복신앙의 늪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교회의 목회자도 교회의 성도도 모두 기복신앙의 달콤한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기복신앙을 멀리 할 수 있는 한국 교회가 될 때 비로소 교회는 살아남을 것이다.
특히 기복신앙은 교회의 성장주의에 에너지 공급원이다. 마땅히 한국 교회는 기복신앙을 타파하기 위한 가시적 방법으로 대형교회의 분산, 지성전 확산 금지, 작은 교회 운동 등을 전개해야 한다. 교회가 헌금을 강요하는 행태도 사라져야 하고, 헌금의 종류도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
III. 기도원의 실상과 기복신앙
1. 설립목적에 따른 분류
1) 기도: 정기적인 기도 집회 위주. 비교적 건전한 기도원. 개인이 주로 설립.
2) 수양: 부흥집회나 세미나 중심의 모임으로 활용. 교회나 교단에서 설립한 경우.
3) 은사: 문제의 소지가 가장 많은 기도원. 주로 개인이 설립.
2. 기도원문제의 발생원인
1)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든 간에 기도원이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영리를 도모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잘못된 기도원 원장들이 거짓말을 일삼고 삯꾼이 된 이유는 대개 돈에 대한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2) 불건전한 방법으로 기도 및 안수를 하면서 사회적, 윤리적 문제를 야기한다.
3) 신학의 결여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신비주의, 은사주의로 치닫는다. 기도원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열광적인 신앙인이 되기 쉬운 것은 이 때문이다.
4) 이기적인 기복신앙을 강조하면서 비기독교적인 삶을 살게 한다. 예수 사랑과 예수 정신이 결여된 신자를 양산한다.
5) 교회를 중심으로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파행적인 기도원 생활로 가정의 파탄을 초래한다. 지나친 헌금으로 재정파탄을 가져오기도 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고 기도원에서 숙식을 하면서 비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한다.
3. 불건전한 기도원의 비윤리성과 비신학성
1)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수도원 운동은 청빈과 금욕, 겸손과 복종, 노동과 기도를 통해 기독교회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2) 그러나 한국 기도원 운동은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기복신앙화 되었고, 온갖 비정상적인 신앙이 기생하는 온상이 되었다.
3) 교회가 버젓이 있는데 기도원은 왜 필요한가? 기도원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불건전한 기도원들은 “집회 강사를 소개하면서 예언과 병 고치는 종이라는 선전뿐만 아니라 불가능을 가능케 하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권세와 권능을 가졌다고 망설이지 않고 주장한다.” 여기에 현혹된 성도들은 교회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기복적인 신앙을 채우기 위해서 기도원을 전전하게 되고 마침내는 신앙을 잃고 만다.
4) 특히 일부 기도원은 샤머니즘의 양태를 그대로 보는 듯하다. 광란의 엑스타시를 유도하는 것은 예사요, 인위적인 방언과 반복적인 찬송 효과를 통해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로 몰아간다. 무당처럼 병자를 치료하는 등 성경적이지 않은 방법들이 대거 동원되고 있다.
5) 무자격, 무인가신학교에서 배출되는 신학생들도 문제지만, 아예 신학을 접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국적 모를 종교체험을 통해 기도원 사업으로 뛰어드는 것도 문제다.
6) 어떤 기도원은 원장을 신격화, 교주화하는 경우까지 있다. 온갖 비리와 폭력이 난무하는 것도 이런 신격화된 교주의 카리스마 아래에서다.
4. 불건한 기도원이 신앙과 가정에 끼치는 해악들
1) 헌금 문제: 주로 직업적인 부흥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 지나친 헌금 강요다. 기복이나 말세신앙을 위해 과다한 헌금을 하게 하는데, 그 결과 가정이 파탄에 이른 경우도 허다하다. 어떤 성도는 전 재산 혹은 사채까지 끌어들여 헌금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 이런 헌금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건전하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원의 원장과 강사들이 개인적으로 착복한다. 사실 이 헌금 문제는 불건전한 기도원이 생존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2) 치유 문제: 우선 치유활동이 비성경적이고 비의학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성령의 역사로 병고침을 받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불건전한 기도원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빙자하여 속임수를 쓰기도 하고, 때로는 악령의 역사도 일어난다. 어떤 때는 정신질환자를 귀신들렸다며 감금하고 때리고 족쇄를 채우는 일도 있다.
치유행위들 가운데는 자기적 치유법(magnetic healing: 치유자가 손놀림이나 어떤 물건으로 환자의 피부에 접촉하여 신경중추를 만지면서 치유하는 것. 안수, 안찰 등), 영의 치유법(spiritual healing: 성령이 아닌 다른 영들의 힘을 빌려 치료하는 것. 필리핀의 심령술사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 귀신축출법, 정신치유법, 최면술법, 침술법, 뜸요법(일명 불안수) 등이 있다.
3) 기복적인 신비주의 신앙 문제: 신앙상의 문제 가운데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기복신앙이요 신비주의신앙이다. 이 둘이 결탁하여 나타나는 경우는 사실 대책이 어렵다. 이 둘은 기독교의 기본 정신과 가장 먼 신앙행태라고 할 수 있다.
기도원에 기도가 없고 기복만 있다는 잘못된 신앙이 양산된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교회 안에도 상업주의와 성장주의가 팽배하고, 이기적인 신앙이 권장되는 현실이 되었다. 한국 교회의 일차 과제는 이런 무속문화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목사의 변질된 카리스마는 무속적 기질에서 유래했다. 무당들의 고압적인 반말투, 단정적인 부정어 사용, 열광, 굉음, 변성된 목소리 등은 방언과 통성기도, 울부짖는 참회기도가 어울려 굿판을 연상케 한다.
만일 여전히 이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어둡다. 진정한 의미에서 토착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무속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한 채, 기독교가 새 시대(문화)의 주역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기독교의 영향력과 생명력이 점점 약화되는 시점에서 과연 이 단계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하나의 의문점이다. 우선 성령강림과 내림굿/ 예배와 굿의 현상적ㆍ구조적 비교를 통해 본 한국 기독교와 무속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무당의 단골제도와 기독교의 심방제도의 차이점, 무당과 목회자의 소명과정과 의식의 차이점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5. 원인과 대책
왜 교인들은 기도원을 찾게 되는가? 그 원인을 차단하면 기도원의 부정적 현상은 치유될 수 있다.
1) 목회자가 교인들의 영적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미건조한 교회생활, 변화없는 신앙생활. 만족하지 못하는 교인들의 욕구가 있는 한 기도원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어있다.
2) 목회자의 목양철학 내지는 양육방향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혹은 의도적인 “축복신앙” 남발은 교인들을 기복신앙인이 되게 하는 지름길이다.
3) 목회자가 교인들의 형편과 사정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 밖으로 눈을 돌린다. 교회 밖에서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곳은 기도원이다.
4) 체계적인 신앙공부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건전한 신앙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참된 복음의 메시지를 외면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기복에 관심을 쏟기 때문이다.
5) 범교단적 차원에서 대처해야 한다. 자체 정비가 필요하다. 동시에 모든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바른 목회방향, 그리고 올바른 성도 교육이 필요하다.
출처 :영적 분별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