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황원택黃源澤 (2003년 현재 80세)
대담장소 : 충남 서산시 대산읍 운산리 3구. 황원택 선생님 자택.
대담시간 : 2003년 3월 6일 오후 3:30 ~ 4:40
내 고향은 서산시 지공면 대요리이다. 아버님은 농사를 지으셨다. 성품이 온화하셔 사람들이 군자라고 이야 기할 정도였다. 어머니의 성품도 온화하시고 조용하셨다. 형편이 빈곤해서 아버님이 다른 집에 머슴으로 일 을 해주시면서 그 품삯으로 집안 식구들이 먹고 살았다. 일본 사람들이 운산리에 간척지를 개간했을 때 우리 가 왔다. 그리고 그 간척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다. 우리가 짓는 농토는 열두 마지기가 고작이었다.
비록 집안은 어렵고 빈곤하였지만 두 분 어른들이 성품이 온화하셔서 집안 분위기는 항상 좋았다. 7남매 중 내가 장남이이었고 내 밑으로 여동생이 여섯이었다. 외아들인 나는 특별히 부모님의 기대와 관심 속에서 자랐다. 나는 지공면에서 살 때 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2학년 1학기에 이곳으로 옮겨와 대산 공립보 통학교로 전학했다. 나는 보통학교 6학년을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가 대한문 옆에 있는 서울 상업실천부기학 원에 입학해서 단기 속성과 1년을 수료하고 시험을 치르고 광화문 우체국 보험과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 15살쯤 되었다.
우체국에 근무하다 광화문 친화목재주식회사 경리부에 다시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나는 함경북도 양곡출장소에 발령이 나서 2년동안 근무하였다. 근무하고 있는 동안 징병에 걸려서 입영통지를 받고 일본군에 입대했다. 내 나이 만 21세에 징병교육을 만주 통화에서 받게 되었다. 교육을 받은 후 함경북도 나진에 군 배치가 되어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주로 배에서 군수물자를 하역하는 일을 하였다.
8월 15일 해방이 되어, 8월 17일날 만주에서 부대가 해산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1946년 충청남도 지방 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해서 대산면사무소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20년 동안 그곳에서 근무했다. 23 세에 결혼했는데 신부의 나이는 17세였다. 아버님이 보천교를 믿고 계셔서 나는 어려서부터 보천교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증산교에 안흥찬安興燦 선생의 설교를 듣고 증산교본부에 입도를 했다. 후에 안흥찬 선생이 증산도로 가시고 나는 증산교에 남아 있었다. 이정립 선생이 살아계실 때 나는 보정保正으로 활동했고, 서산 증산교 교무사로 일했다. 남주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김형관金炯官 선생님이 대표로 계시다가 돌아가신 후 내가 증산교교단 대표를 몇 차례 했다.
나는 조석으로 청수를 모시고 매일매일 오주를 칠독하고 태을주를 백오독, 절후주를 칠독하고 있다. 특별한 종교적 경험은 없지만, 아직까지 무병으로 건강하게 살고 있다. 나는 <대순전경>에서 증산께서 매양 구릿골 앞 큰 나무 밑에서 소풍하시면서 말씀하신
萬國活計南朝鮮이요 淸風明月金山寺라
만국활계남조선 청풍명월금산사
文明開化三千國이요 道術運通九萬里라
문명개화삼천국 도술운통구만리
만국을 살려낼 활방은 오직 남쪽 조선에 있고 맑은 바람 밝은 달의 금산사로다.
가을의 새 문명은 삼천 나라로 열려 꽃피고 도술 문명의 대운은 우주 저 끝까지
통하리라. <도전5:306>
가 가장 마음에 들어 입도했다. 나는 이 내용을 남은 조선사람, 힘없는 사람들이 후천에는 활계한다는 뜻과 남한이 만국을 주도하는 중심국이 된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입도한지 벌써 60년이 되었다. 세계 중심국가 발돋움하고 의통으로써 병겁에 걸려있는 인류를 구원하고 모든 사람이 잘 사는 선경을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천하 인류가 한가족이 되는 사회, 서로 긴장과 갈등을 하지 않고 협동하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는 2남 5녀를 두었다. 모두 출가를 하였다. 막내아들 내외는 고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고 큰 아들은 농사를 짓고 큰며느리는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따들도 시집가서 다 잘 살고 있고 나름대로 사회에서 다들 제몫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증산교 원불교> 차옥승지음
*황원택은 해방이후 안운산 태사부님에게 도를 전해 받은 사람으로 태사부님 동네 이웃에 살면서 늘 태사부님 집에 와 살다시피 하였읍니다. 와서 한문과 상제님 진리를 배우고 태사부님으로부터 집중적으로 수련을 많이 받은 사람 중 한 사람. 장남에게 강제로 주사를 놓아 죽인 장본인이기도 하고 20년 대휴게기 선포후 20년만에 들렀을때 용화동 대법사 증산교의 교주직인 교령을 몇 차례 역임했다. 태사부님은 처남과 몇 차례, 장남과 두어 차례 3남과 두어 차례 들렀으나 그 때마다 이정립 아들이 시골 깡패들을 끌고와서 소동이 있었다 하며 동행한 처남은 이런 불량배들만 모여있는 곳에 무어하러 오십니까 하고 만류하였다 하며 당시 홍범초와 황원택은 도를 전해준 자신들의 지도자이자 스승에게 자기밑에 재입도하라 폭언한 장본인들이다.
태사부님이 해방이후 2변인 증산교 대법사를 개창하고 청맹과니 이상호씨를 용화동에 얼굴마담인 토방주에 앉혀 놓았는데. 물론 나중에 동생과 공모해 단체를 강탈하고 뿌리부터 왜곡조작한 문서를 간직하고 죽은 뒤 증산교사로 유고집으로 출간되고 출간된 책은 즉시 이정립 사람으로 변질된 홍범초같은 사람들에 의해 범증산교사로 인용되면서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며 스승을 공격해 대었다.
해방이후 태사부님 2변 교체조직 당시에는 교주제가 아닌 목화토금수 방주제로 임술 태사부님은 수방주였다. 태사부님은 감옥에서나온 50세의 이정립씨를 20세의 처녀 장옥과 맺어줘 장가 들여주고 이상호씨 아래 명예직인 사성에 임명하엿으며. 방주 밑에는 동서남북 춘하추동의 8교리 제도가 있어 황원택은 8교리 간부. 당시 홍범초는 초등학교 6학년생이라 존재감 자체가 없었을 때이고 현재 교령(교주)인 선도신정경, 천지개벽경의 편저자 정영규 씨도 당시엔 홍범초 형과 같이 중학생에 불과한 어린애였으며 당시에는 신앙권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전무했으며 태사부님도 너무 어린애라 존재자체를 모를때였다. 범초는 아산의 박재근 신도집으로 중학생인 그 형이 홍범초를 데려가 함께 수련을 받으며 교육받았다 한다.
범초는 나이가 어려 가토릭을 믿다가 철이 들어서야 비로소 황원택 처럼 태사부님 20년 은거이후 이상호 이정립이 장악한 용화동에서 함께 신앙하게 되었다. 홍범초도 교주직에 있던 80년대 중반 통일교의 주간지였던 <종교신문>에 자신은 대전의 안흥찬이라는 사람에게 진리를 전해 받았다 하면서도 존칭을 쓰지 않았던 무례한 사람이었다. 용화동 판 자체가누구를 막론하고 연원을 부정하고 평신도회를 주장하는 오염된 판인지라 2-3년 임기제인 교령(교주)를 선거로 뽑을때마다 폭력이 난무해 각 파별로 폭력배들을 동원해 화장실에 상대파가 들어가면 문도 안열어주고 혼자 있으면 집단 폭행하고 하는 양아치 판이라 치성절이 폭력쓰기위해 폭력배 동원해 싸움판 벌이는 날이 될때가 많았다고 전한다.
그러다 보니 각종 소송이 끊일 날이 없었다 하며 당시 태사부님이 20년만에 찾았을 때에도 어렵게 잡은 교령직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자신을 키워준 스승이 20년만에 찾아갔음에도 교주직을 내려놓을 리 없을 정도는 물론 기본적인 예는 고사하고 폭력까지 행사할 정도로 다들 금수가 된 형국이는데. 그런차원에서 자신을 어린애 기르듯 교육시켜준 옛 스승에게 자기가 교주이니 자신에게 재입도하라 한 사람이 바로 황원택이다. 판을 이정도로 오염시킨 장본인들은 바로 태모 고수부님을 핍박하고 보천교 혁신운동을 벌이며 배사율을 밥 먹듯하고 김형렬성도로부터 가르침을 얻고 배사율을 범하고 안흥찬 태사부님의 증산교 대법사를 강탈하고도 모자라 암살단을 보내 그뿌리를 말살하려 했던 이** 이** 형제에게서 온 전통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전통이 오성산 신도들이 초대된 자리에서 범초 홍성렬의 용화동 태모 고수부님 어진을 짓밟는 패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원래 지금의 용화동 성전은 태사부님의 직계 연비로 화방주에 임명했던 김종렬 간부가 진두지휘해 건축한 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