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길-6회차(동엽령~빼재)+향적봉
글쓴이 : 미스터리
1. 지난 곳/시간. 2005. 2/11~12.
안성매표소(04:32 출발) ->동엽령 (06:00 통과) ->칠연3거리(동엽령 3거리) (06:17 통과) ->송계3거리(백암봉) (6:48着/6:52發)
*향적봉 코스(대간길에 포함 되지 않는 길) 왕복. ->중봉 (7:17/7:20) ->향적봉 (7:33/7:37) ->향적봉 대피소 (7:41/8:10), 아침식사. ->중봉 (8:22통과)
->송계3거리(백암봉) (8:40/8:42) ->귀봉 (9:28 통과) ->횡경재 (9:33/9:36) ->못봉(池峰)鞍部 (싸리등재?) (9:53/9:56) ->못봉 (10:10/10:14) ->달음재(월음령) (10:37/10:39) ->대봉(댓봉) (11:08/11:13) ->갈미봉 (11:37 통과) ->빼재 (12:40 분 着). 총 8시간 8분.-- 대간길 : 6시간 20분. 향적봉길:1시간 48분.
2. 이동거리
자연학습원~동엽령: 4.25km ~칠연3거리:0.9 km ~송계3거리:1.3 km
* 향적봉길 ~중봉 :1.0km ~향적봉 :1.1km ~향적봉대피소:0.1km ~중봉 :1.0km ~송계3거리 :1.0km 계: 4.2km.
~귀봉 :2.75km ~횡경재 :0.34km ~못봉안부(싸리등재?):1.15km ~못봉 :0.51km ~달음재 :1.2km ~대봉 :1.11km ~갈미봉 :1.36km ~빼재 :2.6 km 총: 21.67km -- 대간길: 17.47km -- 향적봉길:4.2km (포항셀파산악회 실측자료를 기준으로 세부구간은 거리표지판에 따름)
3. 6회차.
(안성매표소~동엽령) 4.25km, (4:32/6:00)
2주전 내려온 길을 다시 오른다. 영하 10도가 예보되었는데 의외로 바람도 잔잔하고 춥지가 않다. 칠연폭포로 갈라지는 3거리에서 좌로 다리를 건너 산등성이를 좌로 끼고, 우로는 칠연계곡을 끼고 동엽령을 향해 오른다.
계곡은 꽁꽁 얼어 있는데 간간히 누군가 얼음을 깨 놓았는지 옹달샘처럼 물이 녹아 있는 곳이 보이고 낮게 그 밑으로 물흐르는 소리도 들린다.
우로 시커멓게 선 봉우리가 무룡산에서 벗어내려온 망봉인데 칠연폭포는 칠연계곡의 본줄기에서 벗어나 이 망봉 쪽 지류 계곡 초입에 있다 한다. 어둔 밤이라 일부러 가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이윽고 능선으로 오르는 분기점이 나타나는데, 2주전 이곳으로 내려온 이들은 칠연3거리를 향하여 목책 뒤 능선길로 접어들었는지 능선줄기에서 랜턴빛이 반짝인다. 동엽령에서 칠연3거리까지 0.9km를 다시 걸어야 하나, 계곡길을 끝까지 가 보리라 마음먹고 동엽령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한다.
그런데 순간 후회도 된다. 오르던 길이 갑자기 내리막으로 바뀌어 고도를 떨구니 동엽령으로 오르려면 그만큼 다시 치고 올라야 한다. 에구 괜한 짓 했네. 그냥 내려왔던 길로 오르는 것이 나았을 것을.. 막바지에는 눈쌓인 나무층계길도 한참을 계속해 진이 빠진다.
순간 갑자기 삭풍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리고 큰 나무들이 사라지면서 키작은 관목 언덕이 나타난다. 동엽령이다.
일순간 바람에 몸이 날려 갈 듯하고, 얼굴과 손발이 어는데 불감당이다. 그렇다. 冬葉嶺. 옛양반들이 거창쪽 병곡마을에서 무주 안성으로 넘어오려면 이 고개를 넘었을 터인데 이 때 몰아치는 삭풍에 얼마나 뼛골이 시렸겠으며 몸은 바람에 날릴 듯 했을 것이니 겨울 바람 앞 한 점 나뭇잎 같이 몸떨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嶺마루가 이 새벽 자신의 이름을 통해서 겨울바람 속 한 잎 나뭇잎 같은 대간길에서 우리 존재를 일깨워 주려는 것 같다.
(동엽령~송계3거리) 2.2km, (6:00/6:48)
칠연3거리까지는 2주전 지난 길인데도 낯설고 멀다. 낮에 지난 길을 어둔 길에 가려니 그런가 보다. 서북풍이 왼뺨과 귀를 때리는데 고역스럽다. 눈에 물기도 얼어 깜박이기가 불편하고 눈알 도 추운 것 같다. 엄살인가.
6:17분, 0.9km를 걸어 칠연3거리에 도착한다. 이 길로 온 이들은 벌써 다 떠났는지 저 멀리 한 두개의 불빛만이 보일 뿐이다.
칠연3거리. 표지판은 서 있되 위치 표시도 없으며 목책으로 길은 막혀 있고, 덕유산 국립공원이 발행한 지도에도 등산로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미 휴식년에 들어간 길인 것 같다. 다만 조선일보발행 월간山 지도에만 동영령삼거리(동엽령삼거리의 誤字)로 등산로가 표시 되어 있는데 공원관리공단이 세운이 길 능선 중간 표지판에 칠연삼거리로 표시되어 있다.
지난번 우리 팀이 혼동했듯이 後行들도 동엽령과 혼동할 가능성이 높으니 칠연삼거리로 통일함이 좋을 듯하다.
계속 꾸준히 오르는 언덕길이다. 동쪽 하늘은 여명의 띠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능선길에서 맞는 여명은 언제나 가슴 뿌듯하다. 더구나 대간길 능선, 시야가 탁 트인 곳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윽고 오른쪽으로 도도히 뻣어 나간 대간길 분기점에 도착한다. 앞으로는 향적봉으로 향하는 덕유산 종주길, 방향을 틀어 우로는 대간길. 안내판에는 송계삼거리임을 알리고 있다. 길 앞 한 쪽에 요사이 세워 놓은 조그만 표지석에 白巖峰이라 씌어 있다.
과연 이 곳의 이름이 白巖峰 맞는 것일까? 峰이라고 하기에는 中峰이 벋어내리다 잠시 멈춘 둔덕에 지나지 않고, 어디에도 흰바위(白巖)는 보이지 않는다. 국립공원이 발행한 지도에도 그냥 송계삼거리이며, 30여년전 덕유산 등산지도에도 이 곳이 백암봉으로 표기되어 있지 않다. 옛사람들은 우리가 중봉이라 부르는 그 봉을 백암봉이라 했다던데 혹시 그에 따른 오류는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일들은 전문가에게 맡겨 두고, 내 마음은 잠시 망설인다. 향적봉은 지난 가을 다녀 왔으니 그대로 대간길로 접어들려 했건만, 막상 중봉과 그 앞에 펼쳐진 덕유평전을 보니 이것이 내 마음 나도 모르는 見物生心, 아니 見山生心이구나.
(송계삼거리~중봉) 1.0km, (6:52/7:17)
이 곳 덕유평전은 덕유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밭이다. 오늘은 눈밭이 펼쳐져 있다. 그 눈밭 속에 지난 해 피었던 수리취 잔해들이 아직도 굳굳히 서서 특이한 꽃밭을 이루고 있다.
지난 가을 꽃밭 속에서는 눈 쌓인 이 곳이 보고 싶었는데 벌써 봄꽃밭이 그리워지니 내 마음도 싱숭생숭하는 것 같다.
중봉에 올라 언 손에 장갑을 벗고 사진 몇장 찍는다. 건너편으로 우리가 가야 할 대간길 능선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바람같은 우리 팀의 선두가 벌써 향적봉 찍고 중봉을 통과한다.
(중봉~향적봉) 1.1km, (7:20/7:33)
향적봉 정상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다. 리조트 쪽 설천봉에서 구두나 심지어 샌달 신고 올라 와 이 봉을 욕되게 했던 그 많은 관광객들이 오늘은 없는 것이다. 이 산정의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는 넘을 것이니 콘도라 타고 온 관광객들이야 무슨 정성 으로 예가지 오겠는가.
덕분에 호연지기를 펼쳐 지나 온 길 남덕유도 바라보고 다음차에 가야 할 삼봉산도 바라보고 저 멀리 북으로 벗어나간 능선 끝 赤裳山도 바라 본다.
지금이야 무주 하면 덕유이지만 역사의 책 페이지에는 무주 하면 적상산이었다. 최영 장군의 흔적도 남아 있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적상산 史庫가 있던 산이다. 세상에는 유행이 있듯이 산도 유행을 타서 내 짧은 山行歷에서 볼 때도 ‘山보드차트’에서 뜨는 산과 지는 산이 있었던 것 같다. 예견대, 적어도 향후 10년은 백두대간의 시대가 아니겠는가.
이제 향적봉에서 돌아내려 온다. 예전 이 봉우리에 향나무가 많아 향적봉이라 했다는데 그 많았다던 香나무는 찾기 힘들다. 누운 향나무들이 많아 ,운주사의 臥佛이 일어 서는 날 세상을 밝힐 메시아가 온다 했듯이, 이 향나무가 일어서는 날 메시아- 즉, 彌勒佛이 세상을 밝혀 줄 것이라 했다는데 향나무가 없으니 메시아가 밝혀 줄 세상은 오지 않으려나 보다.
하기야, 이 곳 거창쪽 북상면 갈계에서 태어나 文名을 널리 떨치셨던 갈천 林 薰선생이, 53세 되시던 해인 명종 7년(1552년)에 향적봉에 올라 ‘香積峯記’라는 장문의 기행문을 남기셨는데 이 글에도 이미 향적봉의 향나무가 몇 그루 안 남았다고 기록했다 하니 메시아는 우리 마음에 남길 일인 것 같다.
(향적봉~향적봉대피소) 0.1km, (7:37/7:41)
대피소에 도착하니 우리 팀 반가운 얼굴 다섯 분이 식사를 준비하고 계신다. 아, 시원한 라면 국물맛과 유뷰초밥,김밥, 정상주 한 잔에 30분간 휴식을 한다.
(향적봉대피소~중봉~송계삼거리) 2.0km, (8:10/2:22/8:40)
이제 덕유산의 주능선을 벗어나 대간길로 가야할 갈림길이다.
------------------------------------------------------------- * 덕유산, 이름 같이 크고(德) 넉넉한(裕) 산.
흔히들 지리산을 어머니 같은 산이라 하는데, 덕유는 큰 누이 손길같이 넉넉하고 따듯하다.
이 성계의 고려 장군시절, 향적봉에서 수도를 하면서 천신께 제사를 지냈는데 우글거리는 많은 짐승들이 조금도 해치지 않았다 해서 덕이 많은 산, 즉 德裕山이 되었다기도 하고, 亂이 발생하면 가여운 백성들이 이 산으로 숨어들었는데 넉넉한 산 품에 안겨 능히 목숨을 보존하고 亂을 피했다 해서 덕유산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그 이전에는 광려산 또는 려산이라 불렀다 한다.
또한 이 덕유산은 조선왕조로 보면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고려 우왕 6년에 왜구가 함양 사근산성에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 삼았는데 이 때 이 성계 장군이 덕유산을 끼고 나아가 荒山에서 격퇴시키니 드디어 큰 장수로서 입지를 세워 훗날 조선을 세울 수 있었던 입신의 지역이기도 하다.
한편 그 스승 無學大師 또한 한 때 덕유산에 들어 지혜를 짜낸 곳이니 조선건국을 잉태한 모산이 아니겠는가. ---------------------------------------------------------------
(송계삼거리~귀봉) 2.75km, (8:42/9:28)
덕유주능선에서 대간길로 접어드니 갑자기 눈이 깊어진다. 先行者들이 지나간 길도 간신히 사람 하나 지날 정도의 좁은 눈길이거나 퐁퐁 빠진 깊은 눈 속 발자국뿐이다.
햇볕이 정면으로 비춘 남향받이는 녹은 눈이 얼어 얼음으로 변한 곳도 간간히 나온다. 봉우리를 두 개 째 넘어 세 번 째 봉우리인 귀봉에 도착한다.
첫 번째 봉이었을까? 두 번째 봉이었을까? 분명 지나 왔을 상여덤이 있었건만 아무런 표지가 없어 지나치고 말았다. 18세기 말, 천주교도들을 박해한 신유년 박해 때, 불랑 신부 등 프랑스 신부들과 신도들이 상여덤 동굴에 숨어 지내며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의미 있는 곳이고, 이 곳에서 병곡리로 흐르는 상여덤계곡은 이름난 계곡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귀봉은 오른쪽 거창 병곡리 쪽으로 수려한 능선이 흐르고 있다. 風水하는 이들은 명당이 되는 穴자리가 있는 곳의 뒷산을 귀봉이라 하는데 혹시 이 귀봉도 저 수려한 능선 어딘가에 혈자리를 가지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 아니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누군가 吉地에 묘자리를 모셨을 터인데 궁금하기 그지 없다.
에구, 내가 이럴 일이 아니지.. 갈길을 재촉한다.
(귀봉~횡경재) 0.34km, (9:28/9:33)
귀봉을 내려 오니 횡경재이다. 실로 반갑게 지명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거창 쪽 송계사로 내려 가는 첫 번 재 갈림길이다.
(횡경재~못봉鞍部) 1.15km, (9:36/9:53)
못봉안부에는 지봉안부라고 쓴 표지판이 서 있다. (부 字는 작게 위에 써 있어 지봉안으로 보임)
이 구간(횡경재~못봉안부~못봉) 전체가 싸리나무 같이 생긴 2m 정도 키의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지나는 길목을 막고 가지가 눈을 찌르고 뺨을 때리는데 여간 신경쓰이지 않는다. ‘조팝나무’라는 이가 있던데 나무에 눈 어두운 나로서는 봄에 꽃 피기 전에는 줄기만 가지고는 구별할 재간이 없다.
다만 추측컨대 이 곳 옛어른들은 이 나무를 싸리나무의 일종으로 보시고 이 재를 ‘싸리등재’라고 부르셨던 것 같다.
또한 지봉안부라고 쓴 표지판에는 이 고개를 넘으면 오수자굴로 간다는 표시가 있다.
吳竪字굴, 고려 때 오수자라는 스님이 득도를 했다는 전설이 있는 굴로서 중봉을 오르는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데 과거에는 덕유산 등정에 중요한 등산로였다. 요즈음은 백련사에서 향적봉으로 바로 오르는 편한 등산로가 개설 되었으니 찾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못봉안부~못봉) 0.51km , (9:56/10:10)
낑낑대며 올라 헬리콮타장 같은 시원한 공터에서 전망을 살핀 후, 못봉에 오른다. 못봉, 또는 池峰이라 부르는 이 곳은 연못의 흔적은 없고, 거창군에서 만들어 놓은 미니아춰 같은 조그만 정상석이 있는데 ‘못봉’이라 씌여 있다.
이 곳에서 좌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구천동 쪽에 백련사가 있는데 이 연못에 비친 흰구름과 이 못에서 자란 연꽃의 이름을 따 白蓮寺라 이름지었다 하니 이 못봉과 백련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것 같다.
----------------------------------------------------- * 못봉과 백련사 설화.
백련사 앞산 못봉에는 해마다 섣달 그믐이면 백련사를 향해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시오, 게 아무도 없소?
이 소리에 승려 한 사람이 올라 갔는데 가는 족족 돌아 오지를 못했다. 해가 갈수록 승려들은 섣달 그믐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또 섣달 그믐이 닥쳐왔다.
큰 스님은 더 이상 제자들을 희생시킬 수 없어 이 번에는 당신이 나서셨다. 드디어 못봉에 이르렀는데 보기만해도 기절할 것 같은 험악하고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있지 않은가. ‘네 어인 일로 무고한 승려들의 목숨을 노린단 말이냐?’ ‘스님, 저는 절대로그런 일이 없습니다. 흉물스런 저를 본 승려들이 미처 말도 하기 전에 기절하여 죽으니 어찌 하오리까. 꼭 제 소원을 하나 들어 주시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네 원이 무엇이란 말이냐?’ ‘저는 원래 帝子洞 중화사의 수좌였으나, 죄를 지어 이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저를 위해 천도제를 지내 주시면 환생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큰 스님은 천도제를 지내 주었고, 그 후로는 이런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해 백련사에 큰 화재가 일어나 절이 전소되었는데 백방으로 시주를 하여도 절을 다시 지을 재원이 부족하였다.
하는 수 없이 요새말로 해외모금에 나서게 되었으니 그 때는 대상이 중국인지라 明나라로 가게 되었다.
한편, 이 때 明 황실에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공주가 탄생했으니 그 이름 요석공주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자라면서 웃지도 않고, 말도 않고, 손바닥도 펴지 않으니 황실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할 수 없이 절에 요양을 보내게 되었다.
한 편, 시주를 떠난 큰 스님은 어느날 한 절에 이르게 되었는데 왠 귀한 여자아이가 ‘스님, 스님’ 외치며 뛰어 오지 않는가. 편 손바닥에는 ‘海東朝鮮國 德裕山 帝子洞 禪僧 後身’(해동조선국 덕유산 제자동 선승의 후신)이란 글자가 완연하였다. 그 구렁이가 환생한 것이다.
큰 스님은 明 황실의 시주를 받아 백련사를 중창할 수 있었다.
-------------------------------------------------------------------
(못봉~달음재) 1.2km, (10;14/10:37)
못봉에서 내려 오면 달음재(月陰嶺)가 나온다. 이 곳 계곡에서 내려간 물은 백련사 계곡 물과 만나 구천동 33景 중 하나인 21景 구월담을 이룬다.
(달음재~대봉) 1.11km, (10:39/11:08)
오르는 길은 온통 싸리나무 등성이이다. 1200m가 넘는 이 곳 바람 많은 등성이길에 직경 2cm가 넘는 싸리군락지라니.. 이렇게 키운 세월의 깊이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드디어 대봉. 시야가 확 트이면서 앞으로는 중봉, 향적봉, 거기서 동으로 벗어나간 칠봉이 시원스레 보인다. 아랫마을도 보이는데 우로는 송계사쪽 거창 북상면의 소정리가 손에 잡힐 듯 내려다 보이고 좌로는 잔 나뭇가지 사이로 구천동이 내려다 보인다.
또한 대봉에서 북으로 능선 하나가 늠늠하게 뻣어나가는데 그 곳에 투구봉(일명 지봉,지산봉,흥덕산?)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곳에서 향적봉의 원경을 빽으로 기념사진 한 장 찍는다. 오늘에 유일한 인물사진이다. 잘 나오면 친구들 겨울산 가자고 바람잡을 때 써야 되겠다.
-------------------------------------------------------------
*투구봉과 관련된 설화.
우리 나라 곳곳에는 아기장수설화가 전해지는데 이 구천동에도 동일류의 설화가 있다.
옛날 구천동에 용에 비늘을 단 아기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이 아기는 조(粟)를 병정 삼아 陣法을 짜고 산에 올라 천문과 지리를 연구하였다.
어머니가 어느날 한 스님에게 묻는다. 스님 曰 : 이 아기를 없애지 않으면 마을 모두 화를 입을 것이다. 이에 마을 사람 모두 아기장수를 죽이려 하나 뜻을 이룰 수 없다.
이에 어머니가 눈물을 머금고 나서자, 아기장수는 ‘내가 때를 잘 못 태어났다’ 탄식하고는 스스로 비늘을 떼고 뒷산으로 사라진다.
그러자, 龍沼에서 龍馬가 울부짖으며 고개를 넘어 내뺐으니 이 고개를 후인들이 ‘빼재’라 부른다.
또, 이 장수의 투구가 남아 있었던 산봉우리가 있으니 이 곳이 ‘투구봉’이다.
-----------------------------------------------------------
(대봉~갈미봉) 1.36km, ( 11:13/11:37)
(갈미봉~빼재) 2.6km, (11:37/12:40)
하산길이 아쉬워 유람하듯 걷는다. 좌로 보이는 투구봉과 거창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물안실(상수내,하수내) 마을을 카메라에 잡으려고 계속 살피면서 하산한다.
이 곳은 나무의 잔가지가 덮고 있어 도저히 사진 찍을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로 아래 빼재에서 거창 개명리로 내려 가는 뱀처럼 굽은 길도 사진에 남기고 싶다.
아뿔싸. 나무뿌리에 발이 걸린다. 그대로 얼굴을 눈속에 쳐박고 만다. 차고 얼얼하다. 눈길이 아니었다면 가뜩이나 그런 얼굴 갈아버리고 말았을 일이다. 오 눈이여. 감사. (하산 후 거울을 보니 불그스레 반점이 보이는 정도니 정말 다행이다. 귀봉 하산길에 옆으로 뻗은 나무줄기에 헤딩한 이마도 붉게 튀어나와 있다)
- 오나가나 머리 조심. 하산후에도 발밑 조심-
우여곡절 끝에 빼재 절개지에 도착한다. 가파른 길을 돌아 신풍령휴게소에 도착, (12:40) 청국장 김치찌개를 안주로 막걸리와 참이슬로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한다.
청국장 김치찌개 맛 있었습니다.
-----------------------------------------------------------------
*빼재.
이 곳 지명 ‘빼재’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 유래를 가지고 있다.
1. 이 고개는 예부터 험하여 사람이 드물었던 관계로 사냥꾼이나 도적들이 많았던 곳이라 한다. 이들 이 잡아 먹은 짐승의 뼈가 산처럼 쌓여 있어 뼈재라 불렀는데 그 음이 경상도식으로 변하여 빼재가 되었다는 설. (뼛골 빠진다는 말을 어른들은 흔히 빼꼴빠진다라고 하는 식으로.)
2. 지금도 이 고개 아래 거창쪽 지명 중에는 ‘殺寇地’(살구지: 일본놈, 즉 왜구를 죽인 곳)란 지명이 있다는데 왜란 때 왜병을 무찔러 그 뼈가 산처럼 쌓였다는데서 빼재가 되었다는 설.
3. 아기장수 설화에서 龍馬가 내뺀 고개에서 유래했다는 설.
각자 취향에 맞게 고르면 될 것인데, 절개지 옆에 서 있는 ‘秀嶺’(빼어난 고개)라는 비석은 骨을 秀로 해석하고 싶은 세운이의 마음은 이해하겠으나 아무래도 요즘 개그식으로 말하면 ‘쌩뚱맞기’ 그지 없다.
새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대해서 요즈음에 포장도로가 뚫리면서 새로 붙인 新風嶺 또한 남의 이름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이 지나침일까.
----------------------------------------------------------
건강한 두 주 보내싶시오. // |
첫댓글 나는 쫓아가기도 바빠 열심히 걸은 생각만 나는데.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다가 어찌 글로 옮긴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