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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회고(9)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공동체의 회복과 정체성을 찾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결국, 신앙 공동체의 유대와 회복이 필요함을 일깨워줍니다.
9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9)
본문은 에스라 회고록(Ezra's Memoir)의 종결 부분으로 에스라가 드린 기도입니다(에스라의 기도는 6절부터 계속). 에스라의 기도는 네 가지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공동체와의 연합(solidarity)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자신의 죄를 동일시합니다(참조, 출 34장의 모세). 둘째, 죄에 대한 고백(confession)입니다. 에스라는 기도를 통해 과거 이스라엘의 죄뿐만 아니라 현재 귀환 공동체의 죄를 낱낱이 고백합니다. 셋째, 변화를 추구하는 결단(readiness to change)입니다. 에스라는 귀환 공동체에게 죄에 대한 회개와 더불어 미래를 향한 결단을 촉구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한 믿음(faith in God'smercy)입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의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다시 한 번 주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공동체의 지도자가 따라야 할 하나의 모델입니다.
에스라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봅니다(‘우리 하나님이…버려두지 아니하시고…소생하여…성전을 세우게 하시며…수리하게 하시며…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9b절에서 ‘울타리’로 번역한 ‘가데르’의 의미에 대해 주석가들은 세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벽으로 보는 것입니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에 근거하여 에스라서의 활동 연대를 느헤미야보다 늦은 것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예루살렘의 울타리가 아닌 ‘유다와 예루살렘의 울타리’라고 하고 있어 예루살렘 성벽일 가능성은 낮습니다. 둘째, 구약성경의 용레어 근거해서 성벽의 울타리가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포도원 울타리로 보는 것입니다(참조. 사 5:1-7; 시 80:12).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셋째, 비유적인 의미로 페르시아 당국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문맥상 세 번째 해석이 가장 적절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귀환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은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포로에서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들(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스다)의 지원으로 그들은 기적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되었고, 대적들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인데, 백성들이 그만 이러한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는 항상 여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백성들의 죄(10-14)
우리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며, 하나님은 항상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죄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함께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10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11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12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물려 주어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 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13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14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10-14)
에스라는 현재 귀환 공동체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요약한 후에 곧바로 현 세대의 신실하지 못함을 언급합니다. 에스라는 이러한 대조를 통해 백성들의 배은 망덕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에스라는 먼저 이스라엘이 반복적인 범죄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자격이 없음을 고백합니다(10). 여기서 에스라는 이방 민족들과의 통혼을 울법 규정을 어긴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는 가나안 족속과의 통혼을 금지하는 신명기의 율법규정(7:1-4)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스라는 이어서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방 족속과의 통혼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11).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은 모세를 비롯하여 구약의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11절의 내용은 오경과 선지서 말씀의 광범위한 인용입니다(참조. 신 7:1; 레 20:21; 겔 7:19-20; 왕하 16:3; 21:2 등).
구약성경에 의하면, 이방 민족들이 거주하는 땅은 더러운(부정한) 땅이며, 그들의 행실은 가증한 행실입니다. ‘더러운’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니다’는 주로 제의적 불결과 그로 인한 오염을 가리키는데(레 20:21; 젤 7:19-20). 일반적인 용어 ‘타메’보다 강렬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가증하다’로 번역한 ‘토예바’는 이방 백성의 우상숭배나 타락한 문화(특히 성적인 타락)와 관련하여 자주 사용됩니다(레 18:22-30; 20:23; 신 13:14;22:5). 에스라에 의하면, 가나안의 족속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방 민족과의 통혼 때문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요컨대, 거룩한 백성으로서 귀환민들은 철저하게 부정한 것과 행실을 멀리해야 합니다(참조, 2절).
에스라는 구체적인 죄에 대한 지적에 이어 미래를 위한 귀환민들의 결단을 촉구합니다(12a: ‘그런즉’), 진정한 회개는 행동의 변화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라가 촉구하는 결단은 두 가지입니다. 곧 이방 민족들과의 통혼을 금하는 것과 그들을 위해 평화와 좋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12). ‘그들을 위해 평화의 행복을 구하지 말라’는 표현은 암몬과 모압 사람들을 향한 신명기의 저주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신 23:6). 에스라는 이어서 율법 규정(통혼 금지)을 지킴으로써 주어지게 될 축복을 약속합니다(12b). 12절의 내용도 11절과 같이 구약성경 여기저기에서 광범위하게 인용한 것들입니다(참조. 레 18:24-26;20:22; 신 7:3; 11:8-9; 왕하 16:3; 21:2; 겔 37:25: 말 2:10-16). 에스라의 구약성경 인용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문성을 보여줍니다. 에스라는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받게 될 축복을 강조하면서, 문제 해결에 있어 귀환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려 합니다.
에스라의 기도에 나타난 설교적 어조는 13-14절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납니다. 에스라는 먼저 귀환 공동체가 예루살렘에 정착하게 된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악한 행실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남겨주셨다고 고백합니다(13). 여기서 ‘남겨주셨다’는 표현은 8절의 ‘남은 자’(골라)를 염두에 둔 말입니다. 에스라는 회복된 이스라엘로서 남은 자들에게 이방 민족들로부터 유다 공동체를 거룩하게 구별할 책임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에스라는 그들이 만약 이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하나님의 진노가 모두에게 임하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14). 그러면서 에스라는 ‘남은 자’인 귀환 공동체가 그 땅의 이방 민족들과 통혼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율법에 근거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들은 가증한 민족(암메 하토에봇)으로 그들과 통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명령)을 거역하는 일입니다(참조, 신 7:1-5).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에게 그에 따른 반응(책임)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맡김(15)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정하고 의로운 심판을 하시는 분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한, 저지른 잘못을 인식하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며, 변화의 가능성을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비록 우리의 죄가 크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정의를 기억하며 올바른 삶을 살도록 격려합니다.
15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15)
에스라는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공동체의 문제를 맡깁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먼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에스라의 찬양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에스라의 고백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변론적인 의미입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시 멸망시킨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기대를 나타낸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때로 그의 백성을 향한 구원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누가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지금까지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다시 한번 자비를 내리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15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다시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은 너그러우셔서 우리를 이렇게 살아남게 하셨습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주께 자백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새번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 그리고 회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하며,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함을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며, 우리의 죄가 크더라도 그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신뢰와 회개를 통해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임을 믿고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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