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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七回 介子推守志焚綿上 太叔帶怙寵入宮中
제37회: 개자추가 지조를 지켜 면산에서 타 죽고, 태숙 대가 총애를 믿고 궁중에 들어오다.
話說,晉文公在王城,誅了呂省郤芮,向秦穆公再拜稱謝。因以親迎夫人之禮,請逆懷嬴歸國。穆公曰:「弱女已失身子圉,恐不敢辱君之宗廟,得備嬪嬙之數足矣。」文公曰:「秦晉世好,非此不足以主宗祀。舅其勿辭!且重耳之出,國人莫知,今以大婚為名,不亦美乎?」穆公大喜,乃邀文公復至雍都,盛飾輜軿,以懷嬴等五人歸之。又親送其女,至於河上,以精兵三千護送,謂之「紀綱之僕」。(今人稱管家為紀綱,蓋始於此。)文公同懷嬴等濟河,趙衰諸臣,早備法駕於河口,迎接夫婦升車。
한편, 진문공이 왕성에서 여성과 극예를 죽이고, 진목공에게 재배하며 감사했다. 그리고 친영례(親迎禮)를 행하고 회영을 부인을 맞이하여 당진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목공이 말하기를, “내 딸이 이미 진회공 어(圉)에게 몸을 버려서 감히 군주의 종묘를 더럽힐 수 없으니, 단지 데려가서 비빈이나 궁녀의 수에 채워주기만 하면 됩니다.” 하니, 진문공이 말하기를,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는 대대로 혼인 관계를 맺어 왔는데 어찌 그만한 일로 종묘 제사를 받들지 못하겠습니까? 장인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오. 또 제가 이곳에 나올 적에 본국의 사람들은 여기 온 줄 몰랐으니, 지금 이 기회에 혼례를 크게 올린다면 이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진목공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문공을 데리고 다시 옹성으로 돌아가서 화려하게 장식한 치병(輜輧 ; 사면에 포장을 두른 부인용 수레)을 준비하여 회영(懷嬴)과 다섯 명의 잉첩(媵妾)들을 태워 문공과 함께 진(晉)나라로 들어가게 했다. 진목공이 그 딸을 친히 보내며 황하 가에 이르러 3천 명의 정예병을 딸려 보내어 호송하게 하며 ‘기강을 잡는 종’이라고 했다. (지금 사람들이 집안을 관리하는 것을 기강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진문공이 회영을 데리고 하수를 건너자, 조쇠와 여러 신하가 황하 나루에 이미 어가를 준비해 두었다가 부부를 영접하여 수레에 타게 했다.
百官扈從,旌旗蔽日,鼓樂喧天,好不鬧熱!昔時宮中夜遁,如入土之龜,縮頭縮尾;今番河上榮歸,如出岡之鳳,雙宿雙飛。正所謂「彼一時,此一時」也。文公至絳,國人無不額手稱慶。百官朝賀,自不必說。遂立懷嬴為夫人。當初晉獻公嫁女伯姬之時,使郭偃卜卦,其繇云:「世作甥舅,三定我君。」伯姬為秦穆公夫人,穆公女懷嬴,又為晉文公夫人,豈不是「世作甥舅?」穆公先送夷吾歸國,又送重耳歸國,今日文公避難而出,又虧穆公誘誅呂郤,重整山河,豈不是「三定我君」?
문무백관들이 뒤를 따르고, 깃발이 해를 가렸으며, 북소리가 하늘을 진동시키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얼마 전 진문공이 궁궐에서 밤중에 도망갈 때는 마치 땅속으로 들어가는 거북같이 머리와 꼬리를 움츠렸으나, 지금 황하 가에서 영화롭게 돌아갈 때는 마치 언덕에 나온 봉황이 짝을 지어 머물다가 비상하는 것 같아서, 그야말로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라고 하겠다. 진문공의 강도(絳都)에 이르니, 나라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경의를 표하고 축하했다. 문무백관이 조당에서 하례를 올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마침내 진문공은 회영을 부인으로 세웠다. 처음에 진헌공이 그의 딸 백희를 진목공에게 시집보낼 때에 곽언에게 점을 치게 하자 그 점괘에 이르기를, “대를 이어서 장인과 사위가 되어, 우리의 군주를 세 번 세울 것이다.”라고 했다. 백희는 진목공의 부인이고 진목공의 딸이 회영이며 또 진문공의 부인이 되었으니, 어찌 대대로 장인과 사위가 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진목공은 먼저 이오를 보내 진(晉)나라 군주로 귀국시켰고, 다시 중이를 보내 진(晉)나라 군주로 귀국시켰다. 그리고 오늘 진문공이 변란을 피해 나왔다가 또 진목공 덕으로 여성과 극예를 유인하여 죽여서, 진(晉)나라 산하를 다시 안정시켰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의 군주를 세 번 세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又穆公曾夢寶夫人,引之遊於天闕,謁見上帝,遙聞殿上呼穆公之名曰:「任好聽旨,汝平晉亂!」如是者再。穆公先平里克之亂,復平呂郤之亂,一筮一夢,無不應驗。詩云:「萬物榮枯皆有定,浮生碌碌空奔忙;笑彼愚人不安命,強覓冬雷和夏霜。」文公追恨呂郤二人,欲盡誅其黨。趙衰諫曰:「惠懷以嚴刻失人心,君宜更之以寬。」文公從其言,乃頒行大赦。呂郤之黨甚眾,雖見赦文,猶不自安,訛言日起,文公心以為憂。忽一日侵晨,小吏頭須叩宮門求見。文公方解髮而沐,聞之怒曰:「此人竊吾庫藏,致寡人行資缺乏,乞食曹衛。今日尚何見為?」閽人如命辭之。
또한 진목공은 일찍이 꿈속에서 보부인(寶夫人)에게 이끌려 천상 궁전을 구경하고 상제를 뵈니 (상제가) 멀리 전상에서 진목공의 이름을 불러서 말하기를, “임호(진목공의 이름)야! 내 말을 들어라. 너는 진(晉)나라의 난리를 평정하여라.”하고, 두 번 반복했다. 진목공은 이극의 난을 평정했고, 다시 여성과 극예의 난을 평정했으며, 한 점괘와 한 꿈으로 징험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누군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 “만물의 영고성쇠가 다 정해져 있는데, 덧없는 인생에 쓸데없는 일로 분주하구나. 가소롭다. 어리석은 자들은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겨울날의 번개와 여름날의 서리를 억지로 찾으려 하네.” 했다. 진문공이 여성과 극예 두 사람에 대해 분한 생각이 나서, 그 무리를 모두 죽이려고 했다. 조쇠가 간하기를, “진혜공과 진회공이 백성들을 매우 엄격하게 대하여 인심을 잃었습니다. 주군께서는 마땅히 관대함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진문공이 그 말에 따라 즉시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나 여성과 극예의 무리가 너무 많아, 비록 사면한다는 글을 보았으나 오히려 불안하여 매일 유언비어가 생겨났다. 진문공이 근심하고 있는데,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하급 관리 두수(頭須)가 궁궐 문을 두드리고 뵙기를 청했다. 진문공이 마침 머리를 풀고 머리를 감던 중에 그 말을 듣고 화를 내어 말하기를, “이놈은 적(翟)나라에 있을 때 내 재물을 훔쳐 달아났다. 그 때문에 내가 노자가 떨어져서 조(曹)나라와 위(衛)나라에서 걸식을 했다. 그런데 오늘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한단 말이냐?” 했다. 문지기가 명령대로 그 말을 전했다.
頭須曰:「主公得無方沐乎?」閽者驚曰:「汝何以知之?」頭須曰:「夫沐者,俯首曲躬,其心必覆;心覆則出言顛倒,宜我之求見而不得也。且主公能容勃鞮,得免呂郤之難;今獨不能容頭須耶?頭須此來,有安晉國之策。君必拒之,頭須從此逃矣。」閽人遽以其言告於文公,文公曰:「是吾過也!」亟索冠帶裝束,召頭須入見。頭須叩頭請罪訖,然後言曰:「主公知呂郤之黨幾何?」文公蹙眉而言曰:「眾甚。」頭須奏曰:「此輩自知罪重,雖奉赦猶在懷疑,主公當思所以安之。」
두수가 말하기를, “주군은 혹시 지금 머리를 감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니, 문지기가 놀라서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그것을 아시오?” 했다. 두수가 말하기를, “무릇 머리를 감으려면 머리를 숙이고 몸을 구부려야 하기 때문에 그 마음도 반드시 뒤집힙니다. 마음이 뒤집히면 하시는 말씀도 뒤집혀서, 내가 뵙기를 청해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주군께서 발제도 능히 용납하시어 여성과 극예의 난을 피하실 수가 있었는데, 오늘 유독 두수만을 용납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두수가 이렇게 온 것은 진(晉)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는 계책이 있어서인데, 주군께서 꼭 거절하시면 두수는 이로부터 도망쳐 버릴 것입니다.” 했다. 문지기가 급히 그 말을 진문공에게 고하니, 진문공이 말하기를, “그것은 나의 잘못이다!” 하고, 서둘러 관대를 찾아 의관을 정제하고 두수를 불러들였다. 두수가 머리를 조아리고 죄를 청한 후에 말하기를, “주군께서는 여성과 극예의 무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하니, 진문공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아주 많다.” 했다. 두수가 아뢰기를, “그 무리는 죄가 중함을 스스로 잘 알고 있어서, 비록 사면령은 받았다고 해도 오히려 의심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마땅히 그들을 안심시킬 바를 생각하십시오.” 했다.
文公曰:「安之何策?」頭須奏曰:「臣竊主公之財,使主公饑餓。臣之獲罪,國人盡知。若主公出遊而用臣為御,使舉國之人,聞且見之,皆知主公之不念舊惡,而群疑盡釋矣。」文公曰:「善。」乃託言巡城,用頭須為御。呂郤之黨見之,皆私語曰:「頭須竊君之藏,今且仍舊錄用,況他人乎?」自是訛言頓息。文公仍用頭須掌庫藏之事。因有恁般容人之量,所以能安定晉國。文公先為公子時,已娶過二妻。初娶徐嬴早卒。再娶福姞,生一子一女,子名驩,女曰伯姬。福姞亦薨於蒲城。
진문공이 말하기를, “그들을 안심시키려면 무슨 방법이 있느냐?”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신은 주공의 재물을 훔쳐서 주공을 굶주리게 했습니다. 신이 죄를 지은 것을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만약 주군께서 밖으로 나가실 때 신을 마부로 삼으시면 온 나라 사람들이 듣고 보아서, 주군께서 옛날의 죄악에 괘념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알 것입니다. 그러면 무리의 의심이 모두 풀릴 것입니다.” 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좋은 생각이다!” 하고, 곧 말대로 성을 순시하며 두수를 마부로 삼았다. 여성과 극예의 무리가 그것을 보고 모두 몰래 말하기를, “두수는 주군의 재물을 훔쳤는데, 지금 그를 옛날의 자리에 쓰고 있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했다. 이때부터 유언비어가 없어졌다. 진문공은 두수를 옛날과 같이 창고 관리를 맡겼다. 진문공은 이렇게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을 넓게 써서 진(晉)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진문공이 옛날 공자였을 때 이미 두 아내를 맞이했는데, 처음 맞이한 서영(西嬴)은 일찍 죽었고, 다시 맞이한 복길(福姞)이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환(驩)이고 딸은 백희(伯姬)라 했다. 복길도 또한 포성에 있을 때 죽었다.
文公出亡時,子女俱幼,棄之於蒲,亦是頭須收留,寄養於蒲民遂氏之家,歲給粟帛無缺。一日,乘間言於文公。文公大驚曰:「寡人以為死於兵刃久矣,今猶在乎?何不早言?」頭須奏曰:「臣聞『母以子貴,子以母貴。』君周遊列國,所至送女,生育已繁。公子雖在,未卜君意何如?是以不敢遽白耳。」文公曰:「汝如不言,寡人幾負不慈之名!」即命頭須往蒲,厚賜遂氏,迎其子女以歸,使懷嬴母之。遂立驩為太子,以伯姬賜與趙衰為妻,謂之趙姬。翟君聞晉侯嗣位,遣使稱賀,送季隗歸晉。
진문공이 쫓겨나 망명하였을 때, 아들과 딸은 모두 나이가 어려서 포성에 버려두게 되었다. 이 또한 두수가 남매를 거두어서 포성의 백성 수씨(遂氏)의 집에 맡겨 기르게 하고 해마다 양식과 옷감을 거르지 않고 보내 주었다. 어느 날 두수가 틈을 타서 문공에게 남매의 일을 말하니, 문공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나는 그 애들이 군사들에게 잡혀 오래전에 죽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살아있느냐? 어찌하여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 했다. 두수가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어미는 그 자식으로써 귀하게 되며, 자식은 그 어미로써 귀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주군께서는 여러 나라를 유랑하실 때에 가시는 곳마다 여인들을 맞이하시어 자식들을 많이 두게 되었습니다. 공자가 비록 살아 있지만, 주군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어 감히 빨리 고하지 못했습니다.” 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네가 만약 말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애롭지 못한 아비라는 이름을 듣게 될 뻔했다!” 하고, 즉시 두수에게 명하여 포성에 가서 수씨에게 후하게 사례를 하고 두 남매를 데리고 오도록 했다. 회영으로 하여금 그 어머니가 되게 하고, 마침내 환(驩)을 태자로 삼았으며, 백희는 조쇠에게 시집을 보내어 조희(趙姬)라고 불렀다. 적(翟)나라 군주가 진문공이 군주의 자리를 이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축하하고 계외(季隗)를 진(晉)나라로 보내왔다.
文公問季隗之年,對曰:「別來八載,今三十有二矣。」文公戲曰:「猶幸不及二十五年也。」齊孝公亦遣使送姜氏於晉,晉侯謝其玉成之美。姜氏曰:「妾非不貪夫婦之樂,所以勸駕者,正為今日耳。」文公將齊翟二姬平昔賢德,述於懷嬴。懷嬴稱讚不已,固請讓夫人之位於二姬。於是更定宮中之位,立齊女為夫人,翟女次之,懷嬴又次之。趙姬聞季隗之歸,亦勸其夫趙衰,迎接叔隗母子。衰辭曰:「蒙主公賜婚,不敢復念翟女也!」趙姬曰:「此世俗薄德之語,非妾所願聞也。妾雖貴,然叔隗先配,且有子矣,豈可憐新而棄舊乎?」
진문공이 계외의 나이를 물으니, 계외가 대답하기를, “이별한 후에 8년이 지났으니 이제 서른두 살입니다.” 했다. 문공이 놀리며 말하기를, “다행히 25년은 지나지 않았구려!” 했다. 제효공이 또한 사신을 보내어 강씨를 진(晉)나라로 보내왔다. 진문공이 강씨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한 미덕을 사례하니, 강씨가 말하기를, “첩이 부부생활의 즐거움을 탐하지 않고 주군을 수레에 태워 보냈기 때문에 오늘 이런 날이 있게 되었습니다.” 했다. 진문공이 이전에 있었던 일로 제나라와 적나라 두 여인의 현숙한 덕을 회영에게 말했다. 회영이 칭송해 마지않더니 부인의 지위를 두 여인에게 양보하기를 고집했다. 이에 궁중에서의 지위를 다시 정하여 제나라 여인을 부인으로 세우고, 적나라 여인을 다음으로, 회영을 그 다음으로 했다. 조희가 계외가 적나라에서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그 부군 조쇠에게 적 땅에 남아 있던 숙외(叔隗) 모자를 데려오라고 권했다. 조쇠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주공이 은혜를 베풀어 당신과 혼인을 했는데, 어찌 감히 다시 적나라 여인을 생각하겠소?” 하니, 조희가 말하기를, “그것은 세상의 야박한 말이라 첩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첩이 비록 귀한 집 딸이라 해도 숙외와 먼저 혼인을 해서 또 아들까지 있는데, 어찌 새 사람만 좋아하고 옛사람을 버리겠습니까?” 했다.
趙衰口雖唯唯,意猶未決。趙姬乃入宮奏於文公曰:「妾夫不迎叔隗,欲以不賢之名遺妾,望父侯作主!」文公乃使人至翟,迎叔隗母子以歸。趙姬以內子之位讓翟女,趙衰又不可。趙姬曰:「彼長而妾幼,彼先而妾後,長幼先後之序,不可亂也。且聞子盾,齒已長矣,而又有才,自當立為嫡子。妾居偏房,理所當然。若必不從,妾惟有退居宮中耳!」衰不得已,以姬言奏於文公。文公曰:「吾女能推讓如此,雖周太任莫能過也!」遂宣叔隗母子入朝,立叔隗為內子,立盾為嫡子。叔隗亦固辭,文公喻以趙姬之意,乃拜受謝恩而出。
조쇠가 입으로는 알았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결정하지 못했다. 조희가 이에 궁궐로 들어가서 진문공에게 고하기를, “첩의 지아비가 숙외를 데려오지 않아 제가 현숙하지 않다는 이름을 얻게 될 것 같으니, 부친께서 이 일을 주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했다. 진문공이 즉시 사람을 적(翟)나라로 보내어 숙외 모자를 데려오게 했다. 조희가 부인의 자리를 숙외에게 양보하려고 하자 조쇠가 다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희가 말하기를, “숙외는 나이가 많고 저는 어립니다. 또한 숙외가 먼저 부군과 혼인을 했고, 저는 뒤에 혼인을 했습니다. 나이와 선후의 차례가 있으니 그것을 어지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들으니, 아들 조돈(趙盾)은 나이가 이미 장성하고 재주가 있다 하니 마땅히 적자로 세워야 합니다. 첩은 한쪽 방에 거처하는 것이 이치에 당연합니다. 만약 제 말을 쫓지 않으신다면 첩은 물러가 궁중에서 살겠습니다.” 했다. 조쇠가 부득이 조희의 말을 진문공에게 고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내 딸이 이렇듯 사양할 줄 아니 비록 주나라의 태임(太任 ; 문왕의 어머니)이라도 그보다 낫지 않겠구나!” 하고, 마침내 숙외 모자를 조정에 들어오게 하여, 숙외를 조쇠의 부인으로 하고, 조돈을 적자로 삼게 했다. 숙외 역시 완강하게 사양하였으나 진문공이 조희의 뜻을 알아듣게 설명하자, 그 뜻을 받들어 감사의 말을 올린 후 물러갔다.
盾時年十七歲,生得氣宇軒昂,舉動有則,通詩書,精射御,趙衰甚愛之。後趙姬生三子,曰同,曰括,曰嬰,其才皆不及盾。此是後話。史官敘趙姬之賢德,讚云:「陰性好閉,不嫉則妒,惑夫逞驕,篡嫡敢怒。褒進申絀,服懽臼怖,理顯勢窮,誤人自誤。貴而自賤,高而自卑,同括下盾,隗壓於姬。謙謙令德,君子所師,文公之女,成季之妻。」再說,晉文公欲行復國之賞,乃大會群臣,分為三等:以從亡為首功,送款者次之,迎降者又次之。三等之中,又各別其勞之輕重,而上下其賞。
조돈은 그때 나이가 열일곱 살로, 나면서부터 기상이 씩씩하고, 행동이 예절에 맞으며, 시서에 능통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도 잘했다. 조쇠가 그를 매우 사랑했다. 뒤에 조희가 아들 셋을 낳아서, 이름을 차례로 동(同), 괄(括), 영(嬰)이라고 했다. 그들은 모두 재주가 조돈에게 미치지 못했다. 이것은 나중의 이야기이다. 사관이 조희의 어진 덕을 찬미하여 이르기를, “여자의 성격은 원래 폐쇄적이라, 질시하지 않으면 투기를 하게 되고, 부군의 사랑을 얻게 되면 교만을 떨게 되며, 적실의 자리를 빼앗기면 분노한다. 옛날에 포사는 적자를 신(申)나라로 쫓아내고, 백복(伯服)을 세워 즐거워했으나 의구(宜臼)를 두려워했다. 하늘의 이치가 드러나 형세가 궁해지자, 다른 사람을 그르치게 하고 자신을 망쳤다. (조희는) 귀한 신분이면서 스스로 천하다 하였으며,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스스로 낮은 자리에 앉았고, 그가 낳은 조동과 조괄도 모두 조돈 밑에 두었으며, 숙외(叔隗)를 높여 조희(趙姬)를 누르게 했다. 겸손하고 겸손한 아름다운 덕이여, 군자들의 스승이 될만하다. 조희는 문공의 딸이었고 또한 조쇠의 처였다.”라고 했다. 한편, 진문공은 나라를 다시 찾게 된 데 대하여 논공행상을 하려고 모든 신하를 모이게 하고, 그 공을 3등급으로 나누었다. 망명에 따라다니던 신하들을 으뜸으로 하고, 국내에서 환국하도록 애쓴 사람들은 2등으로 하고, 문공이 귀국하자 항복하여 영접한 사람을 3등으로 했다. 세 등급 중에서 각각 그 공이 많고 적음에 따라 각기 상하로 상을 나누었다.
第一等從亡中,以趙衰狐偃為最;其他狐毛、胥臣、魏犨、狐射姑、先軫、顛頡,以次而敘。第二等送款者,以欒枝郤溱為最,其他士會、舟之僑、孫伯糾、祁滿等,以次而敘。第三等迎降者,郤步揚、韓簡為最;其他梁繇靡,家僕徒、郤乞、先蔑、屠擊等,以次而敘。無采地者賜地,有采地者益封。別以白璧五雙賜狐偃曰:「向者投璧於河,以此為報。」又念狐突冤死,立廟於晉陽之馬鞍山,後人因名其山曰狐突山。又出詔令於國門:「倘有遺下功勞未敘者,許其自言。」
제 1등은 망명을 따랐던 조쇠(趙衰)와 호언(狐偃)을 최상으로 하고, 그 밖에 호모(狐毛), 서신(胥臣), 위주(魏犨), 호석고(狐射古), 선진(先軫), 전힐(顚頡)을 다음에 두었다. 제 2등은 국내에서 환국하도록 애쓴 사람들로 난지(欒枝), 극진(郤溱)을 최상으로 하고, 나머지 사회(士會), 주지교(舟之僑), 손백규(孫伯糾), 기만(祁滿) 등을 다음으로 했다. 제 3등은 귀국하자 항복하여 영접한 사람들로, 극보양(郤步揚), 한간(韓簡) 등을 최상으로 하고, 그 나머지 양요미(梁繇靡), 가복도(家僕徒), 극걸(郤乞), 선멸(先蔑), 도격(都擊) 등을 다음으로 했다. 식읍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봉지를 주고, 이미 식읍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봉지를 넓혀 주었다. 별도로 흰 벽옥 다섯 쌍을 호언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옛날에 벽옥을 황하에 던졌으니 이것으로 보상하오!” 했다. 또 호돌의 원통한 죽음을 생각하여 진양(晉陽)의 마안산(馬鞍山)에 사당을 세우니, 후세 사람들이 그로 인해 그 산을 호돌산(狐突山)이라고 불렀다. 다시 어명을 내려 성문에 써서 붙이기를, “만약 공로를 포상받지 못한 자는 스스로 고하기를 바란다!” 했다.
小臣壺叔進曰:「臣自蒲城相從主公,奔走四方,足踵俱裂。居則侍寢食,出則戒車馬,未嘗頃刻離左右也。今主公行從亡之賞,而不及於臣,意者臣有罪乎?」文公曰:「汝來前,寡人為汝明之。夫導我以仁義,使我肺俯開通者,此受上賞;輔我以謀議,使我不辱諸侯者,此受次賞;冒矢石,犯鋒鏑,以身衛寡人者,此復受次賞。故上賞賞德,其次賞才,又其次賞功。若夫奔走之勞,匹夫之力,又在其次。三賞之後,行且及汝矣。」壺叔愧服而退。文公乃大出金帛,遍賞輿儓僕隸之輩,受賞者無不感悅。
수행원 호숙(壺叔)이 나아가 말하기를, “신은 포성에서부터 주공을 따라 사방으로 유랑하여 발이 부르텄습니다. 머물 때는 침식을 수발하고, 길을 떠나면 거마를 점검하며, 잠시도 주공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 주공께서 망명할 때 따랐던 노고에 보상하는 상을 내리면서 저에게만 내리지 않으신 것은 신에게 죄가 있어서입니까?” 하니, 진문공이 말하기를, “그대는 앞으로 오라. 내가 너에게 밝혀 주겠다. 무릇 나를 인의로써 이끌어 폐부(肺腑)를 열어준 자는 높은 상을 받았다. 나를 지모(智謀)로서 보좌하여 제후들에게 욕을 당하지 않게 한 자는 그 다음 상을 받았다.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창과 화살에서 몸으로 나를 보호한 사람을 다시 그 다음 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높은 상은 덕(德)을 상준 것이며 다음은 재주를 상준 것이고, 그 다음은 공로를 상준 것이다. 그런데 네가 분주히 노력한 것은 필부의 노력이니 그 다음이다. 세 가지 상을 내린 후에 너에게 상을 줄 것이다.” 했다. 호숙이 부끄러워 따르는 빛으로 물러났다. 진문공이 즉시 많은 황금과 비단을 내어 일꾼과 종들에게 두루 상을 주었다. 상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惟魏犨顛頡二人,自恃才勇,見趙衰狐偃都是文臣,以辭令為事,其賞卻在己上,心中不悅,口內稍有怨言。文公念其功勞,全不計較。又有介子推,原是從亡人數,他為人狷介無比,因濟河之時,見狐偃有居功之語,心懷鄙薄,恥居其列,自隨班朝賀一次以後,託病居家,甘守清貧,躬自織屨,以侍奉其老母。晉侯大會群臣,論功行賞,不見子推,偶爾忘懷,竟置不問了。鄰人解張,見子推無賞,心懷不平;又見國門之上,懸有詔令:「倘有遺下功勞未敘,許其自言。」特地叩子推之門,報此消息。
오직 위주와 전힐 두 사람이 자기들의 재주와 용기를 믿고 조쇠와 호언 등문신이 말만으로 일을 처리하여 자기들보다 더 높은 상을 받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불쾌하게 생각하여 입속으로 조금 원망하는 소리를 했다. 진문공은 그 공로를 생각하여 전혀 따지지 않았다. 또 개자추(介子推)는 원래 망명에 따라다닌 사람이지만, 사람됨이 아주 강직하여, 황하를 건널 때에 호언이 공로를 자부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매우 천박하게 여겨 그 반열에 서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귀국한 후에 한 번 조정에서 축하의 인사를 드린 후에 병을 핑계로 집에서 청빈함을 지켜 몸소 짚신을 삼아 노모를 모셨다. 진문공이 신하들을 크게 모아 논공행상을 할 때도 개자추를 보지 못했으나 우연히 잊어버리고 마침내 묻지 않게 되었다. 개자추의 이웃 사람 해장(解張)이 개자추가 아무 상도 못 받는 걸 보고 속으로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성문 위에 붙어 있던 진문공의 조칙에 “만약 공로를 포상받지 못한 자는 스스로 고하기를 바란다!”라고 한 것을 보고, 특별히 개자추의 집 문을 두드려 그 소식을 알렸다.
子推笑而不答。老母在廚下聞之,謂子推曰:「汝效勞十九年,且曾割股救君,勞苦不小。今日何不自言?亦可冀數鍾之粟米,共朝夕之饔飱,豈不勝於織屨乎?」子推對曰:「獻公之子九人,惟主公最賢。惠懷不德,天奪其助,以國屬於主公。諸臣不知天意,爭據其功,吾方恥之!吾寧終身織屨,不敢貪天之功以為己力也!」老母曰:「汝雖不求祿,亦宜入朝一見,庶不沒汝割股之勞。」子推曰:「孩兒既無求於君,何以見為?」老母曰:「汝能為廉士,吾豈不能為廉士之母?吾母子當隱於深山,毋溷於市井中也。」
개자추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개자추의 노모가 부엌에서 듣고 개자추에게 말하기를, “너는 19년간이나 힘들여 주군을 모시면서 네 허벅지 살까지 잘라 내어 국을 끓여 바쳤으니, 그 노고가 적지 않거늘 지금 어찌하여 스스로 그것을 말하지 않느냐? 그래서 몇 가마의 곡식이라도 구하여 아침저녁 식사라도 배불리 먹으면, 짚신을 삼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 했다. 개자추가 대답하기를, “진헌공의 아들이 아홉 명인데, 오직 주군이 가장 어질었습니다. 진혜공과 진회공이 부덕하여 하늘이 그들을 돕지 않고 나라를 주군에게 주었습니다. 여러 신하가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 공을 다투니 제가 부끄럽게 여깁니다. 저는 평생 동안 짚신을 삼을망정 감히 하늘의 공을 자기의 힘이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했다. 노모가 말하기를, “네가 비록 봉록을 구하지 않더라도 또한 한번 조정에 들어가 주군을 뵙고 네가 허벅지 살을 베어 모신 노고를 잊지 않게 하면 어떻겠느냐?” 하니, 개자추가 말하기를, “제가 이미 주군에게 바라는 바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들어가 뵙겠습니까?” 했다. 노모가 말하기를, “네가 능히 청렴한 선비가 되려 하는데, 내가 어찌 청렴한 선비의 어미가 되지 못하겠느냐? 우리 모자가 마땅히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숨어서, 이 시정의 더러움에 물들지 말기로 하자.” 했다.
子推大喜曰:「孩兒素愛綿上,高山深谷,今當歸此。」乃負其母奔綿上,結廬於深谷之中,草衣木食,將終其身焉。鄰舍無知其去跡者。惟解張知之,乃作書夜懸於朝門。文公設朝,近臣收得此書,獻於文公。文公讀之,其詞曰:「有龍矯矯,悲失其所;數蛇從之,周流天下。龍飢乏食,一蛇割股;龍返於淵,安其壤土。數蛇入穴,皆有寧宇;一蛇無穴,號於中野!」文公覽畢,大驚曰:「此介子推之怨詞也!昔寡人過衛乏食,子推割股以進。今寡人大賞功臣,而獨遺子推,寡人之過何辭?」即使人往召子推,子推已不在矣。
개자추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저는 평소에 면상(綿上)의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좋아합니다.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지요.” 하고, 즉시 그 어머니를 업고 면상으로 가서, 깊은 골짜기 속에 오두막을 짓고, 풀로 만든 옷을 입고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그 몸을 마치려고 했다. 이웃집에서는 그들이 간 자취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해장이 그것을 알고 글을 써서 밤중에 조정문 앞에 걸었다. 문공이 조회를 하는데 가까이 모시는 신하가 그 글을 가져와서 진문공에게 바쳤다. 문공이 그 글을 읽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날래고 사나운 용이 있었는데 집을 잃고 슬퍼하였다. 여러 마리의 뱀들이 용을 따라 천하를 유랑했다. 용이 먹을 게 없어 배고파하자 뱀 한 마리가 허벅지살을 잘라 용을 먹였다. 용이 마침내 깊은 연못에 돌아와 그 땅을 안정시켰다. 몇 마리 뱀은 자기 굴로 들어가 모두 편히 지내게 되었는데, 한 마리 뱀은 굴이 없어 들판에서 울고 있구나!” 했다. 진문공이 읽고 나서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것은 개자추의 원망을 쓴 글이다. 옛날에 내가 위나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떨어지자 개자추가 자기의 허벅지 살을 떼어 내어 국을 끓여 나에게 바쳤다. 지금 내가 공신들에게 큰상을 내렸으나 홀로 개자추를 빠뜨렸으니 내가 저지른 잘못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하고, 즉시 사람을 시켜 개자추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개자추는 이미 집을 떠나고 없었다.
文公拘其鄰舍,詰問子推去處:「有能言者,寡人並官之。」解張進曰:「此書亦非子推之書,乃小人所代也。子推恥於求賞,負其母隱於綿上深谷之中。小人恐其功勞泯沒,是以懸書代為白之。」文公曰:「若非汝懸書,寡人幾忘子推之功矣!」遂拜解張為下大夫,即日駕車,用解張為前導,親往綿山,訪求子推。只見峰巒疊疊,草樹萋萋,流水潺潺,行雲片片,林鳥群噪,山谷應聲,竟不得子推蹤跡。正是:「只在此山中,雲深不知處。」左右拘得農夫數人到來,文公親自問之。
진문공이 개자추의 이웃 사람을 잡아와 개자추가 간 곳을 따져 물으며 말하기를, “개자추가 간 곳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개자추와 함께 벼슬을 주겠다.” 하니, 해장이 나와 말하기를, “조정 문 앞에 걸어둔 글은 개자추의 글이 아니고 제가 그를 대신해서 썼습니다. 개자추가 상을 구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그 모친을 업고 면상의 깊은 골짜기 속으로 숨었습니다. 소인이 개자추의 공이 없어질까 염려하여 대신 글을 써 붙여서 사뢴 것입니다.” 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이 글을 걸어 놓지 않았더라면 과인이 거의 개자추의 공을 잊을 뻔했다.” 하고, 즉시 해장을 하대부의 벼슬에 임명하여, 그날로 수레를 타고 해장을 앞세워 친히 면산으로 가서 개자추를 찾았다. 다만 보니, 산봉우리가 첩첩하고 풀과 나무가 무성하며, 시냇물은 졸졸 흐르고 하늘에 조각구름이 떠다니며, 숲속의 새들이 무리 지어 우니, 산골짜기에서 소리가 울렸다. 진문공은 끝내 개자추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단지 이 산속에 있지마는 구름이 깊어 있는 곳을 알지 못하겠네.’라는 말과 같았다. 좌우에 모시는 신하가 농부 몇 명을 잡아와서 진문공이 친히 물었다.
農夫曰:「數日前,曾有人見一漢子,負一老嫗,息於此山之足,汲水飲之,復負之登山而去。今則不知所之也。」文公命停車於山下,使人遍訪,數日不得。文公面有慍色,謂解張曰:「子推何恨寡人之深耶?吾聞子推甚孝,若舉火焚林,必當負其母而出矣。」魏犨進曰:「從亡之日,眾人皆有功勞,豈獨子推哉?今子推隱身以要君,逗遛車駕,虛費時日。待其避火而出,臣當羞之!」乃使軍士於山前山後,周圍放火,火烈風猛,延燒數里,三日方息。子推終不肯出,子母相抱,死於枯柳之下。軍士尋得其駭骨。文公見之,為之流涕。命葬於綿山之下,立祠祀之。
농부가 말하기를, “며칠 전에 한 사내가 늙은 할머니를 업고 이 산기슭에 쉬면서 물을 떠 마신 후에 다시 할머니를 등에 업고 산을 올라갔습니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했다. 진문공이 어가를 산 밑에 멈추게 하고 사람을 시켜 두루 찾았으나 며칠이 지나도 찾지 못했다. 진문공이 얼굴에 노한 기색을 띠고 해장에게 말하기를, “개자추가 어찌 나를 이렇게 깊이 원망하는가? 내가 듣기에 개자추는 아주 효자라서 만일 숲에 불을 놓는다면 틀림없이 그 모친을 업고 나올 것이다.” 했다. 위주가 나와 말하기를, “망명을 따를 적에 여러 사람이 공로를 세웠는데, 어찌 홀로 개자추 한 사람만이겠습니까? 오늘 개자추가 몸을 숨겨서 주군으로 하여금 어가를 며칠씩이나 머물게 하여 시일을 허비하게 하였습니다. 불을 피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신이 마땅히 그에게 수치를 주겠습니다.” 했다. 이에 위주가 군사들을 시켜 산의 앞뒤 주위에 불을 놓게 하자 불이 바람을 타고 맹렬히 타올라 몇 리를 태우고 사흘 만에 꺼졌다. 개자추는 끝내 산에서 나오지 않고 아들과 어머니가 서로 끌어안고 마른 버드나무 아래에 죽어 있었다. 군사들이 그 해골을 찾았다. 진문공이 보고 눈물을 흘렸다. 진문공이 면산 아래에 장사지내게 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했다.
環山一境之田,皆作祠田,使農夫掌其歲祀。「改綿山曰介山,以志寡人之過!」後世於綿上立縣,謂之介休,言介子推休息於此也。焚林之日,乃三月五日清明之候。國人思慕子推,以其死於火,不忍舉火,為之冷食一月。後漸減至三日。至今太原、上黨、西河、雁門各處、每歲冬至後一百五日,預作乾糒,以冷水食之,謂之「禁火」,亦曰「禁煙」。因以清明前一日為寒食節,遇節,家家插柳於門,以招子推之魂,或設野祭,焚紙錢,皆為子推也。胡曾有詩云:「羈絏從游十九年,天涯奔走備顛連;食君刳股心何赤?辭祿焚軀志甚堅!綿上煙高標氣節,介山祠壯表忠賢。只今禁火悲寒食,勝卻年年掛紙錢。」
면산 주위의 밭을 모두 사전(祠田 ;사당을 유지하는 밭)으로 하고, 농부에게 매년 제사를 관장하게 했다. 진문공이 명하기를, “면산을 바꾸어 개산(介山)이라 불러서, 나의 잘못을 기억하게 하라.” 했다. 후세에 면상에 현을 세웠는데 그 이름을 개휴현(介休縣)이라 했다. 그것은 개자추가 여기에서 휴식한다는 말이었다. 산을 태운 날이 3월 5일 청명절(淸明節)이었다. 나라 사람들이 개자추를 추모하여 그가 불에 타 죽었으므로 차마 불을 지피지 못하고 찬 음식을 한 달 동안 먹었다. 후에 점점 줄여서 3일이 되었다. 지금도 태원(太原), 상당(上黨), 서하(西河), 안문(雁門) 등 각처에서는 매년 동지 이후 105일에는 미리 마른 밥을 준비하여 냉수와 먹는데, 이것을 ‘불을 금한다’라고 하고 또는 ‘태우기를 금한다’라고 했다. 그래서 청명절 하루 전날을 한식절(寒食節)이라고 하고 그때가 되면 집집마다 문에 버들가지를 꽂아 놓고 개자추의 혼을 부르고, 혹 들판 제사를 차려 종이돈을 사르는데 모두가 개자추로 인한 것이다. 호증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말 굴레와 고삐를 붙잡고 19년 동안 유랑하여, 하늘 가에 분주히 고난 속의 군주를 모셨다. 허벅지 살로 임금을 먹였으니 그 마음 참으로 지극하도다! 녹봉도 마다하고 몸을 불태웠으니 그 뜻이 참으로 굳구나. 면상의 하늘 높이 연기가 절개를 드러내고, 개산 사당의 장한 모습은 충성과 어진 마음을 나타내네. 지금도 불을 금해 한식을 슬퍼하는 것은, 해마다 지전을 걸어 복을 비는 것보다 낫구나.” 했다.
文公既定君臣之賞,大修國政,舉善任能,省刑薄歛,通商禮賓,拯寡救乏,國中大治。周襄王使太宰周公孔,及內使叔興,賜文公以侯伯之命。文公待之有加禮。叔興歸見襄王,言:「晉侯必伯諸侯,不可不善也。」襄王自此疏齊而親晉,不在話下。是時鄭文公臣服於楚,不通中國,恃強凌弱,怪滑伯事衛不事鄭,乃興師伐之。滑伯懼而請成。鄭師方退,滑仍舊事衛,不肯服鄭。鄭文公大怒,命公子士洩為將,堵俞彌副之,再起大軍伐滑。衛文公與周方睦,訴鄭於周。周襄王使大夫游孫伯伯服至鄭,為滑求解。
진문공이 논공행상의 일을 마무리하고, 국정을 크게 쇄신하여, 착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등용했다. 형벌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였으며 상업을 진작시키고 외국의 손님을 예의로써 대했다. 홀로 된 사람을 돕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니, 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주양왕이 태재 주공 공(周公孔)과 내사(內使) 숙흥(叔興)을 사절로 보내어 진문공을 제후의 우두머리로 승인한다는 명을 내렸다. 진문공이 주나라의 사자를 예의를 갖추어 접대했다. 숙흥이 주나라로 돌아가서 양왕에게 고하기를, “진(晉)나라 군주는 틀림없이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될 것입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했다. 주양왕이 그 후부터 제나라와는 소원해지고 진(晉)나라와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때 정문공(鄭文公)은 초나라에 신하의 예로써 복종하여 중원의 여러 나라와는 통하지 않고 강한 초나라의 힘을 믿고 약한 나라를 깔보았다. 이때 활(滑)나라 군주가 위(衛)나라를 받들고 정나라를 섬기지 않자 이를 괘씸하게 여겨 즉시 군사를 일으켜 활나라를 쳤다. 활나라 군주가 두려워서 강화를 청하니 정나라 군사가 비로소 물러갔다. 활나라는 다시 위나라를 섬기고 정나라에 복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정문공이 대노하여 공자 사설(士泄)을 대장으로 삼고, 도유미(堵兪彌)를 부장으로 삼아 다시 대군을 일으켜 활나라를 쳤다. 위나라 문공이 주나라와 화목하였는데 정나라를 주나라에 고소했다. 주양왕은 대부 유손백(游孫伯)과 백복(伯服)을 정나라에 사자로 보내어 활국을 위해 화해를 요청했다.
未至,鄭文公聞之,怒曰:「鄭衛一體也,王何厚於衛,而薄於鄭耶?」命拘游孫伯伯服於境上,俟破滑凱旋,方可釋之。孫伯被拘,其左右奔回,訴知周襄王。襄王罵曰:「鄭捷欺朕太甚,朕必報之!」問群臣:「誰能為朕問罪於鄭者?」大夫頹叔桃子二人進曰:「鄭自先王兵敗,益無忌憚。今又挾荊蠻為重,虐執王臣。若興兵問罪,難保必勝。以臣之愚,必借兵於翟,方可伸威。」大夫富辰連聲曰:「不可,不可!古人云:『疏不間親。』鄭雖無道,乃子友之後,於天子兄弟也。武公著東遷之勞,厲公平子頹之亂,其德均不可忘。翟乃戎狄豺狼,非我同類。用異類而蔑同姓,修小怨而置大德,臣見其害,未見其利也。」
주나라의 사신들이 도착하기 전에 정문공이 전해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정나라와 위나라는 다 같이 동성의 나라인데 천자는 어찌하여 위나라는 후대하고 정나라는 박대하는가?” 하고, 유손백과 백복을 국경에서 구속하여 활나라를 쳐서 개선할 때를 기다려서 풀어 주라고 했다. 유손백과 백복이 구속되자 그들의 시종들이 달아나 돌아가서 주양왕에게 고했다. 주양왕이 욕하기를, “정나라 첩(捷)이란 놈이 너무 심하게 짐을 업신여기는구나. 내가 반드시 보복할 것이다!” 하고. 여러 신하에게 묻기를, “누가 능히 짐을 위해 정나라에 가서 죄를 묻겠는가?” 하니, 대부 퇴숙(頹叔)과 도자(桃子) 두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정나라가 선왕 때 우리를 패퇴시킨 이래로 더욱 꺼림 없이 굴고 있습니다. 오늘 다시 형주 오랑캐(초나라)를 중히 여기고 모질게 천자의 신하를 잡았습니다. 만약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더라도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니,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반드시 적(翟)나라로부터 군사를 빌리면 비로소 위세를 펼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대부 부신(富辰)이 그 말을 이어 말하기를,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소원한 사람을 친한 사람 사이에 끌어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나라가 비록 무도하다고는 하나 그들은 정나라 군주 우(友)의 후손들입니다. 우(友)는 천자(宣王)의 동생이며, 정무공은 주나라가 동천할 때 큰 공을 세웠고, 정려공 돌(突)은 왕자 퇴(王子頹)의 난을 평정했습니다. 우리가 그 은덕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적(翟)나라는 융(戎)이나 적(狄) 같은 오랑캐로 늑대와 이리의 무리이며 우리와 동류가 아닙니다. 다른 무리를 불러들여 동족을 멸시하는 것은 작은 원한으로 큰 은혜를 다스리는 일이니, 신이 보건대 해악은 많아도 이득은 없을 것입니다.” 했다.
頹叔桃子曰:「昔武王伐商,九夷俱來助戰,何必同姓?東山之征,實因管蔡。鄭之橫逆,猶管蔡也。翟之事周,未嘗失禮。以順誅逆,不亦可乎?」襄王曰:「二卿之言是也。」乃使頹叔桃子如翟,諭以伐鄭之事。翟君欣然奉命,假以出獵為名,突入鄭地,攻破櫟城,以兵戍之。遣使同二大夫告捷於周。周襄王曰:「翟有功於朕,朕今中宮新喪,欲以翟為婚姻何如?」頹叔桃子曰:「臣聞翟人之歌曰:『前叔隗,後叔隗,如珠比玉生光輝。』言翟有二女,皆名叔隗,並有殊色。前叔隗乃咎如國之女,已嫁晉侯。後叔隗乃翟君所生,今尚未聘,王可求之。」
퇴숙과 도자가 말하기를, “옛날 무왕께서 상나라를 정벌할 때 동쪽의 오랑캐 구이(九夷)들도 모두 와서 싸움을 도왔습니다. 어찌 반드시 동성이겠습니까? 동산의 정벌도 실은 (천자의 명을 거역한) 관숙과 채숙으로 인한 것이고, 정나라의 어그러진 행위는 마치 관숙과 채숙이 일으켰던 변란과 같습니다. 또한 적(翟)나라는 주나라를 받들어 아직 예를 잃어버린 일이 없습니다. 순종하는 나라의 군사를 빌려 거역하는 나라를 토벌하는 게 또한 옳지 않습니까?” 했다. 주양왕이 말하기를, “두 분 경의 말이 옳소.” 하고, 이에 퇴숙과 도자를 적나라로 보내어 정나라를 치라는 주양왕의 명을 전했다. 적나라 군주가 기뻐하며 주양왕의 명을 받들어, 사냥을 나간다는 명분으로 정나라에 돌입하여 역성(櫟城)을 함락시키고 군사로 그 성을 지켰다. 두 사람의 대부와 사신을 주나라에 보내 승리를 고하니, 주양왕이 말하기를, “적나라가 나를 위하여 공을 세웠다. 지금 내가 중궁(왕비)이 죽었으니, 적나라 여자와 혼인을 하고 싶은데 어떠한가?” 했다. 퇴숙과 도자가 말하기를, “신들은 적나라 사람들이 ‘전숙외(前叔隗)와 후숙외(后叔隗)는 구슬과 옥같이 빛나도다!’라고 노래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적나라 군주의 두 딸을 말씀드리자면 모두가 이름을 숙외라 하여 자색이 뛰어납니다. 전숙외는 구여국(咎如國) 군주의 딸인데 이미 진(晉)나라 군주에게 시집갔고, 후숙외는 곧 적나라 군주의 딸인데 아직 혼인하지 않았습니다. 왕께서 구혼하실 수 있습니다.” 했다.
襄王大喜,復命頹叔桃子往翟求婚。翟人送叔隗至周,襄王欲立為繼后。富辰又諫曰:「王以翟為有功,勞之可也。今以天子之尊,下配夷女。翟恃其功,加以姻親,必有窺伺之患矣。」襄王不聽,遂以叔隗主中宮之政。說起那叔隗,雖有韶顏,素無閨德。在本國專好馳馬射箭,翟君每出獵,必自請隨行,日與將士每馳逐原野,全無拘束。今日嫁與周王,居於深宮,如籠中之鳥,檻內之獸,甚不自在。一日,請於襄王曰:「妾幼習射獵,吾父未嘗禁也。今鬱鬱宮中,四肢懈倦,將有痿痺之疾。王何不舉大狩,使妾觀之?」襄王寵愛方新,言無不從。
주양왕이 크게 기뻐하며 다시 퇴숙과 도자에게 적국에 가서 구혼하라고 명 했다. 적나라 사람이 숙외를 주나라에 보내자 주양왕이 숙외를 왕후로 세우려고 했다. 부신이 또 간하기를, “대왕께서 적나라의 공로를 치하하심은 가한 일이오나 지금 존귀하신 천자께서 오랑캐 여인을 배필로 맞이해 들였습니다. 적나라가 그 공을 세운 것을 믿고, 거기에 인척 관계를 더했으니 반드시 우리를 넘보는 우환이 있을 것입니다.” 했다. 주양왕이 듣지 않고 마침내 숙외를 중궁으로 삼았다. 말하자면, 그 숙외는 비록 얼굴은 예뻤지만 본디 부덕이 없었다. 본국에 있을 때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일에만 전념하여, 적나라 군주가 사냥을 나갈 때마다 반드시 자기도 청하여 따라 나갔다. 매일 장수나 사졸들과 함께 들판에서 말을 달리고 동물들을 쫓으며 전혀 구속됨이 없었다. 이제 주양왕에게 시집을 와서 깊은 궁궐에 갇혀 살게 되었으니, 새장 속의 새요, 우리 속의 짐승이라 도무지 자유롭지 못했다. 하루는 숙외가 양왕에게 청하기를, “첩은 어렸을 때부터 활쏘기와 사냥에 익숙하여 저희 부친께서 그것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답답한 궁중에서 사지가 나른하여 장차 마비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큰 사냥대회를 열어첩에게 보여주지 않습니까?” 하니, 주양왕이 바야흐로 새 왕비를 사랑하여 따르지 않는 말이 없었다.
遂命太史擇日,大集車徒,較獵於北邙山。有司張幕於山腰,襄王與隗后坐而觀之。襄王欲悅隗后之意,出令曰:「日中為期,得三十禽者,賞軘車三乘,得二十禽者,賞以䡴車二乘,得十禽者,賞以轈車一乘,不踰十禽者,無賞。」一時王子王孫及大小將士,擊狐伐兔,無不各逞其能,以邀厚賞。打圍良久,太史奏「日已中矣。」襄王傳令撤回,諸將各獻所獲之禽,或一十,或二十,惟有一位貴人,所獻逾三十之外。那貴人生得儀容俊偉,一表人物,乃襄王之庶弟,名曰帶,國人皆稱曰太叔,爵封甘公。
마침내 태사에게 명해 길일을 택하고 수레와 병사들을 크게 모아서 북망산(北邙山)으로 사냥을 겨루러 나갔다. 관리들이 북망산 허리에 장막을 치고 주양왕과 왕후 숙외가 앉아서 사냥을 보았다. 주양왕이 왕후 숙외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명령하기를, “정오까지 짐승 서른 마리를 잡는 자는 전차 석 대를, 스무 마리를 잡는 자에게는 공격용 수레 두 대를, 열 마리를 잡은 자에게는 망보는 수레 한 대를 상으로 내리고, 열 마리를 넘지 못한 자들에게는 상을 내리지 않겠다.” 했다. 일시에 왕자, 왕손 및 대소 장사들이 여우와 토끼를 쫓아 그들의 재주를 뽐내어 중한 상을 받으려 했다. 사냥을 시작한 지 한참 지나자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정오입니다.” 하니, 주양왕이 전령을 보내어 사냥대회를 마친다고 했다. 여러 장수가 사냥에서 잡은 짐승들을 바쳤는데 혹은 열 마리, 혹은 스무 마리인데, 오직 한 귀인이 바친 것이 서른 마리가 넘었다, 그 귀인은 날 때부터 생김새가 준수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당당한 인물인데 곧 주양왕의 서제로 이름은 대(帶)이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태숙(太叔)이라고 불렀고, 작위는 감공(甘公)이었다.
因先年奪嫡不遂,又召戎師以伐周,事敗出奔齊國,後來惠后再三在襄王面前辯解求恕,大夫富辰,亦勸襄王兄弟修好,襄王不得已,召而復之。今日在打圍中,施逞精神,拔了個頭籌。襄王大喜,即賜軘車如數。其餘計獲多少,各有賜賚。隗后坐於王側,見甘公帶才貌不凡,射藝出眾,誇獎不迭。問之襄王,知是金枝玉葉,十分心愛。遂言於襄王曰:「天色尚早,妾意欲自打一圍,以健筋骨,幸吾王降旨!」襄王本意欲取悅隗后,怎好不准其奏,即命將士重整圍場。
그는 옛날에 세자의 자리를 빼앗으려다가 이루지 못했고, 또 융족 군사를 불러들여 주나라를 공격했으나 융족 군사가 패하여, 제나라로 달아났다가 뒤에 혜후(惠后)가 재삼 주양왕 면전에서 변명하고 용서를 구하였고, 대부 부신도 역시 주양왕에게 형제의 우애를 권하여 주양왕이 부득이 그를 불러 돌아오게 되었다. 오늘 사냥에서 재주를 발휘한 끝에 일등상을 받게 되었다. 주양왕이 크게 기뻐하며 즉시 전차 석 대를 하사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잡은 수에 따라 각기 상을 내렸다. 왕후 숙외가 왕의 곁에 앉아서 감공 대(帶)의 재주와 풍채가 뛰어나고 활 솜씨가 출중한 것을 보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왕후 숙외가 주양왕에게 물어서 대(帶)가 금지옥엽 같은 주양왕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십분 사랑하게 되었다. 마침내 주양왕에게 말하기를,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으니 첩도 사냥을 한번 하여 근골을 단련하고자 하오니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주양왕은 본래 왕후 숙외를 즐겁게 해주고자 하는 마음이니 어찌 그 말을 즐겨 허락하지 않겠는가. 즉시 장수와 사졸들에게 명하여 다시 한번 사냥터를 정비하라고 명했다.
隗后解下繡袍,(原來袍內,預穿就窄袖短衫。)罩上異樣黃金鎖子輕細之甲。腰繫五綵純絲繡帶。用玄色輕綃六尺,周圍抹額,籠蔽鳳笄,以防塵土。腰懸箭箙,手執朱弓。妝束得好不齊整!有詩為證:「花般綽約玉般肌,幻出戎裝態更奇;仕女班中誇武藝,將軍隊裏擅嬌姿。」隗后這回裝束,別是一般丰采,喜得襄王微微含笑。左右駕戎輅以待。隗后曰:「車行不如騎迅。妾隨行諸婢,凡翟國來的,俱慣馳馬。請於王前試之。」襄王命多選良馬,鞴勒停當。侍婢陪騎者,約有數人。隗后方欲跨馬,襄王曰:「且慢。」
왕후 숙외가 수놓은 두루마기를 벗자 (원래 두루마기 안에 미리 좁은 소매의 짧은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 위에 이상한 형상의 가볍고 가느다란 황금 사슬로 만든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허리에는 오색 비단실로 엮어 만든 허리띠를 띠고, 검은색 가벼운 생초 비단 여섯 자로 이마를 둘렀으며 머리를 싸서 봉황 비녀를 머리에 꽂아 흙먼지를 막았다. 허리에 전통을 차고 손에는 붉은 활을 들었으니 차림새가 맵시 있지 않으랴! 그 모습을 증거하는 시에 이르기를, “꽃처럼 아름다운 용모에 옥 같은 흰 살결로, 오랑캐 옷으로 차리고 나오니 그 모습 기이하구나! 궁녀들 속에 있으면서 무예를 힘껏 뽐내더니, 장군들 대열 속에서는 교태를 마음껏 부리는구나.” 했다. 왕후 숙외의 이러한 차림새는 일반 중국 여인들의 것과는 달라서, 주양왕은 미소를 머금으며 기뻐했다. 좌우에 있던 시종들이 어가를 대령했다. 왕후 숙외가 말하기를, “수레를 모는 것보다 말을 타는 것이 빠릅니다. 제가 데려온 여종들은 모두 적(翟)나라에서 와서 말을 타는 데 익숙합니다. 청컨대 대왕 앞에서 시험 삼아 달려 보겠습니다.” 하니, 주양왕이 양마 여러 필을 골라 굴레와 안장을 매게 했다. 모시고 탈 시녀들도 몇 명이 되었다. 왕후 숙외가 바야흐로 말에 오르려는데, 주양왕이 말하기를, “잠깐 멈추어라.” 했다.
遂問同姓諸卿中:「誰人善騎?保護王后下場。」甘公帶奏曰:「臣當效勞。」這一差,正暗合了隗后之意。侍婢簇擁隗后,做一隊兒騎馬先行。甘公帶隨後跨著名駒趕上,不離左右。隗后要在太叔面前,施逞精神。太叔亦要在隗后面前,誇張手段。未試弓箭,且試跑馬。隗后將馬連鞭幾下,那馬騰空一般去了。太叔亦躍馬而前。轉過山腰,剛剛兩騎馬,討個並頭。隗后將絲韁勒住,誇獎甘公曰:「久慕王子大才,今始見之!」太叔馬上欠身曰:「臣乃學騎耳,不及王后萬分之一!」隗后曰:「太叔明早可到太后宮中問安,妾有話講。」
그리고 왕족들에게 묻기를, “누가 말을 잘 타는가? 그 사람은 왕후를 보호하여 사냥터로 나가라.” 하니, 감공 대가 아뢰기를, “신이 마땅히 힘을 다하겠습니다.” 했다. 그것이야말로 왕후 숙외가 마음속으로 바라던 바였다. 시녀들이 왕후 숙외를 앞세우고 한 떼의 기마대를 이루면서 먼저 달렸다. 감공 대도 이름난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라 달리며 그 옆을 떠나지 않았다. 왕후 숙외는 태숙(甘公 帶)이 곁에 있었으므로 정신을 가다듬고 말을 달렸다. 태숙도 왕후 숙외가 곁에 있었으므로 온갖 수단을 다 발휘하려 했다. 그들은 활쏘기를 시험하기 전에 먼저 말달리기를 시험하는 듯했다. 외후(왕후 숙외)가 채찍으로 말을 연거푸 몇 번 때리자 말이 공중으로 날아가듯이 달렸다. 태숙도 역시 말을 뛰어오르게 하여 앞으로 달렸다. 두 사람이 산허리를 돌아서자 금방 두 마리의 말이 머리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외후(왕후 숙외)가 말고삐를 잡아당겨 멈추어 서며 감공 대를 크게 칭찬하기를, “오랫동안 왕자님의 큰 재주를 사모하여 왔는데,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하니, 태숙도 말 위에서 몸을 굽히며 말하기를, “신은 이제야 말타기를 배웠습니다. 왕후의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했다. 외후가 말하기를, “태숙은 내일 아침 일찍 태후 궁에 문안 인사를 하러 오십시오. 내가 할 말이 있습니다.” 했다.
言猶未畢,侍女數騎俱到,隗后以目送情,甘公輕輕點頭,各勒馬而回。恰好山坡下,趕出一群麋鹿來,太叔左射麋,右射鹿,俱中之。隗后亦射中一鹿。眾人喝采一番。隗后復跑馬至於山腰,襄王出幕相迎曰:「王后辛苦!」隗后以所射之鹿,拜獻襄王。太叔亦以一麋一鹿呈獻。襄王大悅。眾將及軍士,又馳射一番,方纔撤圍。御庖將野味,烹調以進,襄王頒賜群臣,歡飲而散。次日,甘公帶入朝謝賜,遂至惠后宮中問安。其時隗后已先在矣。隗后預將賄賂,買囑隨行宮侍,遂與太叔眉來眼去,兩下意會,託言起身,遂私合於側室之中。男貪女愛,極其眷戀之情,臨別兩不相舍。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시녀들이 말을 몰아 도착했다. 외후가 눈짓으로 정을 보내자 감공 대(태숙)도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몰아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마침 산언덕 밑에서 한 떼의 노루와 사슴이 뛰어나와 태숙이 왼쪽의 노루를 쏘고 또 오른쪽의 사슴을 쏘아 모두 명중했다. 외후도 역시 사슴 한 마리를 쏘아 맞혔다.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외후가 다시 말을 달려 산허리의 장막으로 돌아오니 주양왕이 장막 밖으로 나오며 마중하면서 말하기를, “왕후께서 수고하시었소!” 했다. 외후가 사냥한 사슴을 가져와 양왕에게 바쳤다. 태숙 역시 노루와 사슴 각 한 마리씩을 바쳤다. 양왕이 크게 기뻐했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다시 한번 말을 달리고 활을 쏜 다음에 사냥터의 포위를 풀었다. 궁중의 요리사가 사냥한 노루와 사슴을 삶아 요리를 바치자 주양왕이 군신들에게 나누어주어 즐겁게 먹고 헤어졌다. 다음날, 감공 대가 입조하여 사냥터에서 받은 상에 대해 감사의 말을 드리고 마침내 모친 혜후의 궁중에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때 외후는 이미 그곳에 먼저 와 있었다. 외후가 미리 뇌물을 써서 수행 궁녀들을 매수하여 두었고, 마침내 태숙에게 눈짓으로 마음을 주고받아 뜻을 맞춘 후, 두 사람은 혜후에게 돌아가겠다고 고하고, 결국 곁방에서 몰래 야합하여 남녀가 서로 탐하고 사랑했다. 맘껏 정을 나눈 후에도 헤어질 때 서로 아쉬워했다.
隗后囑咐大叔:「不時入宮相會。」太叔曰:「恐王見疑。」隗后曰:「妾自能周旋,不必慮也!」惠后宮人,頗知其事,只因太叔是太后的愛子,況且事體重大,不敢多口。惠后心上,亦自覺著,反吩咐宮人:「閒話少說。」隗后的宮侍,已自遍受賞賜,做了一路,為之耳目。太叔連宵達旦,潛住宮中,只瞞得襄王一人。史官有詩嘆曰:「太叔無兄何有嫂?襄王愛弟不防妻。一朝射獵成私約,始悔中宮女是夷!」又有詩譏襄王不該召太叔回來,自惹其禍。詩云:「 明知篡逆性難悛,便不行誅也絕親。引虎入門誰不噬?襄王真是夢中人!」大凡做好事的心,一日小一日;做歹事的膽,一日大一日,甘公帶與隗后私通,走得路熟,做得事慣,漸漸不避耳目,不顧利害,自然敗露出來。
외후가 태숙에게 당부하기를, “아무 때고 궁중에 들어오면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하니, 태숙이 말하기를, “왕이 보고 의심할까 두렵습니다.” 했다. 외후가 말하기를, “첩이 스스로 알아서 하겠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했다. 혜후의 궁인들이 자못 그 일을 알고 있었으나, 다만 태숙이 혜후의 사랑하는 아들일 뿐만 아니라 일의 사안이 중대했기 때문에 감히 그 일을 입에 담지 못했다. 혜후도 마음속으로 역시 짐작하는 바가 있었으나 오히려 궁인들에게 분부하기를, “쓸데없는 이야기를 삼가라.” 했다. 외후의 시녀들도 이미 두루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한 도당이 되어 그녀의 귀와 눈이 되었다. 태숙이 매일 밤부터 아침까지 궁중에 숨어 있으면서 주양왕 한 사람을 속일 뿐이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한탄하기를, “태숙은 형도 죽이려 했거늘 형수인들 염두에 두었겠는가? 주양왕은 동생을 사랑했지만 아내는 막지 못했구나! 어느 날 사냥터에서 은밀히 약속한 후로는, 오랑캐의 여인을 중궁으로 삼은 일을 후회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다시 주양왕이 태숙을 처벌하지 않고 다시 불러와서 스스로 화를 자초한 일에 대해 비난하는 시가 있다. 그 시에 이르기를, “반역한 자를 고치기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데, 죽이지도 않고 또한 형제의 의도 끊지 않고서, 호랑이를 문 안으로 끌어들였으니 어찌 물지 않겠는가? 주양왕은 참으로 얼빠진 사람이었다.”고 했다. 무릇 좋은 일을 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적어지고 나쁜 짓을 하는 간담은 날이 갈수록 커지는 법이다. 감공 대와 외후의 간통은 하면 할수록 익숙해져서 점점 남의 이목도 피하지 않고 이해관계도 고려하지 않아서 자연히 두 사람의 불륜관계는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那隗后少年貪慾,襄王雖則寵愛,五旬之人,到底年力不相當了,不時在別寢休息。太叔用些賄,使些勢,那把守宮門的,無過是內侍之輩,都想道:「太叔是太后的愛子,周王一旦晏駕,就是太叔為王了,落得他些賞賜,管他甚帳?」以此不分早晚,出入自如。卻說,宮婢中有個小東,頗有幾分顏色,善於音律。太叔一夕歡宴之際,使小東吹玉簫,太叔歌而和之。是夕開懷暢飲,醉後不覺狂蕩,便按住小東求歡。小東懼怕隗后,解衣脫身,太叔大怒,拔劍趕逐,欲尋小東殺之。小東竟奔襄王別寢,叩門哭訴,說太叔如此恁般:「如今見在宮中。」襄王大怒,取了牀頭寶劍,趨至中宮,要殺太叔。
외후는 나이가 젊고 정욕이 타올라서, 비록 주양왕이 총애를 한다지만 50대라 도저히 나이와 정력으로 상대가 되지 못했다. 주양왕은 때 없이 다른 침소에 가서 휴식을 취했다. 태숙은 궁궐 문지기나 내시들에게 약간의 뇌물을 주고 또한 얼마간의 권세를 이용하니, 그들은 모두 생각하기를, “태숙은 태후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만약 주양왕이 하루아침에 죽는다면 태숙이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니, 뇌물을 조금 받고 말지 무엇 때문에 그들의 장막 뒤의 일에 관여한단 말인가?” 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태숙이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출입할 수 있었다. 한편 궁중에 소동(小東)이라는 궁녀가 있었는데, 얼굴이 자못 예쁘고 음률에 능했다. 어느 날 저녁 태숙이 술자리를 즐기고 있으면서 소동으로 하여금 옥으로 만든 피리를 불게 하고 자기는 그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태숙이 그날 저녁에 가슴을 풀어헤치고 술을 마음껏 마신 끝에 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날뛰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소동을 범하려고 했다. 소동은 외후를 두려워하여 스스로 옷을 벗겠다고 안심시켰다가 몸을 빼어 도망쳤다. 태숙이 대노하여 칼을 빼 들고 쫓아가 소등을 찾아 죽이려고 했다. 소동이 도망치다가 주양왕의 침실로 뛰어 들어가 문을 두드리고 울면서 호소하여 태숙의 이같은 일들을 말하고, “태숙은 지금도 궁중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주양왕이 대로하여 침상 머리맡에 있던 보검을 들고 중궁으로 달려가서 태숙을 죽이려고 했다.
畢竟性命如何,且看下回分解。
마침내 태숙의 목숨이 어찌 될 것인가.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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