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12월 7일 경북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南珽漢)의 3남매중 막내딸로 태어나 어릴때부터 품성이 단정하고 총명하였으며 7세 때에 국문에 능통하였고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였다.
19세에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 사는 의성 김씨(義成 金氏) 김영주(金永周)에 시집을 가 단란한 생활을 꾸렸으나 일제의 만행이 점차 극성을 부리자 남편 김씨(金氏)는 1896년 여사에게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다시 보자"며 결사보국(決死報國)을 결심하고 영양의병장(英陽義兵將) 김도현(金道鉉) 의병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왜군과 전투중 전사하였다 한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 항일투쟁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여사는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3대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양잠(養蠶)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게를 이어 나갔다. 여사의 나이 46세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구국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동년 3월 9일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通化縣)에 가입, 군사(軍士)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북만주 일대에 농촌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하였으며 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하였다.
재등실(齋藤實) 총독을 주살하려 하였으나 실패
망명생활 6년을 맞은 1925년에 재등실 총독을 주살하기 위해 채찬(蔡燦)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삼엄한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본거지로 되돌아가야 했다.
마침 인근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양기탁(梁起鐸) 등이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고 독립운동단체들을 찾아다니며 통합을 독려,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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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삼은 1911년 남만주 통화현에서 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교포의 안정책과 교육문제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대종교에 입교하여 참교, 지교, 상교등을 지내고, 1913년에는 부민단, 1920년에는 서로군정서, 1923년에는 대한통의부를 조직하여 행정위원이 되었다. 그 후 임시정부에 관계하였고, 1925년 정의부를 조직하여 행정위원이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때 하얼빈에서 일본경찰에 잡혀 본국에 송환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
1927년 봄 상해 임시정부요인인 안창호 선생이 길림 조양문(吉林朝陽門) 밖에서 정의부(正義府) 중앙간부와 각 운동단체 간부·지방유지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석주(羅錫疇) 의사 추도회 겸 민족장래에 대한 강연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자 일제는 중국 헌병사령관을 협박하여 안창호·김동삼 선생 등 3백명을 체포하게 하고 주요 간부급 50인을 신병인도하도록 하였다.
당시 여사는 투옥중인 안창호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석방될 때까지 정성껏 옥바라지를 했으며 중국측은 우리 측의 항의에 따라 일본측의 요구를 무시하고 체포한 인사들을 보석으로 석방하였다.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의 구출작전을 펴다
1931년 9월 일제는 소위 만주사변을 일으켜 요녕성 뿐만 아니라 길림성에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여사를 후원하던 김동삼(金東三) 선생은 길림성을 떠나 하얼빈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정인호(鄭寅浩)의 집에 묵고 있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아무도 김동삼 선생과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여사는 그의 친척으로 위장, 면회를 허가받고 연락책 역할을 거뜬히 해내었다. 김동삼 선생의 지시내용을 동지들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그가 국내에 호송될 때 구출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나 동지들의 행동지연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여성다움을 잃지 않았던 여사는 항일운동 중 병들고 상처받아 고생하는 애국청년들에게 항상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손길로 간호하며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국제연맹조사단에 혈서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단장 리틀경)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 2절(無名指二節)을 잘라 흰천에다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다.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키면서 일인(日人)들에게 속지 말도록 호소하였던 것이다.
일본전권대사 무등신의(武藤信義)를 제거하려다가 일경에 붙잡히다
1933년 초 여사는 동지 이춘기(李春基) 등과 소위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에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주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무등신의를 제거하기로 하고 동년 2월 29일 거지로 변장,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에서 장춘(당시 新京)으로 가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던 중,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일편단심으로 14년간 동분서주하던 여사는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독립은 정신에 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으로 순국
여사는 동년 8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사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경은 보석으로 석방하였는데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다시 하얼빈에 있는 조모 씨(趙某氏) 여관으로 옮겼으나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여사는 유복자인 독자 영달(英達)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 나라가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이 돈을 희사하라고 하였다(이 유언에 따라 유족들은 1946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전에서 김구, 이승만 선생에게 이를 전달하였다고 함).
그리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향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여사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고 하얼빈 남강외인(南崗外人)묘지에 안장하여 입비식(立碑式)을 갖고 생전의 공로를 되새겼다.
여성으로서 평생을 바쳐 독립운동의 정화(精華)가 되어 찬란한 빛이 되신 여사의 영전에 동지들은 깊은 애도를 표하였다.
"만일 네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이 유언을 해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을 바치도록 하라."
유복자 김성삼을 낳아 기르면서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곧바로 중국 둥베이 지방 김동삼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여12곳에 교회를 건립하고 10개의 여성교육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운동을 하면서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옥바라지 등으로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모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편강렬, 양기탁, 손일민 등이 만주 지역 무장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할 때 참가했으며, 무장 투쟁이나 테러 위주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참여했다. 국내에는 두 차례 잠입했다. 1922년 참의부의 채찬과 함께, 1926년에는 박청산, 이청수와 함께 국내로 들어왔고, 두 번째 잠입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1928년 만주 길림에서 김동삼, 안창호 등 47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석방 운동에 힘써 보석으로 풀려나게 했다. 1931년 김동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도 탈출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1932년 만주국 수립으로 영국인 리튼이 이끄는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손가락을 잘라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보낸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2002년 독립기념관에 이 구절을 새긴 남자현지사 어록비가 세워졌다. 고정희의 〈남자현의 무명지〉[1]라는 시가 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기도 하다.
| 난공불락, 왜세의 도마 위에 섬섬옥수 열 손가락 얹어 놓고 하는 말
천지신명 듣거든 사람세상 발원이요 탄압의 말뚝에 국적 따로 있으리까
조선여자 무명지 단칼에 내리치니 피로 받아쓴 대한여자독립원 아직도 떠도는 아낙의 무명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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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정희.〈남자현의 무명지〉,《여성해방출사표》(동광출판사, 1990), |
1933년 만주 괴뢰정부 건국일에 이규동(李奎東) 등과 함께 주만 일본대사이며 관동군 사령관인 무토 노부요시의 암살 하려고 폭탄과 무기를 휴대하고 하얼빈에서 변장한 채 정탐을 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그때 남자현은 60세가 넘은 나이었으며, 보름에 걸친 옥중 단식으로 건강을 잃고 보석으로 풀려나온 후 곧바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국가보훈처 차관을 지낸 김시복이 남자현의 손자이다.
202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