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37
야고보서 2장 22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문에서 기독교적 위로에 대해 말합니다. 사나 죽으나 기독교인이 받는 유일한 위로란 무엇인가?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 이것이 기독교적 위로입니다. 여기에는 죄 용서와 구원, 나아가 구원의 완성을 위한 보존, 그리고 영생 등에 대한 설명으로 우리를 위로합니다. 그런데 이 위로를 얻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문은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 구원에 대하여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죄와 비참함에 대해서는 요리문답 3문에서 11문까지의 내용으로 다룹니다. 두 번째 죄와 비참함에서의 구원에 대해서는 요리문답 12문에서 85문까지 다룹니다. 그리고 나머지 86문에서 129문까지가 세 번째 부분인 구원에 대한 감사에 대한 내용을 다룹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오늘부터 우리는 요리문답의 세 번째 부분인 구원에 대한 감사의 내용에 들어가게 되는데, 지난 시간에 살핀 천국 열쇠와 관련된 내용은 결국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가며,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가? 간단히 말하면 신자는 들어갑니다. 반대로 불신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때 천국 열쇠란 거룩한 복음의 선포와 교회의 권징에 대한 것으로, 이 둘을 통해 천국이 신자들에게는 열리고 불신자들에게는 닫히는 것을 의미합니다(83문).
조금 더 구체적으로 거룩한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어떻게 천국이 열리고 닫히는가?(84문) 신자들이 참된 믿음으로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이면 언제든지 그들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께 진정 사함을 받아 천국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회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정죄가 모든 불신자들과 회개하지 않는 자들 위에 머물러 있다고 선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천국은 열리는 것이 아니라 닫혀 있게 됩니다.
복음 선포만이 아니라 교회의 권징을 통해서도 천국이 열리고 닫히는데(85문),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교리나 생활을 지속할 경우 사적 권징, 그리고 공적 권징을 통해 돌이키지 않으면 천국 문을 닫게 됩니다. 비록 교회 안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런 자들에게 천국 문이 열려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출교까지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 가운데 돌이키는 자들이 있다면 다시금 교회 지체로 받아들여 천국 문을 열게 됩니다.
이런 천국 열쇠권을 그리스도께서 교회, 다시 말해 당회, 노회, 총회와 같은 회에 맡기셨다는 것은 교회가 복음의 선포를 통해, 그리고 권징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로 하여금 복음의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또한 천국 백성으로 견고히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부터 보게 될 감사의 모든 내용은 누가 참되게 행할 수 있는가? 거룩한 복음의 선포와 교회의 권징을 통하여 천국 문이 열려 있는 자입니다. 천국 문이 열려 있지 않고 닫혀 있는 자에게 참된 감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좀 더 넓게 요리문답 구조로 이해하면 자신의 죄와 비참함에 대하여 아는 자, 그리고 그런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을 받은 자, 그만이 참되게 감사할 수 있는 자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6문을 보면 이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전체 구조를 의식하면서 질문을 합니다.
86문. 우리가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이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받는데, 어째서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또한 그의 성령으로 그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새롭게 하시니,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축복에 대해 우리의 삶 전체로 감사하게 하시사(롬6:13, 12:1-2, 벧전2:5-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찬양을 받으시기 위함이며(마5:16, 고전6:19-20, 벧전2:12), 또한 각 사람이 그 열매로 자기 믿음을 확신하며(마7:17-18, 갈5:22-24, 벧후1:10-11), 또한 우리의 경건한 삶을 통해서 우리 이웃들도 그리스도께로 인도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마5:14-16, 롬14:17-19, 벧전2:12, 3:1-2).
다시 한번 정리하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구조는 죄와 비참함, 그리고 죄와 비참함에서의 구원,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감사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참된 감사는 구원에 대한 은혜를 알지 못하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은혜는 우리의 죄와 비참함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는 올바르게 깨달을 수 없습니다. 죄와 비참함을 알아야지만 죄와 비참함에서의 구원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아는 것이고, 죄와 비참함에서의 구원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임을 알아야지만 참된 감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 받은 그 은혜의 사실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을 거스를 수 있는 모든 것과 죄를 피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을 영위하며 참된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모든 선한 것들을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감사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람의 회심, 다시 말해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사람의 회심과 관련된 부분, 즉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삶에 대하여 먼저 나와야 하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86문에서 선행을 먼저 다루게 됩니다. 그리고 88문에서 사람의 회심에 대하여 다루게 됩니다. 요리문답을 작성한 우루시누스에 의하면 논리적인 순서는 사람의 회심, 그리고 선행을 다루는 게 맞지만, 선행을 앞서 다루는 이유는 선행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입니다. 요리문답 86문은 바로 그 질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일단 선행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내용에 이어 다룬 바가 있습니다. 62문에서 우리의 선행은 왜 전부든 일부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될 수 없는가? 또 63문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미래의 세상에서 선행에 대해 상을 주실 텐데, 그래도 우리의 선행이 아무 공로가 없는가? 이때 우리의 선행이 전부든 일부든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선행은 불완전하다는 것, 점과 흠이 있다는 것으로 답했습니다. 또한 상을 주신다 할지라도 선행이 공로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나 됨이 주의 은혜이기에 상을 주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공로에 대한 상이 아니라 여전히 은혜에 대한 상이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64문은 이러한 가르침이 선행에 대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무관심과 속된 것으로 만들지 않는가에 대한 것인데, 결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자들로서는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62문 이하 64문은 로마 가톨릭의 염려, 즉 이신칭의 교리가 윤리적인 방종을 낳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답변인데, 저들은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혹은 믿음과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교리를 주장합니다. 즉 저들에게 있어 선행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요리문답 86문을 통해 재차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질문 자체가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이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 받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요리문답 86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율법주의자들의 교리에 대해서도 거부합니다. 여러분, 복음은 값없는 은혜의 내용을 증거 합니다. 왜 복음이 값없는 은혜의 내용을 증거 하는가? 우리가 값없는 은혜의 내용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증거로 말하자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이것이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 보편의 모습니다. 율법이 약속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레위기 18장 5절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에게서 이 말씀을 그대로 지켜 행하는 자가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대신하여 우리 죄를 대속할 뿐 아니라 마땅히 이루어야 할 모든 율법을 대신하여 완성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나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 짐을 짊어지셨고, 나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쪽에서는 ‘값없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때 건전하지 못한 인간의 사고는 값없는 은혜의 교리를 다음과 같은 논리로 전개합니다. 사람은 구원에 이르게 할 만한 선행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이루어야 할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루셨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할 필요는 없다. 율법에 순종할 필요도 없다. 앞에서 가톨릭은 어떻게 말합니까?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값없는 은혜가 아닙니다. 선을 행해야 한다는 조건적 은혜요, 그렇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은 자신이 공로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공로가 있어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율법주의자들은 은혜이기 때문에 선을 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양쪽 다 우리는 거절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성경은 선행을 말하되 공로가 아닌 선행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요리문답의 구조로 잘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감사로서의 선행일 뿐입니다. 여기서 요리문답은 선행을 해야 할 이유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 관계된 것으로,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와 관계된 것으로, 우리가 받은 믿음을 우리가 행하는 열매로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 이웃과 관계된 것으로, 우리의 경건한 삶을 통해 그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겠는데, 요리문답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또한 그의 성령으로 그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고 표현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 우리는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2)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자로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하셨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하신 자들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게 되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는 말씀이 사실로 있습니다. 때문에 에스겔 36장에서 말씀하신 바가 있어야 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 즉 구속함을 받았다고 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여 그의 말씀을 지키게 만드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시면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 즉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는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성화가 없다면 칭의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지만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야고보서 2장 22절이 사실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누군가 말하는 것처럼 야고보서는 믿음 + 행함이 곧 구원이라고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참된 믿음이란 행함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왜 우리가 선행을 행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살아 있는 한 행함이라는 열매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행함, 선행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우리의 중생의 열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케 되었다고 할 때 중생된 자의 열매는 선행이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선행이 없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중생도 없다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케 하신 이상 성령 하나님은 중생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여기에 성화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또한 그의 성령으로 그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축복에 대하여 우리 삶 전체로 감사하게 되는데,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선행의 목적, 감사의 목적은 무엇인가?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만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맨 처음 인간을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또한 그의 형상대로, 곧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주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삶으로써 그에게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그들 스스로가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영광과 찬송을 받는 자가 되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구속하셨는데, 구속의 목적이 어디 있느냐? 에베소서 1장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3-6) 예정의 내용으로 설명하지만 때가 되어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목적이 어디 있느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할 목적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에 대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우리를 예정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데 있는 것이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만드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를 찬송하는 데 있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 다시 말해 선행과 같은 내용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달리 말하면 선행을 위해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모든 내용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를 찬송하도록 할 목적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런 점에서 성경은 너희를 구속하신 목적이 선행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베드로전서 2장 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같은 장 12절에서는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도 말씀합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마태복음 5장 16절입니다.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빛과 관련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지막으로 디도서 2장 14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두 번째로 믿는 우리가 그 열매로 자기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성경은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7장 16절 이하에 보면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6-20)고 말씀합니다. 특히 15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모양은 그리스도의 양 떼처럼 하지만 사실을 그리스도의 양 떼를 해롭게 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씀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자들에 대하여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분별만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어떤 나무냐에 따라 그 열매가 결정됩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습니다. 좋은 나무라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고, 못된 나무라면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의 비유처럼 그리스도가 참 포도나무로 우리가 그에게 붙어 있는 가지라면 거기에는 포도라는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열매로 우리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열매는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구속하신 자들 안에서만 이런 열매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0-11)는 식으로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이 말씀 앞에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면서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는데(벧후1:5-8) 열매를 통해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달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너희에게 주신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좀 더 간단하게 말하면 빌립보서 2장 12절의 말씀과 같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때문에 구원은 우리에게 달린 문제냐? 그렇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너희 열매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할 때 구원이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구원이 너희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열매를 통해 확인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때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주의 은혜를 따라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구원에 있어 흔들리는 일이 있는가?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열매보다는 죄 쪽으로 기울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가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열매로 우리를 확인해야 하고, 그런 열매를 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구속하신 자를 하나님께서는 내버려두시는 법이 없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우리의 경건한 삶을 통해 우리 이웃들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함 받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 언급한 마태복음 5장 16절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빛이란 너희의 착한 행실이고, 그것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32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전서 3장 1절과 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이런 점에서 최선의 전도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값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때문에 선행조차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해, 그리고 자신에게 주신 믿음의 확증을 위해, 나아가 이웃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선행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행이 구원을 위한 공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선행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또한 그의 성령으로 그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새롭게 하신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7문은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 그것으로 감사하지 않는 사람, 오히려 선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하여서도 설명합니다.
87문. 감사하지 않는 악한 삶을 계속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도 구원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답.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음란한 자, 우상숭배자, 간음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탐욕스러운 자, 술 취하는 자, 비방하는 자, 강도 같은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임을 성경이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6:9-10, 갈5:19-21, 엡5:1-20, 요일3:14).
선행이 구원을 얻을 만한 이유와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선행이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이 말은 죄가 없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한 어느 누구도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중생된 자라 할지라도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된 자는 죄를 짓지만 죄 가운데 빠져 회개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생활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자들은 그의 성령으로 그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하지 않은 자들, 그래서 감사하지도 않고 계속해서 악을 행하면서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에베소서 5장 5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그러나 이런 자들이었을지라도 그들에게 복음의 빛이 비춰지고 있고, 또 그 빛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회개하는 일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구원의 은혜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누가 구원의 은혜의 대상인지 하나님만 아시지만, 참된 믿음은 행함이라는 열매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 주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