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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연결단절 귀신의 정체 파악>의 줄거리:
연결단절 귀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이런 종류라고 구분하신 귀신입니다. 즉 사람들의 급소를 알고 생명줄을 끊는 귀신입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하나님이 어떻게 하면 연결이 끊어지는 지를 정말 귀신같이 아는 귀신입니다. 이 귀신에 맞서고 쫓아내기 위해서는 정체파악이 급선무입니다. 믿음은 결국 이 귀신과의 평생 싸움이지요.
연결단절 귀신의 정체 파악
(마가복음 9:25~32)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연결단절 귀신의 정체 파악>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연결단절 귀신의 정체 파악’
예수님께서는 29절에서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며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종류라 함은 소년에게 들어왔다가 예수님에 의해 쫓겨나간 귀신을 구분하신 것입니다. 이 귀신에게 별명을 붙여보자면 연결단절의 귀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귀신을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이라 부르셨습니다. 말 못하고 듣지 못함은 곧 소통과 연결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이 사건에서 알아야 할 부분은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소년의 아버지와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을 포함해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한탄하셨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믿음이란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될 마음가짐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 함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연결 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전혀 가지지 못한 세대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만 연결의 단절은 나 한 사람의 잘못이나 믿음이 없음으로 인해 생겨난 일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다는 말에는 하나님과의 연결을 이룰 수 없는 마음가짐을 갖게 하는 귀신의 역사 안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귀신의 역사에 저항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귀신의 역사에 안주하여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귀신에게 묶였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지 않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연결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증거가 나타납니다. 마음에 확신과 느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3절에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증거가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분과 외국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께서 저에게 “목사님은 영어를 배우실 기회가 많으셨네요.”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대로 저는 카투사에서 복무했고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살았으니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저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합니다. 대화를 할 수는 있지만 잘 한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다만 이것을 23절의 말씀과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저는 단순히 영어를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영어로 해야 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제가 영어로 일하기를 바라신다면 저는 유창하게 영어로 설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영어뿐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해는 세상 모든 일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세상에 못할 일은 없습니다.
또 하나님과 연결되어있다는 증거는 삶에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으므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성공도 없고 무서워서 피하고자 하는 실패도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공 같아도 실은 성공이 아닐 수 있으며, 실패 같아도 실은 실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뜻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은 이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상황의 해결이나 미해결을 가늠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연결되어 그 주권과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짐에 대해 범사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연결을 끊는 귀신이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귀신을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귀신이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귀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귀신들린 소년은 믿음이 없는 세대 즉 하나님과의 소통과 연결이 끊어진 채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살펴보면서 이 연결단절의 귀신의 정체와 이러한 귀신이 우리에게 어떠한 일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귀신에 대해 알아야만 쫓아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연결단절 귀신이 들어왔을 때에 나타나는 몇 가지 증상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그 증상은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항상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세상 것들을 선택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 선택하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으나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 부릅니다. 다만 이 하늘은 공간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다 멀리 있다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즉 하늘이란 시간과 공간이 아닌 영의 차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하늘은 지금 바로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연합하여 승천한다고 하는 것도 어딘가 멀리 마음을 보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영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가까이 계신 한편 우리 몸에는 육체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세상이 가까이 있습니다. 연결단절 귀신의 역사는 말 그대로 하나님과의 연결을 끊어지게 합니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세상에 마음이 붙도록 유도하고 유혹합니다. 이것이 귀신에 의해 나타나는 첫 번째 증상입니다. 요약해보면 귀신의 단절작전은 마음에서 첫 번째로 연결되는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세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지게 됩니다.
다만 이것은 단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만 끊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음의 첫 번째 연결은 두 번째 세 번째로 이어지는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된 상태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뜻과 능력으로 다른 모든 대상과 관계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되면 세상과 연결된 마음을 가지고 다른 모든 대상과 관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혼부부에게는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이 배우자입니다. 서로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마음이 딱 붙어버립니다. 배우자를 생각하며 일도 하고 시장도 보고 친구도 만나고 친정에도 갑니다.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되었기에 매사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신혼의 기쁨은 머지않아 사라지게 될 일시적인 일이기에 우리가 추구해야 될 상태는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될 연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삼아 연결이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기운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분위기 안에서 두 번째 세 번째 대상들을 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연결단절의 귀신은 첫 번째 연결의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세상으로 만듭니다. 하나님과 끊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의 끊어짐은 인생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다. 돈 문제가 생겨난 것입니다. 다만 돈 문제의 정의는 단순히 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는 상황에 마음이 밀착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건강 문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것이 건강의 정의가 아닙니다. 마음이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 밀착하여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자녀 문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녀가 말썽을 부리는 것이 자녀 문제의 정의가 아닙니다. 말썽을 부리는 자녀에게 마음이 밀착하여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연결을 끊고자 하는 것이 연결단절의 귀신의 역할입니다. 이 귀신은 말 못하고 못 듣게 하는 귀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귀신이 우리의 마음에서 역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짐을 문제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편안하게 역사해 갈 수 있게끔 방치하는 것입니다. 귀신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마음이 세상과 밀착을 이룬 상태에서 얼마든지 하나님께 기도하게 합니다. 세상과 밀착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송하고 예배당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모든 일이 의미를 잃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종근당의 광고를 보면 “여러분이 주무시는 동안에도 종근당의 연구소는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종근당의 연구소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곁에 와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마음에서 첫 번째 대상으로 붙잡는다면 하늘과의 연결은 끊기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에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됩니다.
두 번째로 그 증상은 귀신을 원동력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격렬하게 움직인 끝에 움직이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18절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라고 하였고, 22절에서도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거꾸러져서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다가 곧 파리해지고 또 죽고자 불과 물에 뛰어들기도 하는 모습은 극도로 흥분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떠나자 죽은 자처럼 되어버립니다. 아이의 움직임의 원동력이 귀신이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귀신이 들어있을 때는 격렬하게 움직이다가 귀신이 나가자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이 소년의 모습은 믿음이 없는 모든 사람들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움직임의 원동력 또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연결단절의 귀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마음의 관심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이 되어버린 상태를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상태를 묵인하면 귀신들린 소년과 같은 상태가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을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에 붙이는 것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마음을 붙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에 마음을 붙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에 마음을 붙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마음이 붙게 되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격렬한 의지의 움직임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마치 스스로 불과 물에 뛰어드는 것처럼 위태롭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문제가 닥쳤을 때 속이 타는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속이 새까맣게 탄다고 합니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요? 말 그대로 마음이 불에 뛰어 들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기분이 무겁고 우울하여 가라앉을 때도 있습니다. 가라앉는다는 말이 의미하는 대로 마음이 물에 뛰어 들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가치들은 휴지조각처럼 아무쓸모가 없어질 정도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젖혀두고 이 세상에 마음을 붙였기 때문에 마음에서 온전한 좋음은 상실되었습니다. 그리고 좋음을 줄 수 없는 세상에게 좋음을 요구하다보니 마음은 새까만 숯 덩어리처럼 불에 타버리고 돌덩이처럼 물속에 가라앉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음을 돈에 붙인 사람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돈이 좋음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좋음을 줄 수 없는 대상이기에 아무리 돈을 모아도 좋음은 생겨나지 않기에 마음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심지어 돈이 벌리지도 않으니 속이 바짝바짝 타오르고 우울함에 빠져들며 불과 물에 뛰어드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귀신이 들려서 불과 물에 뛰어들고 있음을 모르고 돈이 안 벌려서 괴롭다고 생각하니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부모라면 자녀가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 마음이 붙어서 자녀의 성공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합니다. 그러나 실은 그러한 마음이 불과 물에 뛰어드는 상태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성공과 실패를 논하지만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에게 세상의 성공과 실패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따라서 성공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불과 물에 뛰어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변화산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좋으심이 제시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산 아래 인간세상을 망각해버릴 정도로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편 천사들은 그 하나님의 좋으심을 늘 보고 있습니다. 그 천사들이 이 땅에서 좋음을 찾는 사람들을 볼 때에 어떻게 생각할까요? 사업가는 흑자를 남겨서 좋음을 얻고자 불철주야 노력하지만 천사들이 볼 때에 그것은 너무나도 부질없는 짓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에 비하자면 돈의 좋음이란 비교할 수 없이 사소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속을 태우고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니 불과 물에 뛰어드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18절을 보면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고 하였습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잡았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선택은 언제 어디서든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과 마음이 밀착하게 된다면 귀신에게 붙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매사에 좌절하고 절망하여 거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분노하여 거품을 물고 이를 갈게 됩니다. 또 걱정과 근심에 눌려 파리해지게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변화산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좋음을 붙잡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 이러한 일은 반복됩니다. 단지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다고 하여 붙잡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붙잡을 때에 삶에서 좋음은 사라지게 됩니다.
본문에서 귀신이 떠나고 죽은 자처럼 되어버린 소년을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십니다. 마가는 바로 이 장면 뒤에 31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고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유전 죄 때문에 귀신의 역사에 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귀신의 역사가 편하고 좋게 여겨집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마음 곁에 와계신다는 사실을 젖혀둔 채 육체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세상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미친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이 상태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유는 유전 죄 때문입니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대상들이 관심의 대상으로 붙잡기에 편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볼 때에 아이가 죽은 것처럼 되었듯이, 세상 것을 붙잡는 귀신의 역사에 사로잡힘이 종식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귀신의 역사에 자승자박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귀신은 마음껏 휘둘러서 고꾸라지게 하고 거품을 흘리게 하고 이를 갈게 하고 파리하게 만들고 불과 물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봄을 통해 늘 마음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에 세상이 달라붙었음을 확인했다면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죽은 아이처럼 귀신에 붙잡힌 상태는 중단되고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시고 연결시켜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유전 죄로 인해 귀신의 역사에 안주하고자 합니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진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세상에 마음을 붙이고자 합니다.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한 반드시 연결단절의 귀신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의 연결을 묵인하면 속은 타기 시작합니다. 또 가라앉고 우울해지고 걱정하고 새파랗게 질리게 됩니다. 알 수 없는 억울함과 분통이 터집니다. 좌절하고 절망하여 고꾸라집니다. 애써 이렇게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연결단절 귀신이 하는 일은 마음을 세상과 밀착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으로 염려하고 걱정하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마음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붙었다면 없을 증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세상에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붙은 상태를 지속시킨다면 불과 물에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고꾸라지고 거품을 물고 이를 갈며 불과 물에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증상들이 나타난다면 즉시 십자가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연결단절의 귀신의 역사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소년이 죽은 자처럼 되었듯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소년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듯이 하나님과 연결시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소통이 원활해진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을 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좋은 삶이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러한 삶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삶의 현장 언제 어디에서나 주님께서 십자에서 죽으셨음을 기억하여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마귀의 역사에 나를 맡겨 세상과 연결됨이 중단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과 연결된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