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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37
로마서 5장 19절 [8장 5-6항]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과 동일본체시며 계속해서 그런 분으로 계시지만,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심으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과 사람이 혼합되어 나타났다는 것도 아닙니다. 신성으로 계신 그분이 인성을 취하여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계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성은 신성대로, 인성은 인성대로 계시면서 신성과 인성이 비분리적으로 함께 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성에 연합된 그의 인성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들을 지니면서 측량할 수 없이 성령으로 거룩해지며 기름 부음을 받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인성을 취하신 중보자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은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거하도록 하길 기쁘게 여기셨고, 마지막 날까지 거룩하며 흠과 얼룩이 없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여 중보자와 보증의 직책을 실행토록 철저하게 예비되셨습니다. 성부께서 성자로 하여금 이 직책으로 부르셨다는 것이고, 때문에 이 직책을 위하여 성부께서는 모든 권세와 심판권을 아들의 손에 주고 모든 권세와 심판권을 실행하도록 아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부께서 성자에게 이 직책을 주셨다고 할 때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직책을 지극히 기꺼이 맡으셨습니다. 맡으셨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그는 율법 아래에 있으셨고, 그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 안에서 지극히 끔찍한 고통들과 자신의 육체 안에서 지극히 아픈 고통들을 직접 견디셨습니다. 나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또한 장사되어 죽음의 권세 아래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부패도 볼 수 없으셨습니다. 그는 고난을 겪으셨던 동일한 육체를 가지고 제 삼일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동일한 육체로 승천하셨고, 그의 아버지 우편에 앉아 중보하고 계시며, 세상 끝날에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 5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으신 직책을 따라 그가 행하신 사역의 성격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역의 효과는 무엇인지, 나아가 그 대상은 누구인지에 대하여 고백합니다. 이어 6항에서는 그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구약 백성들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먼저 5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 예수는 자신의 완전한 순종과 영원한 성령을 통해 단번에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희생으로 성부의 공의를 충만하게 만족시키셨습니다(롬5:19, 3:25,26, 히9:14,16, 10:14, 엡5:2). 또한 성부가 그에게 주신 모든 자들을 위해 화해뿐만 아니라 천국에서의 영원한 기업을 사셨습니다(단9:24,26, 골1:19,20, 엡1:11,14, 요17:2, 히9:12,15).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성격이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신앙고백서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주 예수는 자신의 완전한 순종과 영원한 성령을 통해 단번에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희생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직책을 완수하셨습니다. 여기서 완전한 순종은 8장 4항에서 언급한 율법 아래에 있으면서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4장 2항에서 하나님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부여된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닌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의 으뜸인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만물의 으뜸일지라도 사람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순종해야 할 그들이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떨어져 죄 가운데 죽게 되었고, 영혼과 육체의 모든 기능들과 부분들이 전적으로 오염이 되었습니다(2항). 또한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모든 후손에 이르기까지 이 죄책이 전가되어 죄 가운데 동일한 죽음과 부패된 본성이 전달되었습니다(3항).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원래의 부패로부터 모든 자범죄들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부패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모든 선을 싫어하고, 행할 수 없고, 대적하며, 그리고 모든 악을 향해 전적으로 기울어진다.”(4항)
여러분, 사람과 맺은 첫 번째 언약은 행위언약입니다. 그 안에서 완전하며 개인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에게, 그리고 아담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생명이 약속되었습니다(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 2항).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타락에 의해 자신을 행위언약으로 말미암는 생명을 얻을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은혜언약이 주어진 것입니다(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 3항). 이 은혜언약의 중심에는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아담 안에서 함께 타락하여 생명에서 떠난 자가 되었다면, 이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담이 실패한 일을 회복하여 다시금 생명에 이르게 되는 자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정확하게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로마서 5장 19절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의인이 됩니다. 아담의 불순종에서도 ‘많은’을 사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서도 ‘많은’을 사용하지만, 많다는 것은 ‘모든’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때 ‘모든’은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의미보다는 특정한 그룹 전체를 가리키는 것인데, ‘아담 안에서의 모든’은 아담을 대표로 하는 인류 전체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아담의 본성을 따라 난 모든 인류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로하는 대상은 인류 전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 예정론의 내용으로 하자면 택하신 백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분명한 것은 아담의 불순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대조되고 있고, 또 불순종의 결과 죄인이 된 것과 순종의 결과 의인이 된 것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로 불순종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을 대표로 순종하신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 다시 말해 행위언약을 깨뜨린 것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은 그들 마음에 새긴 모든 율법을 대표하는 성격입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모든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실제로 야고보서 2장 10절에서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그들은 모든 율법을 범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어져 버렸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다보니 이웃 사랑에 있어서도 참되게 나타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취하신 이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하라고 하신 모든 명령에 대하여 행하신 것이고,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에 대해서는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그리고 이후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율법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시면서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데,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단지 외적인 살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 자체가 살인임을 말씀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 역시 외적인 간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 자체가 간음임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일체 범법자로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말은 하지만, 말과 달리 행하거나 마음을 품는 일들이 늘 있습니다. 그러나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께는 그런 일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죄를 짓지 않은 분이 되지 않고서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로 하여금 의인이 되도록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입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은 구약의 모든 말씀에 대하여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고 또 성취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부분까지 있는가?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시기까지 하신 일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지심으로 십자가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죄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서가 인용하고 있는 히브리서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이 없다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 3항에서 고백한 것처럼 ‘측량할 수 없이 성령으로 거룩해’질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까지 거룩하며 흠과 얼룩이 없’는 분으로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이 보존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은 철저히 거룩하신 분으로 구별되셨습니다. 그런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리셨습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했는가? ‘너희’, 즉 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앙고백서가 예수님의 사역을 ‘자신의 완전한 순종’과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희생’으로 설명한다고 할 때 신학자들은 전자를 능동적 순종으로, 후자를 수동적 순종으로 표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고 할 때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두 가지 측면에서 분명히 이해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는 죄인이 받을 죄책과 형벌을 사하여 주는 죄 사함의 은혜와 관련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죄인을 하나님의 뜻과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룬 의인으로 간주하는 은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의 전가를 위한 그리스도의 순종을,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적 복종과 관련하여 수동적 순종의 측면으로, 또한 율법의 의를 이루어 영원한 생명을 받는 언약적 복종과 관련하여 능력적 측면으로 구별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별하여 이해할 뿐 분리하지 않습니다(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전가 서문 참고).
정요석 교수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이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고). “능동적 순종은 그리스도께서 출생부터 수난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을 뜻하고, 수동적 순종은 그리스도께서 수난 가운데 그 어떤 저항도 없이 고통과 십자가를 감내하신 것을 뜻한다.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 근거한 능동적 순종에 의해 영생을 얻는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능동적 순종 없이 단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수동적 순종만 하셨다면 신자들의 죄값은 해결될지라도 신자들의 영생은 미완으로 남는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동안 모든 율법을 지키심으로써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흠이 없는 거룩한 제물리 되셨고, 또한 아담이 모든 율법을 순종하지 못함으로써 잃어버린 영생을 획득하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정확하게 분리되지 않고, 구별될 뿐이다. 선택된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려는 예수님이 살아계신 동안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시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예수님이 살아 계신 동안에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셨는데, 십자가에는 못박혀 죽으시기를 거부하신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십자가에 죽으시려는 최종 목적 없이 모든 율법을 지키시는 것은 순수한 율법의 이룸이 아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희생제물로서 율법을 지키셨다. 율법을 지키실 때마다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셨고, 모든 생애를 십자가의 죽음에 맞추어 나가셨다. 능동적 순종 없는 수동적 순종이 없고, 수동적 순종이 없는 능동적 순종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능동과 수동으로 나눌 때 그분의 생애와 죽음에 걸친 사역의 성격을 잘 이해할 수 있어서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이지, 두 가지는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다시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보면 주 예수는 자신의 완전한 순종과 성령을 통해 단번에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희생으로 성부의 공의를 충만하게 만족시켰다고 고백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효과는 하나님의 공의를 충만하게 만족시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란 무엇입니까?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처럼 불순종의 결과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과 함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일시적인 죽음, 그리고 이후 있게 될 영원한 죽음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공의를 누가 만족시켰는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만족시켰는가? 자신의 완전한 순종과 성령을 통해 단번에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희생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죄인을 대신하여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니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놓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 14절은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에서는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도 말씀합니다.
특히 히브리서 10장에서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고 표현하는 것은 구약과의 비교가 있습니다. 구약은 어떻습니까? 1절을 보시면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3절과 4절에서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래서 6절에서는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라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11절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그러나 이어지는 12절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의 영원한 제사입니다. 구약에서처럼 두번이나 세번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의 제사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완전히 만족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은 더 이상 죄로 말미암은 진노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노가 없기 때문에 이제는 화해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 죽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받은 사람들은 생명, 그것도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고백서는 성부의 공의의 충만한 만족과 함께, 또한 성부가 그에게 주신 모든 자들을 위해 화해뿐만 아니라 천국에서의 영원한 기업을 사셨다고까지 고백합니다. 골로새서 1장 19절과 20절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히브리서 9장 15절에서는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런 화해와 천국에서의 영원한 기업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할 때 ‘성부가 그에게 주신 모든 자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이라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고, 또 화해와 영원한 기업을 상속 받는다고 할 때 그 대상이 누구냐 하면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 한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 1항의 내용을 견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하신 목적 안에서 그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선지자, 제사장, 왕, 그의 교회의 머리와 구원자, 만유의 후사, 세상의 심판자가 되도록 선택하시고 정하시길 기쁘게 여기셨다. 하나님은 예수에게 그의 씨(후손)가 되며, 그로 말미암아 정해진 때에 구속되고, 부름 받고,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영화롭게 될 사람을 영원 전부터 주셨다.”고 하는 그 대상입니다.
그리고 1항 내용을 살필 때 말씀을 드렸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 있는 예정의 내용을 견지한 것입니다. 5항에서는 “생명으로 예정된 인류에 속한 자들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며 불변하신 목적과 그의 뜻의 비밀한 의논과 선한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다...”고 고백하며, 6항은 “하나님께서 택자를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의 뜻의 영원하며 가장 자유로우신 목적에 의해 그것에 덧붙여 모든 방편들을 예정하셨다...”는 그 내용입니다. 이때 모든 방편은 아담 안에서의 타락이 있고,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이 선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완전한 순종과 함께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고 하셔서 우리를 위한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다시 말해 그가 오셔서 완전한 순종을 드리고,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기 전에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기업을 받지 못하는가?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7장 하나님과 사람과의 언약에 대한 고백, 5항에서 살핀 바가 있습니다. 은혜언약이 구약과 신약에서 다르게 실행되었다는 것인데, 5항은 구약에서는 어떻게 실행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언약은 율법 시대와 복음 시대에 다르게 실행되었다. 율법 아래에서 이 언약은 유대인들에게 전해진 약속들, 예언들, 제사들, 할례, 유월절 양, 다른 모형들과 규례들에 의해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실행되었다. 그것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택자들을 약속된 메시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지도하고 세우기에 그 때를 위해 충분하고 유효적이었고, 약속된 메시야로 말미암아 택자들은 완전한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가졌고, 이 언약은 구약이라 칭해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 6항을 통해 강조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속의 역사가 성육신 이후까지 그리스도에 의해 실제적으로 역사되지 않았을지라도 구속의 능력과 효력과 은택들은 창세로부터 계속 모든 세대의 택자들에게 약속들과 모형들과 제사들 안에서 그리고 그것들로 말미암아 전달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해야 하는 여자의 후손, 세상의 시작부터 죽임 당하신 어린양,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 계시되고 예표되셨습니다(갈4:4,5, 창3:15, 계13:8, 히13:8).
먼저 신앙고백서는 구속의 역사가 성육신 이후까지 그리스도에 의해 실제적으로 역사되지 않았을지라도 구속의 능력과 효력과 은택들은 창세로부터 계속 모든 세대의 택자들에게 약속들과 모형들과 제사들 안에서 그리고 그것들로 말미암아 전달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성부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님은 분명 때가 차매 오셨습니다. 때가 차매 율법 아래에서 나셨고(갈4:4), 또한 율법에 대하여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그 순종은 어디까지인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8). 이런 성취에 근거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과 효력, 은택들을 말하게 됩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구약 백성들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의 능력과 효력과 은택들을 받지 못했는가?
일반적으로는 성취 다음에 적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3장 8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앞뒤로 그리스도의 나라의 백성들이 행해야 할 의무들을 제시하시면 권면하는 내용인데, 이런 의무들은 어제와 오늘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의무들만이 아니라 의무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가르침 역시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가르침과 신약의 가르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교리와 신약의 교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을 말한다면 구약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 거룩,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 백성만이 아니라 구약 백성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롭고, 거룩하게 되고, 영화롭게 됩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취하셔서 이 땅에 오지 않으신 시대는 당연히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을 완성하지도 않았고, 또 십자가에 죽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신앙고백서 7장 5항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약속들, 예언들, 제사들, 할례, 유월절 양, 다른 모형들과 규례들에 의해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실행되었습니다. 심지어 성령의 역사를 통해 택자들을 약속된 메시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지도하고 세우기에 그때를 위해서는 충분하고 유효적이었습니다. 신앙고백서 8장 6항에서 창세로부터 계속 모든 세대의 택자들에게 약속들과 모형들과 제사들 안에서 그리고 그것들로 말미암아 전달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들과 모형들과 제사들 안에서, 그리고 그것들로 말미암아 구속의 능력과 효력과 은택들이 전달되었는데, 구약은 신약에서 성취할 그리스도의 확실성 때문에 성취보다 앞서 적용이 먼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취의 확실성을 멀리서 내다봄으로,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의 완성,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이 죽을 것을 내다보는 것으로 적용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고백서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해야 하는 여자의 후손, 세상의 시작부터 죽임 당하신 어린양,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 계시되고 예표되셨다고 고백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첫 범죄 이후부터 곧바로 알려졌습니다. 원복음이라고 말하는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심지어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서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는 말씀도 하시는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는 창세 이전부터 기록된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당하시기 전부터, 아니 모든 만물을 창조하기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생명책을 두셨는데, 거기에 누가 기록되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속될 모든 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 백성만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 백성을 포함합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는 것이고,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는 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분이 구약에서는 약속들과 모형들과 제사들 안에서 계시되고 예표되어 창세로부터 계속 모든 세대의 택자들에게 구속의 능력과 효력과 은택들을 주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