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중예정의 문제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킨 신학자였다. 그는 “하나님 은혜의 선택”이라는 연설을 통해(1936년)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개혁교회 목사를 비판하면서, 과거의 예정론을 운명만 강조하는 “기계적 예정론”으로 규정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의 예정을 고정된 어떤 체계로 바꾸는 것은 잘못이다. 복음 전파의 절박성이 희생되는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누가 구원받고, 누가 버림받을 것인가를 최종적인 방식으로 결정했다는 예정론의 전통적 입장을 비판하고, 성경을 기독론적으로 읽을 것을 촉구했다. 그는 예정의 핵심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했다는 데 두었다. 결론적으로 칼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예정된 자라는 입장을 밝혔다. 즉, 그는 예정을 믿음의 사건으로 해석한 것이다.
바르트의 이중예정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을 통하여 (1) 인간에게는 구원의 선택을 결정하셨고, (2) 하나님 자신에게는 이 인간의 저주와 죽음을 결정하심”을 의미한다. 바르트의 이중예정은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하는 하나님이며, 동시에 선택된 사람이란 것을 뜻한다. 하지만 바르트의 이런 설명방식은 결국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선택된 자라는 논리로 비약될 수 있다. 이 점에서 바르트는 만인구원론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비록 바르트가 ‘객관적 화해론’을 말한 것이지 ‘만인구원론’을 말한 것이 아니라 변명한다 해도 그의 논리에는 여전히 의심의 불씨가 남아있다.
그렇다면 화해와 구원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바르트는 만인화해와 만인구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차 대전 어떤 사람이 나치를 피해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깊은 산중에 은신했다. 그러던 중에 나치가 망하고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은둔자는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 나치가 망한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나치의 패망소식을 듣고 은신처에서 나와야 한다. 여기서 나치가 망한 것은 화해의 사건이고, 그 소식을 듣고 산에서 내려온 것은 구원의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바르트의 화해론이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만인구원론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38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