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법보단 주먹이, 예수보단 편견이 가깝다>의 줄거리:
합법적인 절차를 밟거나 순리적인 대화 등을 통해서 해결하기에는 너무 조급한 나머지 주먹이 먼저 나간다는 뜻이지요. 마찬가지 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문제는 고정관념이나 습관이 된 가치 기준 그리고 선입견과 편견이 언제나 십자가 예수님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보다 먼저 튀어 나와 생각 감정 의지를 지배하는 겁니다.
법보단 주먹이, 예수보단 편견이 가깝다
(사도행전 11:1~18)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법보단 주먹이, 예수보단 편견이 가깝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법보단 주먹이, 예수보단 편견이 가깝다’
본문에서는 고넬료 사건에 대한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다만 이것이 정말로 필요한 과정이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 사건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꼭 필요한 절차였다기보다는 예루살렘 교회의 잘못을 드러내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 사도가 만나서 고넬료가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듣게 될 때 성령이 임하심은 모두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와 의논하시지 않았고 그렇게 하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앞서서 주도적으로 하신 일에 대하여 교회의 추후 승인절차 또한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방인을 선민으로 삼으시고자 결정하셨고 수행하시고 열매를 거두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삼스럽게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사도들과 교인들이 모여서 이방인 선교를 하네 마네 운운하는 모습은 어찌 보면 우습기까지 한 광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주어진 권한은 이러한 것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승인이 없으면 하나님의 역사 또한 진행될 수 없다는 식의 절차는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고넬료와 베드로 사도에게 주도적으로 역사하신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는 하나님에 의해 각자 환상을 보았고 만나게 되었으며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말하고 듣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못지않은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역사하시고 성취하셨습니다. 이때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했다고 합니다.
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자들이 비난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비난했다는 말의 원문을 보면 정죄하고 비난했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베드로 사도가 한 일에 대해 정죄하였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와 만나고 그 집에서 며칠을 머물었다는 소문은 유대에 퍼져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군을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그것은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비난에 대해 베드로는 변명하듯이 사건의 정황을 순서대로 다 설명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인들은 모든 설명을 듣고 난 후에야 겨우 납득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됩니다.
여기서 느끼는 것은 어쩌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해나가시는 일을 오해할 만큼 동떨어진 마음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하신 일들을 정죄했던 마음상태가 왜 생겼는지를 따져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질문이 필요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 마음이 인자 예수님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는 일에 반대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현장에 있지 않아 사건의 전말을 온전히 알지 못했을지라도, 이제까지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역을 해온 베드로를 정죄하고 비난하였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행동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교인들로부터 이러한 정죄와 비난이 나오게 된 이유는 이들의 마음에 가장 강력한 원수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원수는 하나님께 마음을 붙이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뜻이 순조롭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 원수의 대표로써 세상의 가치들을 자주 언급해왔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가치들에는 돈은 물론이거니와 가족이나 일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의 가치들에 만만찮게 하나님의 원수로 작용하는 대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편견입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법이 엄연히 존재하더라도 삶에서는 주먹을 쓰는 것이 해결에 유리할 때가 많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사건을 염두에 두자면 “예수보다 편견이 가깝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삶에서는 예수보다 편견이 더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편견(偏見)을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것이 바로 편견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치우친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복음은 십자가에서 시작하여 하늘에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입니다. 즉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내가 하나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내 마음이 승천하신 인자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만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 세상에 남아있는 나의 지정의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기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에 치우친 생각으로써의 편견입니다. 즉 마음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 주어지는 생각이 아니면 다 편견입니다.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보시고 아시고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과 만사와 만인에 대해서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한다면 이것이 바로 치우친 편견입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같거나 근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이 하나님과 가까워져야만 합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무엇인가 끼어있다면 그것에 의해서 마음은 끌리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생각은 무조건 편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몸에 병이 생겨서 마음이 온통 건강문제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소원은 건강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 소원은 그 자체로 오류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건강이라는 문제에 가까이 있는 오류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생각이나 판단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건강에 대해, 미래에 대해, 가족에 대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편견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하지 못하고 다른 대상에게 치우쳐서 나타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편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마음이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마음이 승천하신 인자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만 하나님과의 밀착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유지되지 못한 채로 반복되는 편견은 고정관념이나 내 안에 이미 들어와 나를 지배하는 선입견이 되어버리고, 습관적이고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가치기준이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기준은 편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면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해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밀착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면 생각은 편견이 되고 그 편견이 쌓여서 고정관념이 되고 선입견이 되고 가치기준이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기준은 습관적이고 자동적으로 작동하기에 설령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예수님보다 가깝게 여겨지게 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모두 가짜이고 뜻하는 모든 것이 거짓이 되어버립니다. 잘못된 결단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러한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과 가치기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편견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습관적이고 자동적으로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컴퓨터를 켜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실행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육상선수가 출발신호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몸이 튀어나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고정관념이나 선입견과 가치기준은 내가 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하나님과의 밀착이 온전하지 않다면 이러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과 가치기준은 언제든지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하나님보다 내게 더 가까운 것으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의식으로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붙잡지 않는다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세상적인 가치기준에 근거한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끌려다니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편견이 바로 이러한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기준의 원인이 되기에 재물 못지않은 원수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그릇으로 쓰임 받지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습니다. 이방인들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졌다고 하면 교인으로서는 마땅히 놀라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이 소식에는 사도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물론이거니와 고넬료 집안에 성령이 강림하셨다는 내용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이 소식을 좋아하기는커녕 불쾌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2~3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직책이 위중하였기에 오히려 돌로 쳐야 한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베드로 사도를 향하여 이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정죄와 비난으로 이루어진 회의를 단순히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이 결정된 회의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은 교회의 생성과 성장을 모두 지켜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전달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고 성령이 임재하시는 모든 일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의 주도적인 이끄심을 통해서 가능하였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자마자 태도가 돌변하여 정죄할 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교인임을 자청한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같은 반응은 나올 수 없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의 특징인 성령의 역사를 말하면서 끊임없이 교회의 실수를 가감 없이 노출시키며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의 중심이 되는 단어는 “할례자들”입니다. 누가는 베드로를 정죄한 사람들을 교인이 아닌 할례자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의 1절에서 “사도들과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나왔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굳이 “할례자들”이라고 강조한 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후에도 유대교의 전통을 중시하는 일에 열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방인과의 입장에서 선민이라는 특권의식을 유지시켜 나가기를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과의 식사나 교제나 결혼은 금기시되는 규정이었습니다. 베드로조차도 이방인과의 교제에 대해 굉장히 경계심을 갖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세 번이나 환상을 보여주시며 고정관념을 깨뜨리셨음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 변화는 10장 28~29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이전에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장애인을 고친 후에 솔로몬 행각에서 한 설교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의 설교를 보면 차이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2장 38~39절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약속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조차 막상 이방인 고넬료와 교제를 앞두게 되자 경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편견이 이처럼 무섭습니다. 이론으로 알고 영적으로 깨달았지만 몸이 내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여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영적 깨달음보다도 무서운 것은 고정관념이 먼저 작용하고자 합니다. 법보다 주먹이 먼저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조차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세 번이나 환상을 보여주시며 강압적으로 밀어붙이셔서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십니다. 그리고 유대 땅에 남아있던 교인들 중에는 편견이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우선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습니다. 이들은 편견에 지배를 받는 상태였기에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일으키신 역사에 대해서조차 정죄하고 비난하는 무서운 일을 벌이게 됩니다.
본문에서 소개되고 있는 예루살렘에서의 모임은 단순히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를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절차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교인들이 현장을 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발적 역사를 정죄까지 하며 비난할 수 있던 이유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본문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이방인인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더욱 명료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역사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따라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이루시고 성령강림의 역사를 성취하심으로써 열매를 거두셨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이 사건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마치 자신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위치라도 된 듯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교회의 수장이었던 사도 베드로가 스스로를 변호하는 모습까지 보여야 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적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호통을 칠만한 입장이었습니다. “너희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생활화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 한 일로 여기며 정죄하는 마음으로 비난할 수 있는가?”라고 되물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솔직하게 당시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고 결과적으로 예루살렘 교인들 또한 이를 받아들이게 되지만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까지도 살릴 정도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베드로가 자신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치 몸에 배어 있던 편견이 강하게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식사하고 머물렀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라는 말처럼 베드로는 여전히 이에 대해 어느 정도의 거리낌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강한 어조로 예루살렘 교인들을 나무라지 못한 채 변명하듯 당시의 사정을 밝혔던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베드로는 호통을 칠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이 호통은 베드로 자신의 의로움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자들에 대한 호통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이 사건이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신 결과임을 아는 베드로는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이 베드로를 정죄하고 비난했던 것은 베드로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의적인 것이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하나님이 뜻에 의한 것이었기에 이러한 오해를 만들어낸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편견은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만들어냅니다. 습관적으로 적용하는 가치기준이 예수님 앞서서 작용함으로써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본문의 요점은 이방인 선교의 공식화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에 대해 갖고 있었던 선민이라는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기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베드로로부터 모든 사실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지만 이것은 결코 칭찬받을 만한 태도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마음에서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보고 있었다면 이방인에게 성령강림 소식이 들려왔을 때 이미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뒤늦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정죄와 비난을 무마하려는 인상을 받게 합니다.
다만 이러한 베드로조차도 편견의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도성과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강하게 설득을 할 때에 이런 예를 듭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게바는 사도 베드로입니다. 바울이 베드로 사도를 안디옥에서 만났을 때에 책망하였다는 것입니다.
대체 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는지는 이어지는 12~14절에서 자세히 나타납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만났던 것은 고넬료와의 만남이 있은 뒤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방인들도 똑같이 선민으로 삼기로 결정하셨음이 드러난 후였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먼저 와 있던 안디옥은 이방인 지역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을 안디옥으로 보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전같이 비난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자리를 피해버립니다. 그러자 바나바와 같이 신실한 사람도 베드로를 따라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온 바울은 이 말을 듣고 기가막혀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언제나 마음을 하나님께 보내고 그렇게 가르쳤던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피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편견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같이 신실한 사람들조차도 예수님보다 편견을 앞세울 때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베드로나 바나바가 흔들린 적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흔들리는 것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과 같은 습관적인 가치기준이 앞서게 되면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동행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사람에 대한 죽음이고 사건과 상황에 대한 죽음일 뿐만 아니라 내 속에서 안전지대 안에 머물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과 같은 습관적으로 적용되는 가치기준들에 대한 죽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습관적 가치기준은 비단 사람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무의식중에 돈이 많으면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의식중에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고, 무의식중에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생각은 임할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지역감정 같은 선입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서 제시된 유대인의 이방인에 대한 편견과 다를 바 없습니다.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기준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내 안에서 마음 놓고 안정적으로 숨어서 항상 작동하는 상태는 깨어져 나가야만 합니다. 공생애를 사시던 예수님의 가장 큰 문제 역시 편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행동을 해나가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전통과 고정관념과 선입견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서 끊임없이 예수님께 도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교회 안에서 이러한 편견이 그대로 자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만인과 만물과 만사뿐만 아니라 인격 속에 완벽하게 자리 잡은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기준에 대한 죽음입니다. 이러한 편견의 결과물들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십자가에 깨어있음으로써 죽어야만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베드로나 바나바 같은 신실한 사람들도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법보다 주먹이 먼저인 것처럼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고정관념이 먼저 역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 큰 편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사오니 긍휼히 여겨주셔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편견에 대해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 아버지와 가장 가까이 머무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더욱더 철저히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