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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준비하는 것은 십자가의 믿음밖에 없습니다. / 2022년 9월 11일 주일 오후 예배
본문 / 누가복음 17:20-37
태풍 힌남노가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지나갔나 했는데 사망자가 열두 명이나 나왔습니다. 특히 지하 주차장에 차를 빼기위해 갔던 사람들의 사고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지켜볼 때마다 인간은 참 연약한 존재이며 인생은 참 허망한 것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를 빼러가는 그 길이 인생을 마치는 죽음의 길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일기예보를 보니 13호 태풍이 다음 주쯤에 서해안으로 북상할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은 극적으로 살았지만 내일은 죽는 날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추락할 때 극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다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오늘 죽어도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은 에녹과 엘리아와 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피할 수는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실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심판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또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잘 못된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별이 되었다. 좋은 곳으로 갔다. 편히 쉬게 되었다. 하늘에서 지켜보겠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하늘의 별이 될 수도 있고 편히 쉴 수도 있고 지켜볼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구원을 받았을 때의 일인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면 영원히 고통을 받는 지옥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 정말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연재해나 사고나 병으로 죽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인생은 희망이 없는지 말입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자신을 위해 이 세상의 영광과 힘과 재물과 돈과 재미와 즐거움과 쾌락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려고 몸부림을 치며 그것을 의지하고 자랑도 하지만 죽으면 하나도 가져갈 수도 없고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남들보다 더 가지려고 발버둥을 치며 얻을 것들을 자랑하고 의지하지만 죽으면 그것들은 아무 것도 소용이 없고 오직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알면 정말 우리는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성도라고 말하지만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목사는 그렇게 삽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목사와 성도들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 없이 육신을 위해 사는 불신자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잠시 왔다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숭배하기 위해 세상에서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처럼 성도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을 위해 몸부림을 치며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가 적당히 대충 믿는 그런 믿음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성도들이 미친 겁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준비하지 않고 그저 세상의 것만을 구하며 내 소원과 만족을 들어달라고 조르기나 하고 원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과 자신을 함께 섬기는 그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식들이 급류가 흐르는 강을 튼튼하고 멀쩡한 다리가 있는데도 그리도 건너지 않고 외줄을 타고 건너는 것을 지켜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잘 한다고 대견하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이미 앞에서 줄을 타며 간 사람들이 다 떨어져 강물을 휩쓸려 죽었습니다. 내 자식이 죽는 길을 가는 겁니다. 그 길로 가지 말라고 말하고 설득하고 말려도 보았지만 뿌리치고 그 길을 간 겁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런 자가 아닙니까? 반드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재물을 함께 섬기는 그 사망으로 가는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 아버지가 언제까지 고통스럽게 보아야 합니까?
저는 누가 구원을 받고 못 받을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으로 교회에는 구원을 받은 자들이 많지 않다는 것은 압니다. 구원받을 자들이 많지 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구원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 두려운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받을 성도들의 그 모습이 노아와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저는 예수님이 마지막 심판을 맞을 교회와 성도들이 노아와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는 그 말씀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두렵게 합니다.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이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믿음을 볼 수 없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여러분은 두렵지 않습니까? 내 믿음은 진짜 일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일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왜 롯의 처가 저주와 심판을 받았는지 아느냐는 겁니다. 지금 네가 롯의 처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롯의 처는 그 말씀에 불순종하고 뒤를 돌아보아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뒤를 돌아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몸은 마음의 반영이라는 말을 본적이 있습니다. 몸은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무거운 근심으로 상해있겠습니까? 마음의 무거운 근심이 있는데 얼굴이 밝겠습니까? 얼굴 중에서 눈은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는 등불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음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불이 소멸되어 가면 사람의 눈은 십자가의 주님을 향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망하고 낙심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기도 중에 본 환상에 대하여 간증한 것이 생각이 납니다.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 큰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줄지어 가더랍니다. 그리고 그 뒤를 회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따러가더랍니다.
설명을 안 해도 그들이 누군지 다 알겠더랍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한결 같은 모습이 마치 얼굴이 없는 사람들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가더랍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은 결국 영원한 사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는 길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인 것입니다.
롯의 처가 구원으로 부름을 받았어도 세상을 향한 그 정욕과 탐심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불에 타 재가 될 그 소돔과 고모라에 미련이 남은 것입니다. 지금도 성도들은 세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하나님과 세상을,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과 자신을 함께 섬기다가 심판대 앞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회개해야 된다는 말씀을 수 없이 들어도 회개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믿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대 앞에 가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있을 때 나는 누구인지 묻고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물어야 합니다. 정말 이대로 이 믿음을 가지고 심판대까지 가면 하나님께 내 믿음을 인정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인간은 정말 개 쓰레기만도 못한 것입니다. 오죽하면 길에 쳐죽은 개만도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내 영혼이 구원을 받은 일이라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겁니다.
십자가에 나를 못을 박지 못하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과 영에 묻고 싶습니다.
내 영혼의 구원보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까? 나는 이 세상에 십자가를 만나 구원을 받기 위해 왔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구원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어도 좋습니까? 목숨은 그만두고 돈 백만 원쯤은 얼마든지 손해를 볼 수 있습니까? 내 자존심과 감정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습니까? 구원을 이루어가는 데에 있어 사람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구원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내가 원치 않는 일이라도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습니까?
이게 아니라면 난 아직도 천국과 지옥과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과 영으로 믿지 못하는 겁니다. 아직도 내 안에 내가 주인이 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내 주인으로 영접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고 싶은 것입니다.
부자 청년처럼 영생보다 내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보다 잠시 왔다가는 세상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챙기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천국을 버리고 지옥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롯의 처를 잊지 말라고 하시면서 십자가를 제시하셨습니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천국의 가는 길은 나를 십자가에 버리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그 십자가의 믿음만이 정말 내가 사는 길인 것입니다.
정말 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 생각과 감정과 뜻과 정욕과 탐심과 주인 됨을 붙들고 있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나를 영원한 고통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는 길은 나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잃는 것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것이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나라의 백성입니까? 십자가에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그 십자가의 회개와 거듭남이 없으면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내 자신을 두 주인으로 섬기며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만 순종하고 마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겠습니까?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주인노릇 하던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입니다.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인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내가 죽는 십자가이고 구원은 그 십자가의 믿음로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구원이 예배나 기도도 헌금이나 충성이나 봉사로 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 자아가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어렵고 힘들고 잘 안 되어도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만이 사시는 십자가의 길만을 가야 합니다. 넘어져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하면 불가능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져주신 주님이 반드시 도와주실 겁니다.
그러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이번에 태풍으로 하천이 범람하여 지하 주차장에 갇혀 있다가 기적적으로 생존한 사람이 포기하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포기하고 싶었는데 아이들을 생각하며 고통을 이겼다고 합니다.
우리도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을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의 그 영원한 기쁨과 안식을 생각하며 잘 죽지 않는 나와 끊어지지 않는 죄와 세상과 마귀와 십자가로 싸워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하 주차장에 물이 그렇게 가득 찼으니 사람들이 살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나오자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살았다! 살았다고 환호성을 외치고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리며 좋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그 뉴스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저렇게 기쁘고 좋은 것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검으로 돌아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그러나 육은 살았어도 언젠가는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이 살아야 합니다. 영이 사는 길은 내 육이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십자가의 믿음으로 살아날 때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아들이, 내 딸이 이제는 살았다며 기뻐 어쩔 줄을 모르시는 겁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나는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십자가의 그 믿음으로 심판에서 구원으로 옮겨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