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변주, 제국의 신화, 그리고 십자가의 대항-서사시]
안녕하세요. 지난 포스팅에서는 5세기 비잔틴 제국의 에우도키아 황후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시구들을 한 줄 한 줄 오려 붙여 예수의 복음서를 재구성한 놀라운 문학적 시도, '호메로스 패치워크 시(Homerocentones)'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전 글 보기] 5세기 비잔틴 황후가 호메로스를 오려 붙여 예수를 노래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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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도키아 황후의 작업은 당대 최고의 기득권 문화유산이었던 헬라 고전이라는 '그릇'을 기꺼이 빌려와 기독교 진리의 위대함을 선포한 고도의 문학적 퍼포먼스이자 창조적 번역의 길이었습니다.
오늘은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1세기의 성경 저자들이 직면했던 또 다른 거대한 문화적 그릇, 로마 제국의 제국주의 성경이었던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그것을 뒤엎은 마가복음의 역설적인 대항 서사를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1. 아이네이스: 호메로스를 재구성한 로마의 제국 신화
"트로이의 해안에서 이탈리아로 운명의 방랑을 떠난 사나이,
운명의 바다와 육지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후
마침내 새로운 제국의 기틀을 세웠도다."
—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1권 중에서
로마 제국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 70~B.C. 19)가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난 《아이네이스(Aeneid)》는 호메로스의 문학적 유산을 가장 완벽하게 재구성한 제국주의의 성경이었습니다. 기원전 1세기 말 출간되자마자 제국 전역을 사로잡은 총 12권의 이 거대한 서사시는 놀랍게도 정확히 절반으로 나뉩니다. 앞선 6권은 지중해를 헤매며 시련을 겪는 오디세우스의 방랑(《오디세이아》)을, 뒤의 6권은 이탈리아 땅에 도착해 혈전을 벌이는 아킬레우스의 전쟁(《일리아스》)을 고스란히 옮겨놓았습니다.
그러나 버질의 목적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귀향과 생존을 다루던 호메로스의 옛 이야기를 가져와, "로마 제국의 무력 정복과 세계 지배는 신들이 부여한 거룩한 사명(Pax Romana)"임을 정당화하는 '경합(Emulation)'을 벌인 것입니다. 1세기 지중해 세계에서 《아이네이스》는 목욕탕 벽서부터 학교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제국민 전체의 삶과 영혼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시대정신(Zeitgeist)이자 표준이었습니다.
2. 마가복음: 팍스 로마나를 뒤엎는 십자가의 대항-서사시
하지만 바로 이 시기, 1세기의 복음서 저자 마가는 로마 제국과 버질의 세계관을 향해 파격적인 문학적·신학적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데니스 맥도널드 교수가 미메시스 비평을 통해 입증하듯, 마가복음은 제국이 숭상하던 호메로스와 버질의 수사학적 틀을 기꺼이 빌려오되 그 내용물을 완벽히 전복시킨 '대항-서사시(Counter-Epic)'입니다. 군사적 무력으로 세상을 굴복시키고 자기 이름을 높이던 로마의 영웅(아이네아스)이나 황제 대신, 자기를 비워(Kenosis) 가장 약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제국적 세계관을 향해 단호하게 경고했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이 세상의 통치자들과 권세들, 그리고 어둠의 주관자들"은 단순히 영적인 존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정복과 지배, 자랑과 정욕을 최고의 가치로 위장하여 인간을 통제하던 로마 제국의 체제와 그 웅장한 신화였습니다. 복음서 저자들과 사도들은 팍스 로마나라는 제국의 거대한 가짜 구원관을 직시하고,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전복적 가치관으로 대항했던 것입니다.
3. 오늘 우리의 과제: 현대의 아이네이스를 직시하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역시 새로운 형태의 '버질의 아이네이스'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자본과 생산성으로만 환원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 무력과 패권으로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이념, 그리고 기술과 과학이 인간의 모든 고통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 과학만능주의가 이 시대의 새로운 제국 신화입니다.
1세기의 성경 저자들이 당대 제국의 거대한 문화적 그릇을 정직하게 직시하면서도 그 안의 세속적 가치관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뒤엎었듯, 오늘날 우리의 과제 역시 명확합니다.
현대의 과학, 포스트모더니즘, 대중문화라는 21세기의 호메로스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지적 담대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화적 언어를 통해 무한 경쟁과 자기 자랑으로 점철된 이 시대를 향해, 자기를 비우고(Kenosis) 형제를 섬기는(Agape) 십자가의 영원한 가치를 다시금 선포해야 합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청결한 지성과 영원을 붙드는 담대한 신앙,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거룩한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