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기 경 중국의 5대 10국 시대의 국가들 중 하나인 남한(南漢)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베트남의 첫번째 독립왕조인 오(吳 : 베트남어로는 응오) 왕조는 건국자 오권(吳權) 이래로
4대 왕인 남진왕(南晉王) 오창문(吳昌文)의 대에 이르러 왕족 및 외척들간의 내란으로 인하여
서서히 망조가 들기 시작합니다.
오(吳) 왕조의 건국자 전오왕(前吳王) 오권(吳權)
오 왕조가 건국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1차 백당강 전투에 관한 얘기이자
이 글의 이전 상황에 대해 적어놓은 글도 참고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
어느 나라에서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시나리오라 하겠지만 특히 베트남은 유독 왕실과 호족의 대결 구도로
여느 역대 베트남 왕조들을 불문하고 지속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찌보면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라 할 수 있는 오 왕조가 첫 시작을 끊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건국된지 30년 남짓되었을 무렵, 중앙에서의 왕실의 내분을 틈타 성장한 지방호족 세력들은 각지에서 할거해 있었고
오 왕조는 이러한 지방호족들의 폭주를 제어하는데에 실패하여 결국은 서기 965년, 12사군의 난이라는 사태로 이어지게 됩니다.
12사군의 난이란 965년부터 967년까지 약 2년여간의 기간에 걸쳐 각지의 12명의 유력 호족들이 난립하여 벌어진 전란기를 말하며
오 왕조를 몰락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이 12명이지 말그대로 유력한 호족들 12명만 지칭해서 12사군의 난이지 당시 할거한 호족들이
수십명이라 보는 이도 있습니다.
이렇듯 상당히 혼란한 시기였기에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베트남 판 전국시대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들 12명의 호족들에 대해서는 알 필요도 없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으실텐데요,
다만 최종적으로 12사군의 난을 평정한 이가 정부령(丁部領)이란 사람이란 것만 알아두시면 되겠습니다.
혹시 위 지도를 보시고 정부령도 난을 일으킨 12명의 호족들 중 하나로 여기실까 싶어 말씀드리지만
정부령은 난의 주역인 12호족들의 일원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화려(華閭 : 베트남어로는 호아르)라는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호족으로,
그의 가문은 공신가문으로서 대대로 환주(驩州 : 베트남어로는 호안 쩌우)의 자사(刺史)를 지내던 권세있는
집안이었으나 12호족들의 세력에는 미치지는 못하였는지 12호족들 중 진람이라는 이의 휘하에 들어가
장군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진람 휘하에서 점차 자신만의 세력을 모으며 점차 두각을 드러내던 정부령은 2년여에 걸쳐 차례로 12명의 호족들을 쓰러뜨렸고 서기 967년, 허수아비로 전락해있던 오 왕조의 5대 왕이자 마지막 군주인 오대왕(吳代王)
오창치(吳昌)의 투항을 받아들임으로서 오 왕조를 멸하고 12사군의 난을 평정하여 베트남을 통일합니다.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정부령은 수도를 기존에 오 왕조가 자리했던 고라(古螺), 즉 오늘날의 하노이에서 옮겨
가문이 위치했던 곳이자 자신의 세력기반이었던 화려(華閭)로 천도합니다.
자신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라(古螺)보다는 통치하기에는 홈그라운드인 화려가 더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왕위에 올라 정(丁) 왕조를 개창한 정부령은 국호를 이전에 중국의 한(漢) 왕조와 맞다이를 뜰만큼 강성했던
남월(南越)의 국호에서 따와 대구월(大瞿越)이라 정합니다.
베트남인들에게 있어서 자고로 '월(越 : 베트남어로는 비엣)' 이란 글자는 베트남의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는
남월제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르고 피가 끓어올라 그야말로 과거의 영광스럽던
시절을 되새기게 하는 상징적인 국호였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베트남 최대의 대외관계인 대 중국 외교에 대한 정부령의 향후 행보가 대강이나마 짐작이 가지요.
하지만 정부령은 무턱대고 자주독립 노선을 표방하여 중국을 자극하지는 않았습니다.
전대의 오 왕조에게 대패했다고는 하나 인접해있던 남한(南漢)은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요구해오는 건 적절하게 들어주면서 또 지킬건 지키자라는 식이었습니다.
10세기 무렵 중국의 5대 10국 시대 지도입니다. 아래에 남한이 위치해있는게 보이실겁니다.
정부령의 이러한 대 중국 외교태도는 이후 중국에서 5대 10국 시대를 종결지은 송(宋)이 들어서면서
외왕내제 형식으로 이어집니다.
천하도 통일했겠다, 베트남이나 건드려봐야겠다는 심보로 송은 정부령을 교지군왕(交趾君王)으로 책봉하면서
송에 귀속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전의 남한과 마찬가지로 최대한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던 정부령은 송의
책봉을 받아들이고 입공하며 더불어 3년간 송의 국경을 넘지 않겠다는 불가침 조약을 맺습니다.
하지만 내부로는 여전히 황제를 칭하고 있었고 바로 이 정부령의 정 왕조 시기에 베트남 역대 왕조들의 특징 중
하나인 외왕내제가 확립되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과거 남월의 조타가 한의 남월왕 책봉을 무시하고 칭제를 했던 것이 먼저이긴 하지만 말그대로 확립된 때는
정 왕조 시기입니다.
베트남을 통일하여 오 왕조에 이어 두번째 통일 왕조를 세운 정부령은 전대의 오 왕조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여러모로 노력했습니다.
오 왕조의 멸망원인을 약소한 중앙왕실과 강력한 법과 형벌의 부재에서 찾은 정부령은 지방의 호족들에 대한
견제책으로 일반 백성들을 임의로 징발해서 사병화 시키는 것을 금하고 행여나 있을 반역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강력하다 못해 가혹한 형벌들을 가미한 법들을 만들어냅니다.
기름 솥에다 산채로 넣어 튀긴다던지, 호랑이가 있는 철장에 던져버린다던지와 같은 형벌들로 반역죄를 다스리겠다는
엄포를 놓았던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서기 978년, 정부령은 세자 정련(丁璉)과의 권력 다툼 도중에 암살당합니다.
그토록 오 왕조 꼴만은 안당하려고 애썼던 정부령이지만 정작 오 왕조가 왕실 내부의 내란으로 멸망한 것을 잊기라도
한듯 말이지요.
차기 황제는 정부령의 차남 정선(丁璿)이 되었지만 겨우 다섯살배기 어린아이였던지라 생모인 양(楊) 태후가 수렴
청정을 하게 됩니다.
신제(新帝) 정선(丁璿)
생모 양태후
어린 황제가 즉위하니 어수선해진 정국을 틈타 자연스레 권신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여환(黎桓 : 베트남어로는 레 호안)이란 이로, 선대 정부령의 대에 중용되어 정선의 치세기에는
군권을 장악한 실력가였습니다.
그리고 양 태후는 여환과 결탁하여 공동으로 섭정통치를 함으로서 여환의 지위는 한층 더 높아지니
사실상 정 왕조의 실권은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여환(黎桓)
이렇듯 여환에 의한 제위찬탈이 거의 확실시 되어가던 즈음에 그 기회는 뜻밖에도 외부로부터 찾아옵니다.
정부령 사후 어린 황제가 즉위한 베트남의 정황을 지켜보던 중국의 송나라가 이를 틈타 침공해왔던 것이지요.
그러자 황태후 양씨는 참으로 뜻밖에도 자신의 아들 정선 더러 여환에게 황위를 양도하고 유능한 여환의 지휘
하에 송의 침입을 막을 것을 요구합니다.
국난을 맞아 피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아들을 내쫓으리만큼 비정한 선택을 했으리라고도 볼 수도 있겠지만
떠도는 얘기로는 여환과 양 태후가 남 모르게 그렇고 그런 불륜의 관계라 그랬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후 여환이 황위에 즉위한 후 양 태후는 여환의 황후가 되었으니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무방하지 싶네요. 아무튼 여환은 송군의 침입에 능숙하게 대처하여 송군을 격퇴했고 이 공으로 서기 980년, 신하들의 주청을 받아
공식적으로 황위에 오르니 이것이 곧 여(黎 : 베트남 어로는 레 왕조) 왕조의 시작입니다.
훗날 15세기 무렵에 여리(黎利)에 의해 세워진 여(黎) 왕조의 구별을 위하여 여환의 여 왕조는 전(前) 여 왕조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전(前) 여 왕조도 얼마 못가 서기 1010년, 태조 여환이 그랬던 것처럼 이공온(李公蘊)이라는 권신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이공온의 이(李) 왕조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동네 이야기도 재밌네요.
베트남판 전국시대 이야기도 누가 멋지게 이야기로 풀어내면 좋은 역사소설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배트남도 우리나라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국의 침략을 많이 겪었죠
세계사를 배워봐도 별게 없는 동네들이 많지요....
세계사 배우면서 느낌이, 서양 교과서와 서양 사관(로마 및 유럽 중심) + 동아시아사 정도인 느낌이었어요
4대 문명이라고들 부르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황하 네 문명 얘기하다가 갑자기 고대 그리스로 넘어가니까요....
메소포타미아와 인도쪽 중동, 남아시아사도 전혀 모르겠고, 인도는 한참 가만히 있다가 왕조 바뀔때 한번,
영국한테 식민지 배될때 한번 나오더군요
동남아, 티벳, 아메리카에는 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겠고 아프리카 역사는 이집트 이후로 역사가 없는
느낌이었어요
이렇게 모른다는걸 안 것도 문명하다가 아시리아, 송가이, 에티오피아, 마야, 잉카, 아즈텍, 쇼숀, 이로쿼이,
시암 같은 잘 안 다뤄지던 문명들을 만나면서였죠...
송꼬이·메콩강 따라 흐르는 베트남의 역사
[新베트남 기행] (상) 송꼬이·메콩강 따라 흐르는 베트남의 역사
하노이 사회주의·호찌민시 자본주의, 문화의 이름으로 통하다
“여행에서의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을 얻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열대 베트남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갖고 싶어 하는 각 분야의 전문가 25명이 지난 3월부터 여행을 준비했다. 3개월간의 준비를 거쳐 지난 7월 말부터 7일간 수도 하노이를 비롯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할롱베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에와 호이안을 거쳐 한때 사이공이라고 불렸던 호찌민시를 방문했다. 열대학, 해양학, 역사학, 영문학 등 서로 다른 학문 전공자들이 모여 서로 다른 관점으로 색다른 융합을 시도했던 베트남 여행기를 2회에 걸쳐 싣는다.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 내리니 날씨부터 다르다. 예상은 어느 정도 했지만 몹시 후덥지근하다. 영화 ‘굿모닝 베트남’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미군 방송 DJ로 처음 부임한 로빈 윌리엄스가 사이공 날씨가 어제나 오늘이나 같다고 말했다가 정훈장교로부터 꾸중을 듣는다. 온대지방에서 처음 온 사람들에게는 똑같이 무덥겠지만, 오랫동안 살아왔던 베트남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노이 지역에서 제일 큰 송꼬이 강을 건너서 역사박물관을 찾아가니 흥미로운 지도가 눈에 들어온다.
베트남을 이루는 54개 종족이 지리적으로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영향을 받아서 다종족, 다문화 사회가 오랜 역사를 통해 이루어져 왔다.
베트남 사람의 신분증 뒷면을 보면 종족 이름과 종교가 표기되어 있는 이유다. 중국에서 한족(漢族)이 다수라면,
여기에서는 비엣(Viet)족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베트남에는 메콩강을 비롯해 무려 2000여개의 강이 흐른다. 농경사회에서 치수사업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하노이의 수상인형극장을 찾아갔다. 추수가 끝나고 농민들이 연못이나 호수에서 보여준 공연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형극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유럽에서도 공연을 했고 지난 인천세계도시축전 때도 이 인형극이 공연된 적이 있을
정도로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노이를 떠나기 전 공자 문묘를 방문했다. 베트남은 약 1000년 동안 중국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가족·사회·국가
관계에서 유교문화가 무시할 수 없는 가치체계로 남아 있다. 공자 문묘는 베트남 사람들이 중국의 유교적 가치와
동남아시의 삶을 어떻게 결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베트남 중부 도시 후에. 도시를 흐르는 후에 강의 자연생태적 풍경은 파리 센강의 문명적 경관보다 더욱 정답게 느껴진다.
후에 관광의 절정은 배를 타고 몇몇 황제릉을 감상하는 데 있다. 참파 문명의 흔적을 지워 버리고 19세기 초 응우엔
왕조가 베트남을 통일하고 후에를 수도로 정했다. 왕조의 전성기였던 민망 황제릉과 프랑스에 나라를 내준 마지막
황제인 카이딘 릉을 서로 비교해 보면서 어느 왕조나 국가도 절정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사실에 숙연해진다.
베트남의 모든 화폐의 앞면에는 호찌민이 등장한다. 예외가 없다. 반면 뒷면은 각양각색이다. 제일 큰 화폐인 50만동
에는 호찌민이 살았던 생가가 나와 있다. 베트남 사람들이 호찌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다. 호찌민에 관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프랑스의 국민 자동차를 대표하는 푸조가 신형 자동차를 생산했을 때, 프랑스 정부는 호찌민을
회유하기 위해 흰색 푸조를 선물했다. 하지만, 호찌민은 당시로선 매우 비싸고 멋졌던 이 차를 한 번도 타지 않았다.
그 원형이 호찌민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가 얼마나 물욕을 멀리했는지 알 수 있다.
중국에서 백범 김구와도 만났다고 전해지니 독립운동을 하던 두 사람으로선 동병상련이었으리라. 베트남에서 그는
‘호 아저씨’로 불린다. 한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희생했던 그의 삶이 바로 현대 베트남의 역사이다.
화폐 1만동에는 베트남이 자랑하는 유전 시설이 그려져 있다. 2만동 화폐의 뒷면에는 호이안에 있는 ‘일본 다리’가
나와 있다. 다리를 걷는 데 10초나 걸릴까. 이렇게 작은 다리가 왜 베트남 화폐에 나와 있을까. 이를 알려면 18세기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해양 실크로드를 알 필요가 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인도를 거쳐 동남아시아에서
중국 및 일본과 무역 교류를 했다.
당시 은(銀)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던 일본의 상선들은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베트남의 호이안에 정박했다.
이 다리는 일본인들이 당시 체류하던 마을에 건조한 것이다. 그 다리가 화폐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의 문화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 기업들은 베트남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에서 경제 활동뿐 아니라, 이 지역의 문화 창달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 중에도 최근에 베트남에 기부를 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데, 일본의 경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3년 만에 다시 찾은 호찌민 시내를 걸어본다. 시내 곳곳의 오토바이 물결은 여전히 장관이다. 마주치는 젊은 여성과
남성들이 무엇보다도 체격이 훨씬 커져 있었고 얼굴들이 명랑하기만 하다. 그만큼 살기가 편해졌다는 것이리라.
베트남은 통일된 지 35년밖에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노이의 사회주의적인 문화와 남부 호찌민 시의 자본주의적
문화가 조화롭게 통합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비행기로 2시간 이내에 하노이에서는 중국의 거의 모든 도시들을, 호찌민 시에서는 열대 자원이 풍부한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나라들을 갈 수 있다. 이렇게 뛰어난 지정학적 조건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베트남의 미래가 달려
있을 것이다. 베트남이 갑자기 크게 다가오는 것은 나만의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베트남 역사 중대의 독립왕조들
중대니 중세니 하는 부분의 역사는 비슷한 내용의 반복이다. 여러 호족들 중에 어떤 유력자가 등장해서 왕조가
세워지고 외침을 받고 생존하고 다른 지역 유력자가 또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하는 것이 반복된다.
여러 왕조가 등장하기는 하는데 왕조가 바뀐다고 해서 베트남의 구성원들이 확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 안에서
그들끼리의 싸움의 반복이기 때문에 지금 현대에 큰 영향을 미친 부분을 찾는 것도 좀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사실상 당시 베트남을 말하는 다이비엣의 영역은 지금의 베트남의 영역과 조금 달랐다.
어째서 지금에 왔는지 지금 모습이 되었는지를 찾아 보는 것이 역사를 살펴보려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일테니
그런 부분에서 보면 이 중대라고 하는 시대의 그 수많은 왕조의 변화들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히 기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전에 말했듯이 베트남은 '자주성'에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 스스로는 이 중대의
왕조들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교육하고 있는 것 같다.
대강의 연표
응오왕조 938-944
딩왕조 968-980
전레왕조 981-1009
리왕조 1010-1225
쩐왕조 1225-1400
호 왕조 1400-1406
후레왕조 1428-1788
남북조 시대 막 왕조 1527-1572 남조(부흥 레) 1543-1788
떠이썬 왕조 1788-1802
응우옌 왕조 1802-1945
대충 보면 10세기 초부터 19세기 초까지 900년이 지나가는 동안 9개 왕조가 등장한다. 같은 기간 이곳 한반도에서는
딱 두개의 왕조가 존재했고 그 왕조의 지방 장악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그 영토라고 하는 면에서
우리는 변동이 굉장히 적은 편인데 베트남은 이 부분이 많이 다르다.
북부 지역의 일부는 중국의 영토가 되었고 남부의 참파의 영토는 조금씩 잠식해 갔다.
그러니까 이 부분도 어느날 강력한 군사력으로 합병의 형태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점진적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런 부분이 어찌보면 과거 왕조와 연속성이니 통일성을 놓고 이야기 할때 약점이 될 수도 있을것 같다.
많은 왕조들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통치하다 사라졌고 해서 복잡하면서도 비슷한 왕위 변동의 이야기가 반복된다.
여러 나라의 역사들을 살펴 보면 이런 경우를 많이 찾게 되는데 대체 이 부분들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좀 하게 된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을때 그에 저항하거나 편승하거나 하는 기로에 서 있을때 정말 보편적인 정의니 대의니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최종적으로 승리한 쪽이 정의가 되고 그들이 역사를 쓰면서 반대편을 처절하게 비하하고 그것을 교육받은 사람들은
반대자를 욕하는 것을 애국이라 생각하고 의문을 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왕조 변화가 많았던 베트남은 이 부분이 한국보다 많았고 보다 많이 아팠을 것 같다.
응오 꾸엔(吳權)[Ng? Quy?n]은 베트남에서는 최초의 왕조를 세운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 받는다. 일부러 베트남
알파벳을 찾아서 올렸는데 저 내용으로 구글에서 찾아면 꽤 많은 베트남어 자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선떠이 성의
푸토(phu tho) 출신이라는데 사당도 있고 민속화도 꽤 발견할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이고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바익 당(白藤)강 전투이다.
이 곳은 베트남 최고 명승지로 꼽히고 있고 대월사기전서에서는 이 응오왕의 건국이 최초의 독립 왕조라고 이야기
한다고 하는데 송정남의 베트남 역사 읽기에 따르면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 응오왕조가 아니라 바로 뒤의 딩(丁)
왕조 최초의 독립왕조라고 본다고 한다.
저게 바익 당 강 전투 무슨 그림들인데 대강 설명을 하자면...
왕위 계승에 관한 복잡한 이야기다. 아마 정치적인 배경도 겹쳤을 것이다. 당의 지배를 받았던 이 짜오 지 지역은
뒷날 당이 분열하자 독립화 한다. 북부는 약간 중국이때에 남쪽에 세워진 남한(南漢:중국의 왕조)의 세를 등에
업었던 사람이 정권을 잡고 이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있었다.
이에 원한을 갖은 응오꾸엔이 그를 죽이고 정권을 잡으니 남한에서는 세를 보여주기 위해 공격을 했고 이에
응오 꾸엔은 물러나지 않고 바익 당강 하류에 말뚝을 박아 놓고 그들의 배를 유인한 후에 썰물때 물이 빠져서 배가
옴짝 달싹 못하게 되자 보트로 건초같은 것들을 불을 붙여 보내서 대첩을 거뒀다 뭐 그런 이야기다.
응오 꾸엔은 이 전투의 승리 이후 중국과 독립적인 왕조를 꾸리는데 이것이 응오 왕조이다. 헌데 그 체제정비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니고 지방에 수많은 세력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남한의 공격에 능력있는 군벌 밑으로 일시적으로
모인 것 뿐이라 응오 꾸엔이 6년뒤 죽자 바로 탈이 난다.
어린 왕자에게 왕위가 세습되지 않고 처남인 즈엉 땀 카(楊三軻)가 잠깐 정권을 빼앗는데 이때도 베트남의 그 모계
중심 흔적을 알 수 있다. 장남은 도망가서 다른 지역에 몸을 의탁하고 차남은 즈엉땀카의 필요에 의해서 대외적으로
내세워지는데 왜그랬는지 이해가 안가는데 지방에서 난 반란을 이 차남에게 해결하라고 군대 줘서 보냈다가 이 군대
이용해서 응오씨가 다시 즈엉 땀 카를 죽이고 정권을 잡는다
차남의 이름은 응오 쓰엉 반(吳昌文) 형은 응오 쓰엉 응업이었는데 어쨌거나 이들은 분열되는 나라를 수습 못하고
이른바 12사군의 난이라는 각지의 호족들이 난립하는 시대를 맞는다. 12사군은 각지의 여러 호족중 세력이 큰 것만
추린 것이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세력들이 난립했다.
이를 통일 하는 것이 딩 보린이다. 그는 지금의 응에 안 지역의 차사였던 딩 꽁쯔의 아들로 딩보린의 통일 시기는
968년으로 나오기도 하고 일설에는 966년이라고 한다고도 하는데 그는 타이 빈 이라는 연호를 제정하고 국명은
다이 꼬 비엣(大瞿越)으로 했는데 이 왕조의 이름은 11세기에 다이비엣으로 바뀐다.
이 시대에 태어났으면 정말로 줄서기 복잡했을 것이다. 종래의 질서는 중화에 기대는 사람들이 기득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 응오 꾸엔이 갑자기 세를 얻은 거였고 그것도 군사정권이었으니 절개를 지키려면 목숨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를 따라 응오씨에게 충성을 바쳤다면 즈엉씨가 집권할때 위험했을 것이고 이쪽으로 몸을 옮겼다고 해도 응오씨가
바로 다시 돌아와 위험했을 것이고 그 응오씨도 결국에는 호족중 하나로 전락한 후에 그 수많은 난립한 세력중에서
딩씨가 집권하는 것이니 충신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고 좋은 소리 듣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통일을 이룬 되는 딩보린도 그렇게 매력적이거나 대단한 대의를 위했던 사람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보통 혼란의 시대에 사람들이 바라는 영웅이란 혼란을 잠식시켜 줄 사람이며 그 혼란이 전란이라면 무자비한 방법
으로 상대를 잡아 족치는 사람이 되게 마련이다.
그 시대에 대한 묘사를 보면 딩보린은 궐 뜰에 호랑이 우리를 만들어 놓고 죄인들을 이 안에 집어 던지고 가마솥에
넣어 끓이는 등의 공포정치를 통해 권위를 세웠다고 한다. 딩씨도 오래가지 못했다. 왕위 계승과 관련한 혼란탓에
딩보린도 암살당하고 말고 왕위는 결국 6살짜리에게 넘어간다. 이 때에 송이 침입해 오자 신하들은 레 호완 장군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으로 결의하고 선양을 받아 최종적으로 레 왕조가 설립되는 것이다.
이 지도는 어디서 퍼왔는지 모르겠다. 꽤 오래전에 어디 카페인지 하는 곳에서 캡쳐를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난다.
지명이 너무 정리 잘 되어 있어 그냥 놔두기 아까워 올린다.
지도를 보자면 중간에 빨간 글씨가 보일 것이다. 인드라푸라, 비자야, 카우타라, 판두랑가. 이 도시들은 참파의 중심
도시들이다. 참파가 인도 계열의 문화를 갖고 있어 인도의 지명들을 가져왔고 이 지역들은 어느정도 정치적으로
독립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인드라푸라는 인드라의 도시라는 뜻으로 아마라바티가 인드라푸라다.
각 지가 색깔이 다른 것은 복속되는 시기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이비엣의 영역은 다이꼬비엣이라고 했던 시대부터
이후 밝은 노란색 지역을 병합하고 뒷날 참파를 흡수하면서 밑으로 계속 내려오며 커진다.
지도 윗부분 진한 노란색 중간에 phu tho가 있다. 응오 꾸엔의 출신지고 아래 Nghe An이 딩씨의 세력지이다.
북부지역은 친 중국 성향이 강했고 남부지역은 독립경향이 강했는데 남부지역의 세력이 결국에는 승리를 했던 것이다.
딩보린의 통일 사업때 장남 딩 리엔의 역할이 컸다. 아비 대신 볼모로 잡히기도 하면서 고생을 했는데 세자로는
어린 세째 딩 항랑이 책봉되자 열받은 딩 리엔은 동생을 죽여버린다. 이듬해 왕 딩보린과 세자 딩리엔을 도틱이란
자가 암살하고 왕위에 앉았다가 응우옌 박이 도틱을 죽이고 딩씨 왕조를 부활시키는데 살아남은 딩또안은 당시
6세였다.
그 해인 980년에 송나라가 침략을 해 오자 신하들끼리 회의에 의해서 장군 레 호완에게 왕위를 양위하자고 하고
새 왕조가 열리니 이것이 레 왕조다. 레 왕조는 뒤에 한번 더 열려서 먼저 열린 레 왕조를 전레 왕조라고 한다.
송과의 전쟁은 처음에는 불리하게 전개 되었다. 이에 거짓으로 항복해서 안으로 꾀어 들인 다음에 지휘관을 암살
하고 군대가 물러가자 이어 바로 조공사를 보내겠다고 하면서 정리를 했다. 송의 침입 한해 전인 979년에 남쪽의
참파가 침략했다가 별 소득 없이 물러난 일이 있었는데 송이 물러가고 정비가 되자 다이꼬비엣은 982년 참파에
대한 보복 전쟁에 들어가서 이들의 수도인 아마라바티(인드라푸라)를 점령하고 약탈한 후에 다시 돌아온다.
레 호완이라는 장군은 그 종래의 만들어 졌던 군사적인 기반을 잘 이용했던 것 같다.
재위도 24년동안으로 길었고 이 와중에 계속 동남아로 세력을 조금씩 넓혀서 1000년 참파의 중심도시중에 하나인
아마라바티를 차지한다. 이 참파는 좀 도시 국가 연합체의 성격이 강했던 것 같다. 인도계인지 말레이계인지
일단 민족의 구성은 말레이계라고 나와있는 참족의 집단이라고 하는데 문화는 인도의 색깔이 강하다. 도시의
이름들은 주로 인도의 도시에서 따오고 미술품과 조각품에서도 이 색깔이 여실히 드러난다. 참족은 뒤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한때는 다이비엣을 위협할 때도 있었으나 결국 흡수되고 만다.
레 왕조 역시도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역시 세자 책봉에 탈이 나서 몸살 좀 앓다가 롱딩이 즉위 하는데
이 사람은 사람을 고문하는 것과 죽이는 것을 재미로 삼았다는 사람으로 승려들에 대해서도 함부로 대하다가
반감을 크게 사다가 1009년 죽었다. 이 사람의 사인은 성병과 치질일 것으로 추정한다.
왕위는 아들에게 계승 되지도 않았고 리꽁원이라는 사람이 계승한다. 하필이면 중국에 정말 많은 리 씨인데
이 사람은 유교사상을 도입하고 관직 체제를 체계화 한다. 약간 나라 성격이 고려와 비슷하다. 국체는 유교적인
성격을 갖고 사회는 불교적인 색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과거제도도 실시했다고 하는데
아직은 그렇게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첫 시행은 1075 두번째는 1077 세번째는 1086 네번째는 1152년.
그러니까 부정기 적이고 뭔 특별한 사안처럼 실시한 것이지 이것이 관직의 등용문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과거를 볼 수 있는 사람도 굉장히 제한적이라 관료제 국가라기보다는 신분제 고대국가의 형태를 벗어
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도 리 왕조 들어서면 좀 숨 좀 돌리겠다. 그 전까지는 왕조라고 해 봐야 몇 대 넘어가지도 않고 그나마도 안을
들여다 보면 신하들의 반란 왕자들의 반란만 계속되었는데 리 왕조는 그래도 200년이나 존속한다.
그리고 이 와중에 관제나 이런 부분에서 송나라의 여러 제도를 모방하는데 앞으로 이 리 왕조 외에 계속 이어지는
왕조에서도 무슨 왕 이름에 타인 똥이니 하면서 무슨 똥 똥 어쩌고 하는 부분이 많이 나올것이다.
여기서 똥은 한자로 치면 宗이 되고 우리나라 무슨 태종 세종과 같은 것이다. 같은 예로 무슨 또 이렇게 끝나면
조를 의미한다. 세조 영조 처럼 말이다. 사실 이 중국에서 송나라라고 하는 때는 송에서 엄청나게 많은 문화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을 때였고 워낙 물자가 풍부해서 다른 곳을 점령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지도 않았던 시기라
이 시대에 송 근처에 있던 여러 나라들이 한꺼번에 전성기를 맞았다.
동남아의 경우 다이 비엣뿐 아니라 구석에서 크메르가 한창 앙코르와트를 건설해 가면서 위용을 떨쳤고 슬슬
타이족이 집단을 이뤄가던 시기였다. 태국의 역사의 시작이라는 수코타이는 13세기 초에 시작하니 이보다 약간
늦는다.
그래서 태국 빼고 동남아의 큰 정치세력이라면 참파와 크메르의 앙코르 세력이 다이비엣에 인접하게 된다.
리 왕조 초기에는 내부 반란으로 일부가 독립해 나가기도 하고 송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참파를 압박해 계속
해서 영역이 늘어나기도 했다. 그러니까 평온과는 거리가 먼 굉장히 변화가 많은 시대였다. 아니 계속된 전쟁의
시기였다고 보는게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리고 이 송 대에는 그 조공-책봉의 관계가 좀 느슨해서 주변 사방의 많은 나라가 그 왕이라는 단어보다 황제
라는 단어가 더 좋다면서 황제를 칭하는 일이 많았는데 더러 책봉 받는 나라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어
이것을 대체 뭐라고 부르는게 옳은지 잘 모르겠다. 베트남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삼을 때도 계속 황제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렇게 큰 의미는 없는 것 같다.
리 왕조의 초기 타이족 계통인 눙씨가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가 1038년이니 왕조 초기인데 대충 내용을
보면 눙씨의 추장을 탕조주의 수령으로 앉히고 그 동생을 그 옆 주 수령으로 앉히고 추장의 아내의 동생을 또
인근 지역 수령으로 앉혔는데 그러니까 좀 약한 의미의 독립된 호족쯤 되는 세력이었던 듯 싶다.
이들은 다이비엣과 송 양쪽에 금을 캐서 바쳐야 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대장인 눙똔뿍과
그 큰아들 눙찌퉁을 사로잡고 계속 압박해 결국 둘째아들도 잡는데 다이비엣의 황제는 대장과 장남을 죽인 와중에
둘째아들까지 죽여서 대를 끊기가 뭐 했는지 살려준다. 이 때는 리 왕조의 타이똥 그러니까 태종이 집권할 때다.
이후 1043년 남쪽 참파와 싸움이 벌어지는데 이런 혼란을 틈타서 살아남은 눙씨의 둘째 아들인 눙찌까오가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를 해서는 까오 방의 서쪽지방에서 1049년에 반란을 일으키고 다이비엣의 통제력을 벗어났다.
다이비엣은 반란 진압에 실패했고 이들은 새로 다이난(大南)이라는 나라를 세워 독립하고는 송에게 책봉을
해달라고 했는데 송은 다이비엣과의 우호탓에 이를 주저했고 이에 이들은 송의 남부 8주를 유린한다.
당시 요와 서하와 전쟁중이던 송은 처음에는 제대로 반격을 못해서 조정에서는 인정하자는 말까지 나왔다가
유명한 적청이(잘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송대의 유명한 장군이다) 나서서 결국 이 다이난을 정벌해 버린다.
송의 군세에 눌려 망하게 되자 다이난은 다이비엣에게 송이 몰려와서 좋을 것 없다고 도와달라고 하는데
다이비엣의 군세마저 송에게 박살나자 눙 찌까오는 대리국으로 몸을 피한다.
대리국은 송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이를 결박하여 1055년 송에게 보내어 사태는 일단락 되고 과거 다이난의 영토
였던 지역은 다이비엣과 송이 양분하게 된다. 이후 이 지역의 눙씨가 다시 불만의 움직임을 보이자 송에서 이들을
회유해 이 눙씨들의 터전은 1062년 송나라로 귀속하게 된다.
이런 송의 압박은 남쪽의 참파에게 큰 동기가 되어서 1061년 참파는 다이비엣에 조공을 거절하고 또다시 싸움이
벌어지는데 다이비엣은 1069년 리 트엉 끼엣이 5만의 군세를 동원해서 왕을 사로 잡고 비자야를 점령하고는 살려
주는 대가로 3개주를 할양받는 등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이어 년똥이 어린나이에 즉위하게 되자 송에서는 슬슬 다이비엣을 공격하자는 말이 나오고 옹주 흠주 염주의 3개
주에 군대를 증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리트엉끼엣에게 명해서 먼저 이 3개 주를 선제공격 해 버린다.
이에 놀란 송은 결국 다이비엣에 군대를 보내 전쟁이 벌어지는데 장기전이 되고 서로 피곤해 졌다는데 다이비엣에
좀 밀렸던 모양이다. 다이비엣은 위에 북방의 5개주를 할양해 주기로 약속을 하고 철군을 종용했다.
송의 군대가 철군하자마자 다이비엣은 바로 3개주를 되찾고 몇 해 뒤에 송과 협상을 해서 나머지 2개주도 홍의
옹주 흠주 염주를 공격하며 납치해간 사람들을 귀환시키는 조건으로 다시 돌려 받는다. 송과의 싸움은 대강 이렇게
해서 끝이 나고 이후에는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었고 12세기 들어서는 초기에 앙코르 세력과 전쟁이 있었는데
공격하는 쪽이 앙코르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아 앙코르가 보다 강했나 싶기도 한데 다이비엣은 결국 그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뭐 다 그렇듯이 왕조 말이 되면 정권은 어지러워지고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1209년 팜주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팜빙지라는 사람이 진압하는데 이에 팜주가 조정에 뇌물을 뿌려 도리어
팜빙지가 투옥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팜빙지는 꽈익 복이라는 지방 호족의 부하였고 이에 꽈익 복은 화가 나서
군사를 이끌고 팜빙지를 구하러 다이비엣의 조정으로 쳐 들어간다. 황제는 팜빙지를 죽여버리고 도망을 치는데
이 와중에 태자 쌈이 몸을 피한 곳은 쩐씨들이 힘을 쓰는 곳이었고 쌈은 쩐씨의 딸과 결혼을 한다. 이후 안정이
되고 돌아온 후에 황제는 일년만에 죽고 쌈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후에똥이다.
후에똥은 뒷날 쩐씨를 의심했던지 도안씨와 응우옌 씨의 세력을 조정에 불러들여 혼란이 일어나는데
이 혼란은 1221년 후에 똥이 쩐씨를 수용하면서 일단락 되고 조정의 주요 자리는 쩐씨들이 골고루 나눠먹는
시대가 도래해 버린다. 후에똥은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었는데 큰딸은 황후의 오빠인 쩐트어에게 출가했고
작은딸은 아직 어렸는데 1224년 후에 똥은 제위를 당시 7살이었던 어린 딸에게 맡기고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병세를 치유하기 위해 절에 기거한다.
우리나라 나이로 치면 8세. 이제 막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이긴 할텐데 이 나이 여자애가 직접 정사를 볼 수는
없어서 황후와 외척들이 완전히 정권을 잡고 황후의 사촌동생 쩐 투도는 제위를 뺏기 위해 조정 대신들의 자녀를
조정에 숙위하게 하고 일을 시키고 8살짜리 전트어의 아들을 여왕과 공놀이를 하게 한 다음 무슨 베트남 풍속중에
처녀가 맘에 드는 총각에게 물건 던져 청혼하는게 있다는데 여기에 끼워맞춰 여왕이 청혼한거네 하면서 둘을
결혼시키고는 1225년 1월 제위를 남편에게 선양하게 했다. 약간 헷갈릴텐데 그러니까 쩐 트어는 그 여왕의
어머니의 오빠니까 두 사람은 사촌 관계였다.
어쨌든 이 일을 마친 후 쩐 투도는 당시 진교사에 있던 후에 똥과 그 밖의 수많은 리 왕조의 왕족들을 도륙을
내 버리고 살아남은 지방의 리 왕족들은 응우옌씨로 강제 개명을 시켰다.
도륙을 피해서 배를타고 탈출을 한 리씨가 있었다고 전한다. 한자로 李龍祥 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고려로 흘러
들어왔고 이를 측은히 여긴 고종은 이 사람의 정착을 도와 이 사람이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베트남이나 고려의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화산이씨 족보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일전에 우리가
베트남과 수교를 할때 베트남에서는 이 화산이씨 종친회를 굉장히 환대하고 베트남인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약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쩐씨 왕조가 시작된다.
베트남인들은 이 쩐씨 왕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왜냐면 이때 몽골의 침입이 있었고 베트남의
역사 교육과 사람들에게 심어주려고 하는 가장 강력한 가치관이 외세배격이기 때문에 베트남은 자신들이 몽골의
대규모 침략을 결국 이겨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살펴보자면 쩐 왕조는 이전 왕조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조직화 되었다. 과거제도 활성화 되고 봉록이니 고과제도도
제대로 자리잡고 2만의 금위군과 그 외의 지방군들도 갖추고 있었고 이 조직들이 뒷날 몽골과의 전쟁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몽골의 1차 침입은 1257년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쳐 들어 왔는데 당시 쩐 왕조는 도성을 비우고 도망을 가야 했다.
헌데 다이비엣의 청야전술에 말려서 물자부족탓에 몽골군은 후퇴해야 했고 이후에 쩐 왕조는 다시 전쟁을 준비한다.
2차 침입은 남송의 원정이 끝난 이후에 일어났다.
몽골의 요구는 참파를 점령하게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고 다이비엣은 이를 거절하자 쿠빌라이는 아들 도곤에게
명해서 50만의 병력을 조직해 다이비엣을 공격하는데 몇몇 왕후들은 기세에 눌려 항복하기도 했고 당시 쩐 왕조의
왕도 항복을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것으로 보아 많이 밀렸던 모양이다. 헌데 이번에도 제대로 물자보급을 받지
못하고 몽골은 물러가고 말았다.
이어 자존심이 상한 몽골은 1287년 30만의 군대를 몰고 내려오고 다시 17만석의 쌀을 500여척의 배에 싣고 남쪽
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과거 응오왕의 유명한 명승지인 바익 당강에 이르러 썰물때 강 하류에 박아 놓은 말뚝에
배가 잡히고 이어 화공에 당하고 매복에 당하고 하여 500여척은 전멸하고 적장 오마니는 사로잡히고 남은 몽골군은
총 퇴각해 버리는 대승을 거두고 나라를 지켜 낸다.
이 바익 당 강의 전투는 베트남에서 너무 유명하고 이 하구에 박아 놓았다는 말뚝은 지금 여러개 발견된 일도 있다고
하는데 글세 바닥에 일부러 박아 놓는 어려운 공사를 할까 싶기도 하다. 그냥 큰 돌들을 옮겨 놓는 것이 보다 효율적
일것 같기도 하고 찾아보니 이 바익당강이 상당히 크다.
하구 폭이 900m 정도 되던데 아무래도 이쪽보다는 보다 상류쪽일거라는 생각도 좀 든다. 어쨌거나 이 유명한 싸움
으로 몽골과의 전쟁은 끝나는데 이후에는 참파의 공세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이 쩐 왕조도 리 왕조
처럼 쇠퇴하는 시기가 오고 만다.
14세기 말 쩐 왕조가 완연히 쇠퇴했을 무렵에 호뀌리가 등장한다. 당시는 중국의 정세는 1368년 명이 건국이 되고
원이 북으로 물러간 상황이었고 남쪽의 참파는 계속 공격을 해 오던 참이었는데 호뀌리는 년똥(藝宗)의 외척으로
높은 자리에 올랐던 인물로 참파의 공격을 막아 내어 실권을 잡았다.
1388년 새 황제로 (順宗)을 옹립했고 1397년에 수도를 천도하는 등의 변화를 꾀했다. 이 즈음부터 1406년까지 조세를
개혁하고 베트남 최초의 화폐를 만들고 베트남 고유 문자인 쯔놈을 이용한 문학을 장려하고 하는 등의 여러가지
노력을 펼치는데 이 와중에 1400년에 황제를 폐하고 자기가 황제가 되고 나라 이름을 다이 응우로 개칭하고 얼마후
제위를 큰아들에게 물려주고 자기는 태상황이 되는 등의 일이 있었다.
헌데 얼마 못가 폐위된 쩐씨의 후손이 명으로 가서 정벌을 종용하고 명에 하필이면 영락제가 즉위하는 등의 악재
탓에 결국 전쟁이 벌어졌고 호씨 왕조는 1406년에 호뀌리와 호뀌리의 장남이 사형을 당하면서 막을 내렸다.
원래 후계자가 없으면 평이 좀 박하기 마련이다. 베트남에서도 이 호뀌리에 대해서 안좋게 그리는 모양이다.
이어 후레왕조가 시작되는 1428년까지 20여년간을 명의 식민시대라고 부른다. 이 20년간의 이야기도 외세에 대한
저항 어쩌고 해서 자부심이 상당 하다고 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에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