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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가져야 할 믿음인데 내용물이 독인 경우>의 줄거리 :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믿음인데 그 믿음의 내용물은 내 마음에 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생선 중에 복어는 그 살은 먹되 그 안에 들어 있는 복어알은 먹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알려오실 때 우리는 그 뜻과 계획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뜻과 계획이 실현되어 나타날 구체적인 내용은 반드시 내 마음에서는 버려야 합니다. 알려오신 뜻을 이루실 것은 믿되, 그렇게 이루어질 실제 내용은 마음에서 버리라 하십니다.
가져야 할 믿음인데 내용물이 독인 경우
(창세기 20:1~18)
1.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2.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4.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8. 아비멜렉이 그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10.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11.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3.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14.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15.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16.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18.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오늘 본문도 왜 이런 일이 또 일어났는지 참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1~18절까지 같이 읽을 때 아무쪼록 본문에 담겨있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곧 믿음을 가진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20여 년 전에 애굽의 왕 바로에게 아내를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사건은 틀은 비슷하지만 담겨있는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러한 본문의 말씀 중심으로 ‘가져야 할 믿음인데 내용물이 독인 경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가져야 될 믿음인데 그 내용은 독인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은 가지되 믿음의 내용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믿음 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우에 대해 들어보았거나 이야기해 본 적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비유적으로 말해보자면 이런 경우입니다. 복어는 매운탕이나 복지리로 널려 알려져 있고 마니아들은 회도 즐깁니다. 그런데 복어는 먹어도 그 안에 있는 알은 독성 때문에 버려야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제가 어린 시절에 집 맞은편에 사시던 아저씨가 찹쌀떡을 파셨습니다. 팔다 남은 찹쌀떡을 종종 가져다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저는 그 찹쌀떡을 엄마가 안 보는 곳에 몰래 가져가서 팥앙금은 다 버리고 껍데기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믿음은 가져야 하는데 믿음의 내용물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먼저 원리적인 말씀부터 드려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지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앞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에 대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측근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형태를 통해서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친해진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알려오신 계획을 실행해 나가실 것입니다. 여기서 알려오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믿지만 그 계획이 실행되는 내용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담긴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우왕좌왕하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마음은 죄로 인해서 계속 빗나감이 체질이 되었습니다. 기쁨과 만족을 위하여 하나님 이외의 오감으로 포착되는 이 세상 것들을 향해 마음이 자꾸 빗나갑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루신다고 해놓고 이루지 못하시는 우왕좌왕을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한편 본문의 분위기는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릅니다. 앞서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의 약속과는 다르게 구체적인 시기를 밝히셨습니다. 이러한 약속 이후에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고, 그 사이에 헤브론에 거하던 아브라함은 남서쪽 방향으로 16km 떨어진 그랄로 이주합니다. 그랄은 블레셋 땅에 있는 성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는 아비멜렉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아비멜렉이란 당시 블레셋 족속에서 왕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애굽에 있을 때 아내를 바로에게 보냈을 때와, 블레셋 왕의 아비멜렉에게 들여보냈을 때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로부터 믿음은 가져야 되는데 믿음의 내용은 버려야 한다는 이상한 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본문에서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도대체 사라는 그 외모가 얼마나 출중했기에 팔십구 세나 되었는데도 아비멜렉이 탐을 냈느냐는 것입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내년이면 아들을 낳으리라는 예고를 하실 때,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고 자신은 진작에 경수가 끊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웃음을 지적하시며 다시 한번 아들에 대한 약속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처럼 사라는 영락없는 할머니였습니다. 한편 아비말렉은 왕으로서 그 당시 사천 년 전에 원한다면 영내의 어떤 여자든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아비말렉이 사라를 취하고자 합니다. 도대체 사라의 외모가 얼마나 뛰어났기에 아비멜렉 왕이 팔십구 세 된 할머니를 탐냈던 것일까요?
이 부분이 하도 이상해서 그런지 다양한 해석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당시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외교적인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당시 아브라함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그다지 신빙성 있는 해석이라고는 보기 힘듭니다. 아브라함은 일개 유랑민입니다. 한 국가의 왕이 외교적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하여 그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삼아야 될 만큼 비중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자기 나라 안에 들어온 것을 영역 침입이자 도전으로 간주하여 여차하면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라의 외모가 궁금하기 짝이 없고, 아비멜렉 왕의 취향도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팔십구 세 된 할머니를 탐했는지 참 이상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사실들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본문 또한 아브라함에 대한 비난을 폭주하게 만드는 부분 중의 하나 입니다. 그 모든 비난들은 결국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이기적인 본성 때문에 아내 사라를 욕된 자리로 밀어 넣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고약한 체질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인간적인 술책을 끊임없이 반복하였다는 것이 비난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성경에 근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56절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에는 가장 강력하게 성령에 감동되어 한 설교에서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본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주석가들이 이러한 말씀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해석을 하였기에 아브라함을 비난하는 오해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얼핏 불신앙처럼 보이는 모습들이야말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드러나는 믿음의 핵심을 모르고 해석했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 사실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이 그동안 아브라함이 20년을 머물던 헤브론 마므레의 수풀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헤브론 땅에서 블레셋 땅 그랄로 이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이 아브라함의 자의적 결정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지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라면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지시 외에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빈틈없이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자의적으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식적인 이유에서 보자면 아브라함은 목축업을 하고 있었기에 기존의 목초지가 황폐해졌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으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혹은 당시 헤브론 지역이 아모리 사람들의 땅이었는데, 아모리 사람들과 갈등이 빚어져서 옮기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목초지에 대한 문제든지 아모리 사람과의 갈등이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일어난 일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두 번째 사실은 아브라함은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임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앞서 여호와께서는 두 천사를 대동하신 채 인간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내년 이맘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고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라가 웃었습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사라는 이제까지의 삶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빈틈없이 이루어져 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경수가 끊어지도록 아들을 주시지 않았고, 사라는 이로부터 남편에게 허락하신 자손에 대한 약속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라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라는 이러한 이유에서 웃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웃음을 지적하시면서 내년 이맘때 반드시 아들을 낳으리라는 확신을 주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이 알려오신 계획이 분명함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년 이맘때라는 특정한 시간대를 구체적으로 밝히셨고,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이 태어나리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20년 전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서 아내를 바로 왕에게 들여보냈을 때는 후손에 대한 약속이 있었지만 막연한 상태였습니다. 그 약속 자체는 아브라함에게도 사라에게도 마음에 와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 자신이 좋았을 뿐이고, 영광 중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했을 뿐입니다. 아내를 바로 왕에게 들여보낸 이 사건은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보는 것을 중지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아내조차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메시지로 전한 것입니다.
한편 본문의 상황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내년 이맘때라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있었고, 아브라함은 기존의 터전을 떠나 그랄로 이주를 했습니다. 이미 사라의 몸에는 아기가 잉태되어 몇 주의 시간이 흐른 뒤였을 것입니다. 아비멜렉 왕이 사라를 받아들인 것을 염두에 두자면 사라의 배가 불룩해진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미 아기는 잉태된 상태입니다. 사라가 이것을 체감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진작에 경수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젊은 나이에는 경수가 멈춤을 통해 임신했음을 알 수 있지만 사라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체감할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웃었다는 지적까지 하시며 내년 이맘때를 강조하셨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고 그랄로 이주를 하고 아비멜렉에게 알려지기까지의 시간을 다 염두에 두자면, 이미 아기가 들어선 시기임을 알고 있었기에 10개월이 지나면 아기가 태어날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기 상으로는 이미 아기가 들어섰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라가 애굽의 바로 왕에게 들어갔을 때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바로에게 들어갈 때는 자기 몸에서 아브라함의 아들이 태어나리라는 믿음을 가질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때가 정해졌기에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적까지 하시며 그때를 지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기를 가진 사라를 다시 버리게 하십니다. 이제까지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다양한 대상들을 마음에서 버려왔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버렸고, 애굽에서는 바로 왕에게 사라를 버렸고, 롯과 헤어질 때는 머물 땅을 버렸고,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자기 몸에서 태어날 아들도 마음에서 버렸고, 이스마엘을 임신한 애굽 출신의 여종 하갈도 버렸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은 일 년 뒤에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예고와 사라의 웃음을 지적하신 사건을 통해 이제 아들이 태어날 것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 때문에 그러한 일이 자기들의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는 반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도 않고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특권 의식과 예외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동원하면서 기도 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조금도 특권 의식이나 예외 의식을 갖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못 믿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웃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웃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년 이맘때라는 시기까지 정해주십니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도 사라도 아들이 태어날 것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또 주권적으로 아브라함을 블레셋 땅으로 이주하게 하시고 사라를 빼앗기게 만드십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이제까지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9~10개월 뒤면 아들이 태어날 것입니다. 사라와 배 속의 아기는 이제까지 버려온 것들과는 급이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은 그 한계가 어디까지일까요?
결국 구원이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마음과 뜻과 힘을 하나님께만 쏟으며 사랑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만을 좋아하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려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만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계속해서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 주십니다. 또한 그렇게 구원을 얻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도록 주입하듯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요구를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10개월 이내에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란 곧 하나님 자신을 받아들여 바라보며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받아들여 바라보며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아야 아버지 앞으로 인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되면 아버지는 상대자가 되시고 이로부터 아버지를 받아들여 바라보며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웃음을 지적하시면서 내년 이맘때 아들을 낳을 것을 믿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아내 사라가 내년에는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여 바라보며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믿으라고 하시고서는 믿는 내용물을 마음에서 제거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믿는 것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계획하시고 알려오신 계획을 믿는 것에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이루시려는 계획을 믿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믿되, 계획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일은 복어의 독처럼 생각해서 마음에서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에 담긴 취지입니다. 같은 맥락이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중심 주제는 ‘어떻게 해야 우리 속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승철이가 무슨 일 때문에 마음에서 나를 바라보고 나를 의식하는 일을 중단하거나 잊을 것인가?’를 제일 염려하시면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러한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결국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도 힘드시고 우리도 힘든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꾸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 세상 것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염려하고 근심하고자 합니다. 세상 것들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빗나감의 죄 때문에 하나님도 힘드시고 우리도 힘듭니다.
이제 사라는 구십 세가 되고 아이를 낳을 것입니다. 한편 곧 백 세가 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사라가 아이를 잉태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백 세가 된 사람이 그것을 못 헤아리겠습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무척 강력한 유혹입니다. 할머니 나이에 하나님의 기적적 능력을 통하여 자기의 아이를 갖게 된 아내의 존재는 막강합니다. 그런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라조차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임신을 믿으라고 하시고는 아내가 실제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믿음의 내용물에 대해서는 마음에서 선을 긋고 내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요구는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셔서 하시는 말씀을 눈여겨봅니다. 하나님은 무척이나 세밀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이 정도로 세밀하게 살아서 우리의 삶을 주도하시고 이끌어가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개입하신다는 말로는 마땅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말은 여전히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틈새로 끼어들어 오시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구십 세가 되는 아내가 기적적으로 아들을 갖게 되었는데 그 아내를 버려야만 했습니다. 이 사건 자체가 뜻하는 바는 이 정도로 내게 소중한 존재일지라도 하나님 사랑을 위해서는 반드시 버릴 수 있어야 함을 보여 주십니다. 심지어 그 소중한 존재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내게 주어졌음을 알려주셨고 그 계획을 따라 이루어질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내용물이 영광의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강력한 라이벌이고 강력한 영적 독소로 작용할 수 있기에 마음에서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믿되 계획을 통해 이루어질 내용물은 버리라는 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계획은 믿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 계획의 내용물이 하나님 사랑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조차도 마음에서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아내가 애굽의 바로 왕에게 들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또 한 번 내어주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이 더욱 의미 깊은 이유는 아브라함은 이제 사라가 자기 아기를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도덕적인 잣대로 아브라함을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의 도덕의 조상도 아니고 윤리의 조상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아브라함의 사건을 통해 영적으로 알려주시려는 내용 또한 믿음과 관련된 일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광의 하나님을 보면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내 마음에서 얼마나 극단적으로 세상을 비워야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극단적으로 우리 마음에 세상 것들을 담지 않기를 바라시는지 보여 주십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버림은 그렇게 태어난 아들 이삭이 청년으로 자랐을 때 제물로 바치는 사건을 통해 끝이 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믿음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의식하고 바라보기 위해서라면 혀를 깨물면서라도 마음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세상 가치들을 버려야 됩니다. 구십 세가 되어서 기적적으로 아들을 가진 아내조차도 마음에서 버리면서까지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신 것처럼 개입을 넘어서 아브라함의 삶을 주도해 나가실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믿어야 합니다.
내가 해야 일은 혀를 깨물고서라도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십 세에 기적적으로 아들을 잉태한 사라를 마음에서 버리듯이, 그 어떤 대단하고 소중하고 어마어마한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날지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주도면밀하게 내 삶을 이끌어 가실 것임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삶을 계획하시고 이끌어 가실 것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이를 악물고 아들을 잉태한 사라를 마음에서 버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본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사라처럼 소중하게 여겨지는 대상들을 골라내서 마음에서 버려야만 합니다.
사라가 바로에게 들어갔을 때와 아비멜렉에게 들어갔을 때의 상황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구체적으로 아들이 태어날 것을 믿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마음에서 버리게 하십니다. 내 아들을 잉태한 것이 분명한 아내를 아비멜렉에게 들여보내는 아브라함은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통해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켜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면서라도 영광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내 마음에 들어온 것, 하나님이 믿으라고 요구하신 것일지라도 그 내용물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내용물들을 버릴 수 있습니다.
복어의 살은 먹어도 되지만 독이 있는 알은 조금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찹쌀떡의 팥앙금은 다 버리고 껍데기만 먹었듯이,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믿되 그 계획을 통해 이루어질 내용물은 마음에서 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획일지라도 그 내용물을 마음에서 붙잡게 된다면 독이 됩니다. 복어의 독이 치명적이듯이 그것들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게 할 만큼 대단하고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칠까 염려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셨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며 더욱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아버지가 이루시려는 계획을 알려주시는 대로 다 믿게 하시되, 그 계획을 통해 이루어지는 내용물은 영광의 하나님을 가리는 영혼의 독소임을 알아 아브라함처럼 십자가를 통해 버릴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