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오곡밥
이영백
지금은 농경시대가 아니지만, 농경시대에는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민속세시를 잘 지켰다. 그나마 아직도 명맥이 남아 오는 것 중에 상원(上元)이라 하는, 음력으로 정월 대보름날 전날에 미리 지어 놓는 오곡밥이 있다.
오곡밥은 왜 해 먹는가? 새해 처음으로 만월로 달이 뜨는 대보름날이다. 물론 태양력으로는 설날이 처음 시작이지만, 달은 여성에 빗대어 새해 처음 달이 가장 큰 날을 기려 한 해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기도 하다.
달은 무엇인가? 달-여신-대지의 음성원리 또는 풍요원리를 기본으로 하였다. 특히 대보름날 줄다리기를 하였는데 아랫동네 윗동네에서 모여 줄다리기 고를 끼우는 것이 마치 남녀의 성 상징처럼 암수를 끼우는 것이다. 조상들은 직접적으로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 있지만 바로 남녀의 섹스로 인하여 다산을 기원하는 놀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오곡밥은 쌀, 팥, 조, 수수, 콩 등 다섯 가지로 밥을 지은 것이다. 오곡밥 짓기는 까다롭다. 처음에 찹쌀은 씻어서 인 다음 소쿠리에 건져 물기를 빼놓는다. 차 수수는 씻어서 이는 데 특히 여러 번 문질러 씻어 떫은맛을 없애야 한다. 팥은 씻어서 인 다음 팥이 터지지 않을 정도로 잠깐 동안 삶는다. 팥을 삶아낸 물은 나중에 밥물로 쓴다. 콩은 씻어서 물에 담가 충분히 불린다. 찹쌀, 차 수수, 검은콩, 팥을 함께 섞고 밥물을 부은 다음 소금으로 간을 맞춰 끓인다. 이후 끓을 때 차조 얹고 밥물이 잦아들 때까지 뜸을 푹 들인다. 그릇에 풀 때는 골고루 섞어서 푼다.
오곡밥은 보름날이 기준이지만 먹기는 열나흘 날 저녁에 모여서 먹는다. 여러 가지 나물과 함께 먹는데 이때 빠지지 않는 것이 귀밝이술을 한 잔 곁들이고, 김에 밥을 먼저 싸 먹으면 그해 꿩의 알 줍는다는 속설이 있다.
오곡밥과 각종 나물을 넣어서 뒤주 위에 얹어 두었다가 보름날 여럿 머슴들에게 나눠 먹게 하였다. 삶이 비록 힘들었어도 오곡밥을 짓고, 정월 대보름날 저녁 슈퍼 문이 떠오르면 자리 펴고 달에게 절 올리는 우리 민족이 괴이하다. 가정이 평안하려면 하늘에 높이 뜬 정월 대보름달에 절하였다.
오곡밥은 어려운 시절에 좋은 민속으로 집에 밥 두고 집집마다 찾아가 밥을 모아 일 년 동안 건강과 무병을 빌었다. 좋은 것은 알고 지키자.
첫댓글 엽서수필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