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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수를 마시었습니까? / 2026년 9월 6일 주일 예배
본문 / 에스겔 47:1-12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 문명은 모두 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문명이 모두 강 가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물이 없거나 물을 구하기 힘든 곳에서는 사람이 생존할 수 없거나 살기 힘든 곳입니다. 사람만 그런 것인 아닙니다. 물이 없으면 동물과 식물도 살지 못합니다. 당연히 사람의 먹거리도 없습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듯이 강과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사람이 있고 문명도 있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인구는 1억 2천 만명입니다. 그런데 그 인구의 대부분이 국토의 1%에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국민들이 모여 사는 그 국토의 1%가 나일강가입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물이 있는 곳으로 모이는 겁니다. 인간의 육체와 삶에서 물은 곧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육체와 그 물의 관계로 영적인 세계를 설명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는 이 세상에 보이는 것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에서 에스겔이 본 환상이 그렇습니다.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흘러나온 물이 강이 되었습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아멘.
인간의 문명이 강가에서 꽃을 피웠듯이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온 그 물과 강으로 죽었던 생명이 소생하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와 강이 되고 지나는 곳마다 생명이 되살아나게 한 이 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사야 55장 1절에서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고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말씀합니다.
목마른 자들에게 어디로 오라고 합니까? 물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물이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명이 없다는 겁니다. 소망이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물 없는 사막에서 인간이 살 수가 없습니다. 물 없는 사막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원하는 한 가지가 무엇이겠습니까? 밥과 고기입니까? 친구들과 노는 겁니까? 돈과 금입니까? 그 마음과 몸이 원하는 하나는 깨끗한 물입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시원한 물 한잔 마시고 싶은 겁니다. 온통 물 생각 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한복음 7:37-38. 주님은 자신을 생수의 강, 생명수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물 즉 생명을 주시는 분, 생명의 근원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육체가 물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 하듯이 사람의 영혼이 그렇다는 겁니다. 생명의 근원이며 원천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지 못하듯이 예수를 떠난 인생은 사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 예수를 떠난 사람들이 잘만 살고 있지 않습니까?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오면 그 즉시 즉사하지는 않습니다. 죽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잘렸다고 그 즉시 마르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력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예수를 떠나 사는 인생도 그렇습니다. 물 밖으로 나온 고기가 죽기 전까지 팔딱거리듯이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 팔딱거리는 중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겁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팔딱거리겠습니까? 젊었을 때, 생명력이 가장 왕성하게 남았을 때 팔딱거리다가 늙으면 누워 숨만 가쁘게 몰아 쉬다가 결국 죽는 겁니다.
지쳐서 숨만 쉬며 죽어가던 그 고기가 물을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마귀의 미혹을 받고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한 인간은 모두 물을 떠난 고기와 같습니다. 살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입니다. 물 없는 자, 생명이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난 즉 생명수를 떠난 그 죄인들을 향해 목마른 자라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왜 목마르다고 하셨을까요? 왜 목마른 자가 되셔야 했습니까? 주님이 누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신 겁니까? 목마른 죄인 즉 목마른 나를 대신하여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목마른 겁니다. 생명의 물, 생명수, 생명의 강, 생명의 근원을 떠나 사는 내가 목마른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과연 주님이 십자가에서 뿌려주신 그 생명의 물을 충만하게 마셨습니까? 그 물을 마시고 되살아났습니까? 소생하였습니까? 거듭났습니까?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죽지 않고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누구입니까?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한다. 나로 말미암이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나는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까?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나도 네 안에 거하리라!
하나님을 반역하고 떠난 사람들은 다 목마른 자들입니다.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지 않으면 다 목이 타 죽고 맙니다. 지금도 지옥에서 물 한 방물도 먹을 수 없어 고통을 받는 부자처럼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서 목이 타지만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이 목마른 자임을 압니까? 생명 없는 자임을 알까요? 사망에 떨어진 소망 없는 자임을 압니까? 몸의 건강을 위해서는 물을 마셔야 하지만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시는 물은 아주 적습니다. 왜 물을 잘 안 마실까요? 물 없이 사는 자가 된 겁니까? 시대가 변하며 물을 대체하는 것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달달하고 자극적인 음료수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음료수에 길들여져 맹물은 안 먹게 된 겁니다. 더 이상 순수한 물을 안 먹어도 목마른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과연 건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성도들이 그렇습니다. 생명수,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마시는 물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생명수를 대신하여 마시는 그 물에 생명이 있겠습니까?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예레미야 2:13. 말씀합니다.
우리는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데 어떤 사람들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짐승들의 배설물이 가득한 곳에서 그 물을 식수로 떠가는 겁니다. 그 더러운 물마저도 넉넉지도 않습니다. 저걸 사람이 정말 마시나? 우리가 그곳에 살면 안 마시고 버티겠습니까?
사람들은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생명수를 대신할 물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물은 생명의 물이 아니라 죽은 자를 죽게하는 사망의 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판 웅덩이에서 사망의 물를 마시며 갈증을 잠시 잊으려는 겁니다. 그러나 그 목마름은 결코 해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순수한 포도주에 물에 타 마시면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그 목마름은 오직 생명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해갈이 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말씀하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이 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 힘쓰고 애씀이 없을 지라도 이 샘에 오면 다 마시겠네. 이 샘에 나는 물 강 같이 흘러 온 천하 만국에 다 통하네 빈부나 귀천에 분별이 없이 다 와서 쉬고 또 마시겠네. 생명수 샘물을 마신 자마다 목 다시 마르지 아니하고 속에서 솟아나 생수가 되어 영원히 솟아 늘 풍성하리. 이 샘의 이름은 생명의 샘물 저 수정 빛 같이 늘 맑도다 어린양 보좌가 근원이 되어 생명수 샘이 늘 그치잖네' 찬송 526장.
나는 과연 지금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의 강 가에 심겨진 나무입니까?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내 삶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내가 삶으로 내놓은 열매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의 열매입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보암직 하고 먹음직 하고 탐스러워 이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열매이나 그 열매 안에는 죄와 저주와 사망과 영원한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과연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수 강가에 심겨졌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생명수를 마시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편 1장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말씀하며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선포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경외하고 그 뜻을 받들며 사는 자가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심겨진 자이며 그 생명수를 마시는 자라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며 과연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수 강가에 심겨진 자입니까? 그 생명수를 마시고 있습니까?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자들은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수를 마시지 않는 자들은 되살아나지 못합니다. 그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종교인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고 타락한 자신의 교만한 자아와 그 육적자아에서 나오는 정욕과 세상의 탐심을 섬기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누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인가? 누가 천국에 들어가고 누가 주님의 가족이 됩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아버지의 뜻대로 즉 말씀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말씀을 외면하고 그 말씀을 받들지 않고 즉 마시지 않고 어떻게 죽은 자가 되살아나겠습니까?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겠습니까?
나는 과연 누구일까요? 많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그냥 되는 것입니까?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되살아나지는 못합니다. 여전히 생명이 살지 못하는 진펄과 개펄 소금 땅으로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의 강 그 은혜와 생명의 강물에 자신을 던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해수욕장에 가서 햇볕도 쬐고 거닐고 하였는데 안전요원들이 쉴세 없이 다닙니다. 드론으로 감시하며 방송합니다. 가슴 밑에서 물놀이 하세요. 깊은 곳으로 가지 말라는 겁니다. 구명조끼를 입고 튜브가 있어도 그렇습니다. 지시에 안 따르면 퇴장시킨다고 합니다. 두 발로 바닥을 밝고 몸을 스스로 안전하게 가늘 수 있는 곳에 있으라는 겁니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곳으로 가면 위험합니다. 그때에는 몸의 힘을 빼고 자신을 내려놓고 물의 부력에 몸을 온전히 맡겨야 하지만 사실 당황하게 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중심을 잃고 물에 넘어지면 얕은 물에서도 익사하는 것입니다.
깊이 들어가지 마세요. 쉴세 없이 방송하는 그 말을 들을 때 오늘 본문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영의 세계는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영이 살려면 깊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육이 죽는 곳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깊이 들어가라고 해도 죽을까 두려워 깊이 들어가지 못하듯이 믿음의 세계에서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생명수 그 강물에 깊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죽을까 두려워서 말입니다. 죽는게 두려운 겁니다. 나 곧 내 자아가 죽는 것을 원치 않는 겁니다. 여전히 나는 나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수 강가로 나왔지만 말입니다. 여전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길 원하는 겁니다. 그 얕은 강가에서 내가 내 몸과 내 인생의 주인노릇하며 나를 위한 인생을 살고 싶은 겁니다. 육체의 정욕과 탐심으로 자신을 섬기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까지 이용하며 말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 내가 만든 하나님을 섬기며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교회까지 이용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까지 이용하는 겁니다. 끝까지 내 이름으로 내가 살고 싶은 겁니다. 나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내가 죽어야 하는 깊은 곳으로 가겠습니까?
그 얕은 강가에 머물며 깊은 곳으로 나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두 주인으로 함께 섬기는 것입니다. 안전하고 안심이 되는 겁니다. 깊은 물로 들어가 나를 다 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섬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수많은 성도들이 안전빵으로 얕은 물가에서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사랑하는 겁니다. 회색옷을 입고 넓고 편한 길을 가는 겁니다. 그 우상숭배와 자아숭배가 즉 영적인 간음이 얕은 물가에서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적당히 믿어! 너무 깊이 믿지 말라고 말입니다. 자신도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로 즉 세상과 나를 의지할 수 없는 곳으로 들어가기가 내심 두려웠고 원치 않았는데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는 그 속삭임은 힘이 되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목사들은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나님과 재물을 두 주인으로 안전하게 잘 섬기는 것이 지혜이며 축복이라고 떠들어 대는 겁니다.
찬송가 302장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데로 저 한가운데 가보라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속을 한 번 헤아려 안 보나.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 가네.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 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왜 주님은 천국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갈 자가 많다고 하셨을까요? 은혜는 받았지만 그 은혜를 믿음으로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며 말씀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은혜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고 여전히 얕은 물가에서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그 세상의 힘과 영광인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며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숭배하며 내가 하나님이라고 타락한 그 교만한 자신의 주인 됨을 섬기는 곳에서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얕은 물가에 머물러 있는 많은 성도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기가 쉬운 겁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고 그 은혜를 만난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주여는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은사도 방언도 능력도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믿음은 살아 있는 것이기에 계속해서 자라나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그때부터 주님이 부르셔서 이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은 이미 다 이룬 것도 얻은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2.
새가 알을 않으면 다 부화가 되어 새가 됩니까? 알 안에서 썩는 것도 있습니다. 성도 중에도 구원의 알을 믿음으로 깨고 새가 되는 즉 택함을 입는 자들은 많지 않은 것입니다. 알이 곧 새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껍질 속에 있는 알은 새가 되는 날까지, 그 껍질을 깨고 나오는 그 날까지 계속해서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변화를 받고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이루어가지 못하는 그 믿음과 구원은 썩고 마는 것입니다. 아이를 임신해도 태에서 자라지 않으면 유산이 되고 말지 않습니까?
지금 내 구원은 얕은 물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썩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 믿음은 곪은 것은 아닙니까? 한 번 썩고 곪은 알은 되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수는 죽은 것을 살리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것을 다시 되살아나게 하는 능력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수를 마음과 영으로 마시면 다시 소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러나 그 얕은 물가를 떠나지 못하면서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영영 썩고 마는 것입니다. 돈 많은 부자 청년이 영생을 원했지만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는 그 얕은 물가를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십자가에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다 못을 박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깊은 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갈 수가 없었던 겁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는 결코 깊은 곳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누구든지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하는 강 즉 헤엄쳐야 하는 깊은 강물로 가지 못하는 겁니다. 해수욕장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해도 다 자기 발로 디딛을 수 있는 안전한 얕은 물가에만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도 은혜로 청함을 받고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많아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재물(세상)을 두 주인으로 섬기는 얕은 물가에만 있는 것입니다. 땅 집고 헤엄치기- 이게 현실입니다.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깊은 곳으로 가지 못합니다. 주님의 뜻은 받들지 못하는 겁니다. 부자 청년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갈 자들이 많다고 하시는 겁니다.
과연 나는 누구일까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깊은 곳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주님! 내 몸을, 내 인생을, 내 문제를, 내 고통을, 나의 영혼을 주님께 맡깁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자신의 몸을 풀무불에 던질 때 주님께 맡긴 것이 아닙니까? 다니엘이 사자굴에 자신을 몸을 던질 때 그 생명을 주님께 맡긴 것이 아닙니까? 나는 어떻습니까? 발목에서 무릎으로 허리로 가슴으로 이제는 발을 딛을 수 없는 깊은 곳으로, 온전히 나를 주님께 맡겨야하는 곳으로, 주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그 은혜와 믿음의 강으로 가고 있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길은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이가 적다고 말입니다.
얕은 물가에서 안주하는 자들은 결국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자들은 즉 주님과 그 복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들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죽고자 하는 자들은 살고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자들은 죽고 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혼이 깨어져야 마음과 영에 주님만을 주인으로 영접합니다. 하나님이 들어가십니다. 그때 비로소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혼은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고 타락한 나의 교만한 육적 자아입니다. 성도들은 은혜를 받아도 여전히 내가 주인입니다. 주인이길 원합니다.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애굽과 홍해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하였지만 그들의 주인은 여전히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이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든 하나님을 자신을 위해 섬긴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분노한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뜨린 것처럼 여전히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이고 나를 위한 인생이며 하나님까지도 조작하며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이용하려는 그 타락하고 교만한 육적 자아가, 이 세상에서 높아지기 원하고 인정받기 원하는 그 교만하고 단단한 혼이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낫낫히 깨져야, 믿음으로 죽어야, 회개하고 거듭나야, 내가 죽어야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깨지지 않으면 결코 얕은 물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깊은 곳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타락하고 교만한 육적자아, 그 혼을 섬기는 자아숭배를 대속해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믿음은 나도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죽는 것입니다.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게 하려고 말입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은혜로 부름을 받은 성도의 인생은 그래서 육적자아 그 교만한 혼이 깨어지는 연단의 과정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이 그들의 교만한 자아와 혼이 깨어지는 연단이 아니었습니까? 광야에서 깨어진 자만이 요단강을 건너 안식의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지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고 만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어 만들어 흩으니라" 누가복음 20:18.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만이 있습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 자아가 다 녹고 혼이 깨어지는 연단으로 주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가는 생명의 길과 고난을 받아도 끝내 깨닫지 못하고 버티며 자신의 교만한 주인 됨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내가 만든 하나님을 나를 위해 섬기다가 심판대에서 가루가 되어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선택과 결정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깨어져야 합니다. 나의 교만함이, 그 미련함과 우둔함이. 육체의 정욕과 음란과 세상의 탐욕과 탐심이, 돈과 재물을 의지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그 영적간음이, 주님을 이용하여 높아지려 했던 야망과 온갖 자아숭배로 나의 주인 됨을 섬기는 나의 그 혼이 낫낫히 깨지고 부서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 겁니다. 내 혼이 십자가에서 깨어져야 비로소 주님이 내 마음와 영의 주인이 되시는 겁니다. 그때 오직 믿음으로 주님만을 의지하는 깊은 곳, 구원의 항구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강가로 부르신 성도들을 붙잡고 혼이 깨어지는 연단을 하시는 겁니다.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죽기를 싫어하는 겁니다. 나는 나로 살기를 원하는 겁니다. 타락한 본성은 아주 강합니다. 연단을 받아도 버티고 잠시 약해졌다 또 살아나고 더 강하게 살아납니다. 불사조와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은 더 강합니다. 나는 연약하고 부족해도 너무 많이 넘어져 면목이 없어도 그래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십자가를 의지하면 반드시 그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그 견고한 혼이 깨어지고 죽어가고 녹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주님의 약속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죽으면 산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어지고 있습니까? 은혜와 믿음의 깊은 강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제가 경험한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탐심을 섬기는 그 교만한 육적 자아와 혼이 깨어지는 연단의 과정과 고통은 어쩌면 귀신이 나가는 것 같은지 말입니다. 귀신이 나갈 때 그냥 나갑니까?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거의 죽게 하고 나갑니다. 자아와 혼에 달라붙어 생각과 감정과 온갖 욕망으로 조정하는 것이 마귀가 아닙니까?
내 안에서 주인이 바뀌려면 고통이 있습니다. 마귀는 쉽게 물러서지 않습니다. 나갔다가 더 악하게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연약함에 얕은 물가에서 주저 앉은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죽고자하면 됩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주님이 마귀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밖에는 없습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죽는 겁니다. 반드시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생수를 마시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