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봉사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桂棠山)에 있는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입니다.
중국에 건너가 남전 보원선사(748-835)의 깨달음을 얻은 철감선사(748-868)는 이곳에 선문을 개설하여 이름을 크게 떨치니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기초를 마련하고, 그 개산조가 됩니다. 그리고 철감선사의 수제자인 징효대사(826-900)는 선사의 법통을 받아 강원도 영월 법흥사에서 사자선문을 크게 일으킵니다. 융성했던 초기 쌍봉사는 고려 최씨 무신정권 제3재 집정인 최항(?-1257)이 머물면서 세도를 부릴 만큼 번창한 세월을 누리고, 조선 세조(1417-1468)때에는 세조의 원당사찰로서, 왕실의 명복과 안녕을 비니 절에 딸린 논밭이 사방 30리에 이르며 노역과 세금을 면제받았습니다. 그러나 그후로 급격한 쇠퇴의 길로 접어드니 번영했던 사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거듭된 중창에도 불구, 세월속에 묻혀 오늘에 이릅니다.
다만 쇠잔의 길에도 대 가람의 옛 풍모가 전해지며 오늘에도 불보살의 위신력이 상서로우니 청정한 도량의 숭엄함을 알 수 있습니다.
부도군
이름을 알 수 없는 스님들의 묘탑(墓塔)으로 한 곳에 모아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부도들은 자연에 어울려 자유스럽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앙련(仰蓮)이 새겨진 대석(臺石)에 둥근 항아리모양의 돌을 올리고 그 위에 옥개(屋蓋)가 얹혀져 있는 부도가 있는 반면에, 단순한 석종형(石鐘形)의 부도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대웅전
1962년 해체공사 때, 3층 중도리에서 1690년(숙종16)의 두번째 중건에 이어 1724년에 세번째 중건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상량문(上樑文)이 나왔습니다. 즉, 이 건물이 숙종16(1690)에 중창되고 경종4년(1724)에 3창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초창의 시기는 언제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정유재란에 전소된 것으로 추정하여 병자호란 이전 인조 때 중건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최근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던 3층각은 원래 대웅전 건물이 아닌 탑이었다고 전합니다. 총높이 12m의 정방형 3층 건물로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3층목탑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으나, 1984년 4월초에 촛불로 인한 실화로 소진되었습니다.
이에 문화재관리국에서 희귀한 문화재의 인멸을 방지하기 위하여 1985년 8월5일 복원 공사에 착공, 1986년 12월30일 준공하였습니다.
소실 이전의 모습은 3층으로 지붕이 팔작형식이었는데, 현재는 사모지붕의 목탑 지붕형식으로 바꾸고 상륜부까지 보완하였습니다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으로 기둥을 세워 겹처마에 사모지붕을 올린 익공식(翼工式) 건물입니다. 천정은 서까래를 노츨시킨 연등구조로 중앙에 범종(梵鐘)이 매달려 있습니다
지장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柱心包) 건물입니다. 창호는 빗살창으로 짜아 각 4분합의 문을 달아 놓았습니다.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구조입니다.
1933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당시 쌍봉사의 전경 사진에는 지금의 명부전 자리에 '호성전'이라는 정자각 형태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명부전 건물은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현재의 논위에 지어져 '오백전'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오백전 건물을 지금의 명부전 자리로 옮겨와 시왕상을 모신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는데, 명부전은 빽빽한 시왕상에 비해 너무 비좁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극락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배흘림기둥을 세운 목조건물입니다. 지붕에 비하여 기둥이 너무 크고 또한, 기둥에 비하여 천장 부재가 빈약해서 원래 다른 형식의 건물이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창호는 정자(井)살창으로 짜아 각 3분합의 문을 달았습니다.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여 연꽃과 봉황을 채색하여 장엄을 이루고 있습니다.
철감선사탑 비
보물 제170호
통일신라말 작품으로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만이 남아 있는 철감선사의 탑비로 전체 높이가 1.4m로 그 조각의 우아함은 당대의 명작입니다.
이수나 귀부의 전체적인 조형은 격렬한 조각기법입니다. 특히, 귀부의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어올린 점은 형식적인 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조형입니다.
비를 지고 있는 귀부에도 나름대로의 표정이 있습니다. 매우 씩씩하고 기운찬 청년거북을 표현한 것처럼 탄탄한 목을 거뜬히 뽑아 올리고 각진 눈으로 앞을 쏘아보고 콧김을 내뿜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입에는 여의주를 물었고 정수리에는 뿔을 나타낸 듯한 돌기가 있습니다.
비교적 얇은 등껍질에는 두 겹으로 된 육각 귀갑문(龜甲文)이 정연하게 배치되어있고 등 가운데 비좌가 마련되었습니다.
비좌의 네 면에는 구름 무늬가 있으며, 그 위에 마련된 받침대에는 32장의 연꽃잎이 복련(伏蓮)으로 새겼습니다.
맨 윗부분에는 3단의 비신 굄이 있습니다.
건립연대는 대략 그가 입적한 868년(경문왕8)에서 얼마 안되는 9세기말로 추측됩니다.
철감선사탑
국보 제57호
우리나라 석조 부도 중 가장 기묘하고 아름다운 우수한 유물로 868년(경문왕8)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높이 2.3m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형이지만, 다른 탑들보다 각 부의 세부조각이 우수하고 아름답고 각 부분의 가구 수법이 목조건축의 양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구현하고 있어서 더 한층 주목됩니다.
탑의 형태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이루어 기단부 위에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놓여 있으며, 옥개 상면에는 원형의 찰주공(擦株孔)만이 남아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소실되었습니다. 각 부의 석재는 화강암으로 하대석 1매, 중상대석이 동일석, 탑신과 옥개석이 각 1매씩 모두 4매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기단부는 상.중.하대석으로 형성되었고, 지대석은 현재 시멘트로 보강하였으나, 8각으로 추측되며 하대 하단부에 하대석과 같은 돌로 8각의 각형 2단과 원형의 낮은 각형 굄으로 하대를 받고 있습니다. 하대석은 상하2단으로 이루어졌고 하단은 원형의 평면을 보이며, 측면에 권운문(券雲文)을 가득히 조각하였는데 특히 상단부에서는 원각(圓刻)에 가깝게 조식되었습니다.
탑신은 전후면에 문비(門扉)형이 모각되어 광액(匡額) 내에 자물통이 조각되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 나머지 2면에는 공양비천상 2좌씩이 고부조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옥개석도 팔각으로 낙수면이 평박하며 각 우동(隅棟)이 굵직하고도 유려하게 흘러내렸고 기왓골이 표시되었습니다. 기와 끝에는 암막새와 수막새의 막새기와를 나타내었는데 특히, 수막새기와에는 실제 건물의 기왓장처럼 8엽의 연화문을 조식하여 사실적인 조식의장에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