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동약국
조정자
추석을 며칠 앞둔 초가을 햇볕은 내 마음처럼 참으로 따사로웠고 바람은 감미롭게 나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나는 40년 전에 어려운 삶에 밀려 처음으로 가방을 메고 화장품 장사를 하겠다고 막막한 심정으로 들어섰던 이 길을 감회 깊은 마음으로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며 계동약국의 권태임 권사를 만나러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는 종로구 계동, 새롭게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는 북촌의 초입을 지나면서 여러 가지 회상에 잠겨본다.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종묘사이에 있는 북촌은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을 가지고도 있지만 한옥마을로도 이름이 나있고 조선시대의 양반 골로도 유명한 곳이다. 현대자동차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는 계동입구에 휘문고등학교가 있었고 학교를 양 옆으로 해서 나인이나 상궁들이 살았다는 원서동과 양반들이 살았다는 계동길이 갈라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계동초입부터 아름다운 우리의 곡선을 이루는 한옥들이 줄 비했었다. 여기서 부터가 북촌마을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러나 현대자동차라는 대기업이 계동입구에 들어오므로 입구의 한옥들이 상가로 변하면서 계동의 한옥들이 많이 파손된 것도 사실이다.
추석명절을 이틀 앞둔 계동 길은 오후인 탓인지 더러는 선물꾸러미를 든 행인들의 모습이 정겹게 보인다. 그 속에 나도 한몫을 이루며 그 유명한 숙대교수가 운영한다는 떡 박물관에서 모양 좋게 포장해준 송편바구니를 들었고 또 다른 내 손가방엔 수년 동안 화장품을 팔았지만 나는 한 번도 써보지 못한 귀한 화장품이 들어 있었다. 나도 이것들을 선물로 들고 권태임 권사를 만나러 계동 길을 올라가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선물이 아니라 이것들을 들고 30여 년 전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 보겠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젊었었지만 홧병이 들어 있었다. 가정의 환란을 겪으면서 내가 가진 내적이나 외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절망 속에서 화장품 외판원으로 출발한 것을 계기로 조금씩 꿈을 갖기 시작했다. 십여 년 장사 끝에 이제 제대로 된 전세를 얻거나 아니면 원서동 꼭대기에 방2개짜리 작은 집을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바라볼 수 있을 때쯤에 친구의 배신으로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빚까지 지게 되었다. 몸을 쓰지 못해서 일일이 수발들어야 하는 남편과 어린남매!! 내 삶에 무게가 하도 무거워 나는 비뚤거리고 있었다. 급성 갑상선이라고 했지만 정확한 검진도 치료도 한번 받아 볼 능력 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심장이 뛰어서 걷지 못하므로 그 영업조차 접어놓고 향방을 모르고 누워있을 무렵에 하나님께서는 내 일을 하고 계셨다. 계동약국을 비롯해서 구역식구들의 끝없는 돌봄과 기도로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셨다는 확신을 받고 누운 지 6개월 만에 종로서적 쪽에서 다시 영업을 시작할 수가 있었다. 일을 시작은 했지만 아직 약하고 부족한 나를 위해서 계동약국에서는 영양제를 챙겨주었고 구역 식구들의 끝없는 기도가 이어저서 나날이 좋아지고 있던 어느 날 계동약국에서는 또 나를 찾았다.
“집사님 이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하고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니 다른 생각 마시고 꼭 보약을 드세요. 나는 집사님 대신에 하나님께 축복으로 받을 거예요.” 천부당만부당 손을 휘젓는 나를 붙들고 내 가방에 두툼한 돈 봉투를 넣고는 어느새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눈물 외에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계동거리도 너무나 변화가 많아서 사방을 두리번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거래를 했던 최소아과병원이 그대로 있는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젊었던 30대에서 70대중반의 노인의 대열까지 왔건만 그 건물은 새로 수리를 한 듯 하얗고 반듯해 보이는 것이 어제인 것처럼 여전하기만 했다. 그때 이곳에 있던 이들은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
계동약국은 계동 길을 똑바로 올라가면 고 박정희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다녔던 중앙고등하교가 바라보이는 도로가에 상가와 2층에 살림집으로 지어진 대단히 큰집이라고 기억이 된다. 친정아버지는 딸을 위하여 집을 사주고 약국을 내 주셨다고 한다. 그는 부잣집 딸로서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남편을 만나 결혼해서 아들과 딸을 기르며 행복하게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전혀 부잣집 딸 내색 없이 약국을 비울 수 없다는 이유로 약국에 딸린 작은 방에서 늘 구역예배를 드렸고 풍성한 음식도 대접해 주었지만 특별히 나한테는 피가 부족하다며 설탕뿌린 토마토를 자주 주기도 했다. 좋은 환경에서 어려움 없이 자랐고 나이도 나보다 어릴 뿐만 아니라 어려움도 부족함도 없는 평탄한 삶을 살면서 그 따뜻한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할아버지 때에 이북에서 교회를 2개나 지어서 하나님께 드릴만큼 신실한 분들이셨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그리도 인정 많고 이해심 많은 분이 되었을까?
우리가 약국에서 예배드리던 그때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날로 부흥하고 있던 때라서 계동에서의 우리도 정말 열심히 구역예배를 드렸던 같다. 그때 같이 구역예배를 드렸던 분들을 생각하니 오늘의 가을바람처럼 감미롭기도 하고 스산한 것 같이 외로운 마음이기도 한 것은 왜일까? 이곳에서 처음으로 화장품영업의 터를 잡아갔고 또 전도를 받았고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했건만 나는 먼 외국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면서 이제야 찾아 왔으니 말이다. 그렇게 사랑의 빚을 많이 지고 있었고 그 빚을 조금이나마 갚아야 된다는 마음을 분명 갖고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그날의 삶에 밀려 이제야 온 것이다.
‘권사님 나 알아보겠어요,? 약국 문을 밀고 들어가는 나를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큰 변화가 없이 편안히 나이 들어가는 권사님은 정말 곱게도 늙어 가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만큼 고우셨다.
“누구~누구시더라. 어머! 이게 누구세요. 나를 알아본 권사님은 내 손에 든 선물보따리 조차 아랑곳 하지 않고 나를 끌어 않았다. 어느새 우리는 두손을 마주 잡고 두 눈에 눈물을 가득 채우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고 내 선물 꾸러미에서는 은은한 추석내음이 흐르고 있었다.
첫댓글 글을 읽어보니 저 또한 살면서 빚진분들께 감사 인사전화라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값진 추석명절을 보내신 권사님건강하시고 좋은글 많이 올려주세요. 보면서 많은 공부가 됩니다. 고맙습니다.
물 흐르듯 부드럽고 잔잔하게 이야기를 전개 해 나가는 권사님 글 솜씨가 참 좋습니다.
그렇죠~, 중보기도의 힘^^
그리고 상대의 마음 씀을 오래 오래 기억하고, 답례하는 마음이 비단결입니다. 저도 이 번 시골 갔을 때, 아버지를 태워준 119 소방서를 찾아가 음료와 함께 감사인사를 드렸어요^^
계동하면 우리나라 근대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심이 있는 마을이네요.
현대화의 밀려 많이 변했지만요.
믿으이 싹뜬 곳이기에 권사님과 그 분의 만남은 삶의 깊이를 느끼는 아름다운 만남이었네요.
만나신 그 후 얘기 보따리가 궁굼하고 기대되느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