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역사에 정의는 없다(3)
미국에서의
청결 문제
이와 비슷환 악순환이 현대 미국의 인종차별을 영속화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유럽 정복자들은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 노예를 미국으로 수입해 광산과 대규모 농장에서 일하게 했다. 수입원은 유럽이나 동아시아가 아니라 아프리카였는데, 거기에는 세 가지 상황적 요인이 있었다. 첫째, 아프리카가 더 가까웠으므로 세네갈에서 노예를 수입하는 것보다 비용이 덜 들었다.
둘째, 아프리카에는 이미 잘 확립된 노예무역이 존재했던(주로 중동으로 노예를 수출했다) 데 비해 유럽에서는 노예 소유가 극히 드물었다. 이미 존재하는 시장에서 노예를 사는 것이 무에서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셋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질병이었다. 버지니아, 아이티, 브라질 같은 곳에 있는 미국의 농장들은 아프리카가 발상지인 말라리아와 황열병에 시달렸다. 아프리카인들은 세대를 거듭하는 동안 이런 질병에 부분적으로 면역이 생겼지만, 유럽인들은 완전히 무방비여서 떼죽음을 당했다. 농장 주인으로서는 아프리카인 노예에 돈을 투자하는 것이 유럽인 노예나 계약 노동자에게 투자하는 것보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유전적 우월성(면역의 관점에서)이 사회적 열등성으로 번역되었다. 아프리카인들은 유럽인들보다 열대 기후에 더 잘 적응한다는 이유 때문에 유럽인 주인의 노예가 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런 상황탓에, 미국에서 급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들은 유럽계 백인이라는 지배 카스트와 아프리카계 흑인이라는 종속 카스트로 나뉠 운명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특정 인종이나 출신을 노예로 쓰는 이유가 오로지 경재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도를 정복한 아리아 사람들이나 미 대륙의 유럽계 백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일 뿐 아니라 신앙심이 깊고 정의로우며 객관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런 분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적, 과학적 신뢰가 동원되었다. 신학자들은 아프리카인들이 노아의 아들인 햄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 햄은 그 아버지로부터 "네 자손들은 노예가 되라"는 저주를 받았다. 생물학자들은 흑인들은 불결한 상태로 살며 병을 퍼뜨린다고, 다시 말해 오염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신화들은 미국 문화와 서구 문화 전반에 잘 공명했다. 그래서 노예제를 만들어낸 조건들이 사라진 지 오랜 뒤에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세기 초 대영제국은 노예제를 불법화하고 대서양의 노예무역을 중단했으며, 이후 몇십 년에 걸쳐 노예제는 미 대륙에서도 점차 불법화되었다. 이것은 노예를 소유한 사회가 자발적으로 노예제를 추방한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이다.
하지만 노예가 해방된 다음에도, 노예제를 정당화했던 인종차별적 신화는 계속 유지되었다. 인종분리는 인종차별적 입법과 사회적 관습에 의해 지속되었고, 그 결과 원인과 결과가 서로를 강화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 직후 미국 남부 주들을 떠올려보자. 노예제는 1865년 미국 헌법의 제13차 개정으로 이미 불법이 되었고, 제14차 개정에서는 인종을 근거로 시민권과 법에 의한 동등한 보호를 부인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2백 년간 지속된 노예제의 결과, 대부분의 흑인 가정은 대부분의 백인 가정에 비해 훨씬 더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았다. 따라서 1865년 앨라배마에서 태어난 흑인은 이웃의 백인에 비해 좋은 교육을 받고 월급을 많이 받는 직업을 가질 기회가 훨씬 적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 태어난 그 자녀들도 아버지와 똑같은 불리함을 안고 삶을 시작했다. 이들 역시 교육을 받지 못한 가난한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적 불이익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었다. 앨라배마는 잘사는 백인들이 누리던 기회를 갖지 못한 수많은 백인 가난뱅이들의 고향이기도 했다. 게다가 산업혁명과 이민의 물결은 미국을 극도로 유동적인 사회, 가난뱅이가 부자가 될 수도 있는 사회로 만들었다. 만일 문제가 되는 것이 오직 돈뿐이었다면 인종 간의첨예한 분리는 빠르게 흐려졌을 것이고, 거기에는 인종간 결혼이 적잖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865년이 되자 백인들뿐 아니라 많은 흑인들도 흑인에 대한 편견을 사실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흑인은 백인에 비해 객관적으로 지능이 낮고 폭력성이 높고 성적으로 문란하고 게으르며 개인적 청결에 관심이 적다고 말이다. 따라서 흑인은 폭력, 절도, 강간, 질병 - 다시 말해 오염 - 의 원인이었다. 만일 1895년 앨라배마의 어느 흑인이 좋은 교육을 받는 데 기적적으로 성공해 은행원 같은 어엿한 직업을 가지려고 지원서를 냈다고 하자. 그가 채용될 가능성은 그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백인 후보에 비해 훨씬 더 적었다. 흑인에게 찍힌 낙인 - 천성적으로 신뢰할 수 없으며 게으르고 지능이 떨어진다는 - 이 악영향을 미친탓이었다.
어쩌면 여러분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사람들도 이런 낙인은 신화이지 사실이 아니며, 흑인들도 백인 못지않게 경쟁력 있고 법을 준수하며 청결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예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편견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굳어졌다. 좋은 직업은 모조리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흑인들이 실제로 열등하다고 믿기가 더 쉬워졌다. 평균적인 백인 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고. 흑인이 해방된 지도 여러 세대가 지났어. 하지만 교수나 법률가나 의사가 된 흑인이 얼마나 되냐고, 심지어 은행 출납계원이 된 사람도 드물어. 이건 그들이 지능이 떨어지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 아닐까?" 흑인들은 악순환에 빠졌다 그들은 지능이 떨어진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이미 백인들이 차지해버린 직업을 구할 수 없었는데, 그들이 열등하다는 증거는 백인들이 차지한 직업을 가진 흑인이 드물다는 바로 그 점이었다.
악순환은 멈추지 않았다. 흑인에 대한 낙인 찍기가 심해지면서 이것은 인종을 차별하는 '짐 크로 법(1876년~1965년 시행되었던 미국의 인종분리법 - 옮긴이)'과 규범으로 제도화되었다. 흑인은 선거에 참가할 수도, 백인 학교에서 공부할 수도, 백인 가게에서 물건을 살 수도, 백인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수도, 백인 호텔에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이 모든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명백했다. 흑인은 천하고 게으르고 악하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백인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백인들은 흑인과 같은 호텔에서 자거나 같은 식당에서 먹고 싶어 하지 않았다. 병에 걸릴까 봐 두려워서였다. 백인은 자녀를 흑인이 다니는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흑인의 야만성이 두려웠고 악영향을 받을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흑인이 선거에서 투표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흑인은 무지하고 부도덕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두려움은 소위 과학적 연구에 의해 정당화되었는데, 학자들은 흑인이 실제로 교육 수준이 낮으며 다양한 질병에 걸리는 일이 많고 범죄율이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을 '증명'했다.(이런 연구가 간과한 점은 이런 '사실'들이 흑인에 대한 차별의 결과라는 점이었다).
20세기 중반에 과거 남부연합에 속했던 주들에서 자행되었던 인종차별은 19세기 말보다 더욱 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8년 미시시피 대학교에 지원한 흑인 학생 클레넌 킹은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되었는데, 판사가 미시시피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흑인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결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남부인(그리고 많은 북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일은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과 성관계를 하고 결혼하는 것이었다. 흑백 간의 성관계는 가장 큰 금기가 되었고, 그 금기를 어겼거나 어긴 것으로 짐작되면 린치라는 형태로 즉결처분을 받아 마땅한 범죄로 여겨졌다. 백인 우월주의 비밀결사대인 큐 클럭스 클랜 kkk 단은 그런 살인을 수없이 자행했다. 힌두교의 최상층을 이루는 브라만들에게 청결의 법칙에 관해서 한두 수 가르쳐줄 만한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종차별은 점점 더 많은 문화영역으로 퍼졌다. 미국의 미학 문화는 미에 대한 백인의 기준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백인종의 신체 특징인 흰 피부와 금발 직모, 약간의 들창코가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되었고, 흑인의 전형젹인 모습인 검은 피부, 검고 텁수룩한 머리, 납작한 코는 추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런 선입견은 인간의 의식에서 훨씬 더 깊은 수준에 있는 상상의 위계질서를 각인시켰다.
이런 악순환은 수세기 수천 년 지속되면서 역사적으로 우연히 발생한 질서에 불과한 상상의 위계질서를 지속시킬 수 있다. 부당한 차별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심해질 수 있다. 돈은 돈 있는 자에게 들어오고, 가난은 가난뱅이를 방문하는 법이다. 교육은 교육받은 자에게, 무지는 무지한 자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역사에서 한번 희생자가 된 이들은 또다시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역사의 특권을 누린 계층은 또다시 특권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만일 흑인과 백인의 구분, 브라만과 수드라의 구분이 생물학적 실체에 근거를 두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인간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생물학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각기 다른 집단이 지니는 생물학적 차이는 사실상 무시할 만한 수준이므로, 생물학으로는 인도 사회의 곡절이나 미국 인종차별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상상의 산물을 잔인하고 매우 현실적인 사회구조로 바꿔놓은 사건들, 조건들, 권력관계들을 연구해야만 비로소 그런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다.
첫댓글 역사에 정의는 없다 !
네~ 정의롭지 못한 역사의 악순환이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