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정리:2001.2.22-2.23
2.22(목) 10:40문수리-11:40싸리샘-12:10느진목재-12:30중식-14:30질매재-16:20돼지평전-17:00노고단 산장
2.23(금) 07:00기상-08:아침식사-09:10출발-09:40종석대-10:10우번암-11:40목조교-성삼재 도로-12:40천은사
지난 십여 일 전 지리산행은 불발되었다. 2박 3일의 일정으로 첫날 화엄사와 연기암의 산행으로 가볍게 몸을 풀었고, 화엄사 아래 현O식당에서 저녁 식사 후 고로쇠 수액을 사무실 직원들과 먹고 있을 때였다. 밤 11시가 넘어 핸드폰 벨이 울렸고 장모님이 낙상으로 의식불명에 빠졌다는 소식에 나는 배낭을 꾸리고 택시를 대절하여 광주에 가야만 했다. 그날 밤 지리산 신의 가호가 있었을까. 그분은 실낱같은 의식을 되찾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행히 정상적인 몸으로 회복했다. 지리산행을 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얼마나 가슴 졸이며 다행한 일로 생각하며 감사를 드렸던가. 그날 나 때문에 일행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최부장은 화엄사에서 노고단을 올라 종석대 산행을 홀로 마쳤다.
오늘도 C부장과 산행이다. 더욱이 정읍에 들러 친우 L선생도 나의 제안에 지리산행을 하게 되었다. 특히 L선생과 나는 화엄사에서 노고단 산행 이후 실로 20년 만의 일이다. 구례 토지면 문수리로 향한다. 1948년 여수에서 14연대 반란 사건이 일어난 후, 반란군들은 순천, 광양지역에서 토벌군에 쫓겨 백운산을 넘었고, 섬진강을 건너 지리산 들머리인 문수골로 숨어들었다. 노고단 선교사 별장을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토벌군에게 쫓긴 반란군들은 그 이듬해 반선 마을에서 반란군 대장 김지회와 홍순석(육사 2기)이 사살됨에 따라 남로당의 지휘 아래, 군당 야산대들과 한국전쟁 때까지 지리산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이름하여 구빨치산들이다.
바로 그 역사의 현장 문수골로 접어든다. 창밖의 지리산은 짙은 안개에 휩싸여 보고픈 자태를 나타내지 않는다. 구례읍에서 살짝 떨어진 토지면 오미리의 마을 길로 접어들어 하사마을을 지나 문수리로 접어들었다. 좁은 포장길이 깊은 문수골 계곡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있어 신기하다. 어느새 안개가 깨끗이 사라지고 새파란 하늘과 종석대와 노고단의 지리산정이 마중 나온다. 오미리에서 문수사까지는 7Km 정도. 문수사 앞 공터에 주차하고 3명의 산꾼은 왕시루봉 능선을 향한다.
문수골은 얼음과 눈이 서서히 녹으면서 봄을 맞이하는 듯하다. 각자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비상용으로 코끼리 물통에 물을 채워 나의 배낭에 넣었다. 이젠 노고단까지는 물 걱정 끝! 늦은 목재를 오르는 계곡 길은 눈이 많이 녹았다. 아이젠을 하지 않았으나 가끔 슬립에 주의한다. 그동안 홀로 산행을 다녔는데 오늘은 동행이 있어 즐겁고 발걸음도 가볍다. 선등은 최부장이 섰고 나는 후미로 빠졌다. 초면이지만 최부장과 L선생은 지리산 품속이어서 그런지 친근하게 대화 꽃을 피워 마음이 흐뭇하다. 땀이 온몸으로 분출된다. 어제 L선생과 먹은 술 때문인가. 쓰린 속을 달랜다. 무거운 배낭도 조금은 걸림돌이다.
초행이지만 문수리에서 느진목재로 왕시루봉 능선을 오르는 이 된비알도 낯설지 않다. 지리산 품이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그 어디를 찾아도 늘 감동적이며 정겹다. 눈앞에 파란 하늘이 보인다. 느진목재다. 문수사 입구에서 이곳 왕시루봉 능선의 길목인 느진목재까지는 1시간이 걸렸다. 남쪽으로는 지척의 왕시루봉이 늠름히 솟았고, 북쪽으로는 문바우등이 응수를 한다. 동쪽 아래 길은 피아골의 남사마을로 내려서는 홍골이다. 동편을 보니 역시 천왕봉이 늠름하다. 촛대봉 근처의 세석평전에는 백설이 가득하여 천왕봉보다 우선 눈에 들어온다. 11시 방향엔 하얀 눈 속의 노고단이. 1시 방향엔 반야봉과 토끼봉이 듬직하다.
여기서 조망을 하며 한숨을 돌린다. 떨어지는 땀방울을 손으로 쓱 문질러 닦는다. 이젠 본격적인 왕시루봉 능선 산행이다. 남부 능선의 삼신봉에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풍광이 제한적이지만 눈앞에 보이는 노고단과 반야봉을 바라보며 걷는 기쁨이 있다. 주능에서 보면 왕시루봉이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지만, 느진목재에서 바라보니 노고단과 반야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지금 시각이 11시 40분. 점심은 문바우등을 넘고 먹기로 한다. 능선 길은 눈이 많아 예상치 못한 곳에서 깊게 빠진다.
2002년까지 휴식년제로 묶여 있는 왕시루봉 능선. 지리 산꾼만 은밀히 다니는 곳이라 빛바랜 표지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싸리샘에 도착했다. 근처에 싸리나무가 많아서 싸리샘이다. 가느랗게 흐르는 샘터엔 작은 바가지 하나. 하지만 샘안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어 수통의 물을 생각하니 감히 마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능선길을 다시 따라 오른다. 문바우등에 올라 아래를 살펴보니 어느 틈에 왕시루봉이 한참이나 뒤로 물러나 있다. 산 짐승이 먹이를 찾아 헤맸을까. 눈길엔 제법 큼지막한 발자국이 이어지고 있다.
능선길엔 반달곰을 보호하자는 캠페인성의 현수막이 걸려있다. 문수골은 지리산 반달곰의 서식처이다. 지리산에 반달곰이 자주 출현하는 곳은 왕시루봉 능선과 만복대, 토끼봉 능선 그리고 하봉 능선이라 들었다. 아침에 구례에서 썰지 않고 길게 말아 온 김밥을 맛나게 먹는다. 노고단을 바라보며 2시간쯤 오르니 질매재이다. 미인의 허리를 닮았다는 질매재. 푯말을 보니 왕시루봉 6Km, 노고단 4.5Km, 피아골 산장 0.7Km라 알려준다. 그렇다면 돼지평전까지는 대략 3Km 정도. 늦어도 시간 반이면 오를 수 있다.
함태식 선생님은 1988년 이십여 년을 지켜온 노고단 산장을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넘기고 피아골 산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함 선생님이 정들었던 노고단을 떠나며 뒤돌아보며 아쉬움에 내려왔던 그 길이다. 이젠 바로 눈앞에 정상인 노고단과 돼지평전이 지척이다. 질매재부터는 길이 흐릿하며 눈이 가득하다. 선두로 나선다. L선생은 등산화와 양말이 젖었다고 투덜거린다.
거센 산죽과 바위가 가로 막는다. 헤치고 넘어서자 이윽고 앞이 훤하다. 바로 돼지평전이다. 원추리꽃 뿌리를 좋아하는 멧돼지의 지상 낙원 돼지평전. 여름의 돼지평전은 야생화 천국이다. 우측을 바라보니 반야봉이 우뚝하다. 눈 속의 심원마을이 포근하다.
잠시 후 사력을 다해 올라오는 L선생이 눈밭에 대자로 눕는다. 얼마나 힘겨운 산행이었을까. 방금 함께 도착한 최부장은 천왕봉을 바라보더니 천왕봉으로 가자고 농담을 건넨다. 그 말에 씩 웃는다. 이젠 노고단을 우측으로 돌아 노고단 고개까지는 30여 분 정도면 된다. 이곳 주능 길은 눈이 많다. 엄마 잃은 어린 들쥐가 배고파 눈 속에 나왔고, 청설모도 눈밭을 뒹군다. 노고단 산장이 얼마나 더 남았냐는 L 선생의 물음에 능선 모퉁이를 돌면 된다고 달랜다. 정면엔 노고단 고개가 지척이다. 피아골에서 노고단으로. 뱀사골에서 노고단으로. 화엄사에서 피아골로. 정겹고 추억의 산길이다. 사진 전문가인 C부장은 눈 덮인 산정을 핫셀 블라드 카메라로 풍광을 쓸어 담는다.
오후 5시. 얼어붙은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니 노고단 산장. 대략 줄잡아 6시간이 걸린 긴 산행이다. 아직 남녘에는 해가 남아있다. 노고단 산장 취사장 앞 테이블 앞에는 일몰을 기다리며 몇몇 산님이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다. 육개장을 끓이고 햇반을 데운다. 준비해간 삼겹살과 너비아니를 굽고 상추에 싸서 파무침과 쌈장을 더하여 소주를 마신다. 겨울에는 소주가 좋다. 산꾼에게는 아마도 최고의 성찬일 것이다. 술잔을 계속 들이킨다. 따끈한 별미의 홍차로 마무리한다. 오후 6시가 되니 어둑해지며 노고산정은 기온이 급강하한다. 추위에 서둘러 짐을 꾸려 산장으로 들어선다. 산장엔 몇몇 산님이 내일을 위하여 휴식 중. L선생은 오랜만의 산행으로 자리에 눕자마자 그로기 상태가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지난여름 홀로 설악산에 갔었다. 새벽에 천불동에서 대청봉을 올라 수렴동으로 하산 후 백담산장에서 일찍 잠자리에 든 후 다음 날 아침 얼마나 후회를 했던가. 그 생각에 산장 밖으로 나와 잠시 산책을 한다. 유난히 밝은 샛별이 남쪽 하늘에 총명한 광채를 발휘하고 목을 꺾어 심천을 바라보니 무수히 많은 별빛이 쏟아지며 어둠을 밝힌다. 정신없이 쫓겼던 반란군들은 허겁지겁 섬진강을 건너와 차가운 노고단에서 겨울 별들이 무수히 빛나는 밤하늘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향에 두고 온 늙으신 부모님과 누이동생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어쩔 수 없이 반란군에 가담하여 후회는 하지 않았을까. 배고픔과 추위에도 떨었을 것이다. 한참을 배회하다 자리에 다시 눕는다.
새벽 3시가 되어 눈이 부스스 떠졌다. 천왕봉을 향하는 부지런한 산님들의 발소리와 기름칠하지 않은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함께 귀곡성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산장 밖에 나가보니 바람이 불고 날이 흐리다. 혹시 비가 계속 오면 걱정이다. 설마 겨울 지리산에 비가 내리지 않으리라 안일한 생각을 한 것이다.
7시에 밖에 나가보니 굵은 비가 내리고 있다. 많은 비는 오지 마라.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육수에 햄을 잘라 넣고 참치와 김치를 섞어 넣어 찌개를 끓인다. 홀로 산행때와 달리 동료들이 있어 준비해간 젓갈, 깻잎, 김, 장조림으로 아침상을 차린다. 아침을 먹고 나도 빗줄기가 여전하다. 산장 매점에서 L선생의 상하 우비를 준비하고 눈비에 얼어붙은 길을 따라 종석대로 향한다. 백두대간이지만 출입통제가 계속되는 종석대. 노고단 산장을 뒤로 한 채 3명의 산꾼은 차가운 비를 맞으며 종석대를 향해 오른다. 종석대에서 노고단을 바라보니 진한 감동이 다가온다. 손에 닿을 것만 같은 노고단. 비는 내리지만 하얀 솜으로 덮어놓은 노고단의 모습이다.
종석대에 오른 후 내려서다 갈림길에 이른다. 좌측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차일봉을 거쳐 원사봉을 지나 화엄사로 내려가는 능선이다. 지리 산꾼만 다니는 이 길은 하산 시간이 4시간 이상 소요되며 만만치 않다. 이 능선 우측의 길이 우번암을 지나 천은사로 향하는 길이다. 우번암을 향하는 오솔길은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고 살얼음이 있다. 굵게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나간다. 10시가 조금 넘어서 우번암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우번암. 짙은 골안개가 계속 피어오른다. 뒤를 바라보니 종석대에서 성삼재로 내려서는 능선이 아름답다. 앞서간 C부장이 길을 놓친다. 주변을 살펴본다. 물줄기가 하얗게 얼어붙은 계곡이다. 길을 잃었으나 계곡을 따라서 내려가다 보면 길은 이어질 것이다. 사이다병. 소주병. 플라스틱류. 종이컵 등 지난여름과 가을 유흥의 남긴 흔적들이 눈에 띈다. 내리 걷다 보니 목조교가 나타나고 자동차 소리도 들린다. 성삼재로 오르는 도로이다.
천은사를 향한다. 안개에 휩싸인 지리산 자락은 구름에 둥둥 떠 있다. 성삼재 도로가 생기면서 지리산은 생태계가 크게 파괴되었다.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타이어 냄새를 주변에 풍긴다. 이틀간의 달콤한 산행을 생각하며 걷다 보니 천은사. 겨울을 떠나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천은사는 단장한 새신부처럼 정결하고 깔끔하다. 온몸이 젖은 지리산행은 끝났다. 얼마 전 들렀던 현O식당에서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난로에 몸을 맡긴다. 돌솥 산채 정식 한상 차림에 입이 딱 벌어진다. 행복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우선 따끈한 술을 한잔시켜 먹는다. 맛있는 전라도 음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