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1세(영어: Elizabeth I,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 1])는 1558년 11월 17일 즉위하여 1603년 3월 24일 사망할 때까지 44년간 잉글랜드 왕국 및 아일랜드 왕국의 군주로 재위한 여왕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 후 스튜어트가의 제임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튜더가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의 두번째 부인 앤 불린이 낳은 딸이다. 앤 불린은 엘리자베스 출산 이후로도 임신하였으나 유산하였고 한 때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과 결별까지 단행하였던 헨리 8세는 불화 끝에 1536년 5월 19일 앤 불린을 처형하였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두 살에 불과하였다. 헨리 8세는 엔 불린 처형 후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하였고 이에 따라 엘리자베스 역시 왕녀의 지위를 박탈당하였다가 열 살이 되던 1543년 왕위계승법 변경을 통해 복권되었다.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하자 이복 동생이었던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당시 잉글랜드의 왕위계승법은 적장자에게 계승우선권을 주었기 때문에, 헨리 8세가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이었던 에드워드 6세는 아홉 살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병약하여 1553년 열여섯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어린 군주의 호국경으로서 섭정을 맡아 실권을 장악했던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는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자 잉글랜드의 반가톨릭 정서를 기반으로 제인 그레이를 새 국왕으로 앉혔다. 다음 왕위계승권자인 헨리 8세의 적장녀 메리 1세는 완고한 가톨릭 신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계를 놔두고 방계를 즉위시킨 이 일은 강력한 반발에 부딛혀, 제인 그레이의 즉위 9일 만에 퇴위되고 메리 1세가 즉위하였다
메리 1세는 헨리 8세의 첫 부인이었던 아라곤의 카탈리나가 낳은 딸이다. 헨리 8세가 수장령을 통해 가톨릭과 결별한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카탈리나와의 결혼 무효를 주장하며 교황청과 대립한 것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교회와 의회 입장에서 메리 1세의 즉위는 두려운 일이었다. 반면에 핸리 8세가 카탈리나와 파혼한 이후 억압받았던 메리 1세는 잉글랜드 종교 개혁을 무효화시키고자 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1세의 강력한 경쟁자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감시되며 억압받았다. "블러디 메리"라 불릴 정도로 강권 통치를 이어간 메리 1세에 대항하여 개신교도의 반란이 일어나자 엘리자베스 1세는 배후로 지목되어 1년 동안 투옥되기도 하였다.
메리 1세는 자신의 왕위를 이을 가톨릭 군주를 간절히 원하여 신료의 반대를 무릅쓰고 합스부르크가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하였으나 1558년 결국 후사 없이 사망하였다. 이로서 잉글랜드의 왕위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계승되었고 당시 잉글랜드의 군주가 겸하고 있던 아일랜드의 왕위 역시 엘리자베스 1세가 이어받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전의 튜더가 국왕들과 달리 윌리엄 세실과 같은 유능한 관료의 도움을 받으며 의회와 협치하였다.[* 2]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1세의 종교 정책을 뒤집어 가톨릭과의 분리를 재천명하고 잉글랜드 국교회가 안착되도록 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수 많은 청혼에도 불구하고 독신을 고집하여 "처녀 여왕"으로 불리게 되었다.[1] 미국의 버지니아주는 이러한 엘리자베스 1세에게 헌정되어 명명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협치를 통하여 국정을 운영하였다.[2] 스스로가 지키고자 한 격언 가운데 하나가 video et taceo (보았으나 침묵한다)[3] 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였지만, 잉글랜드 국교회 성립으로 교황청과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1570년 교황 비오 5세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이 무효이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 역시 적자의 자격이 없는 사생아일 뿐이라고 선언하여 잉글랜드 내의 가톨릭 신도들을 자극하였다. 이로서 잉글랜드 내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를 시해하고 스코틀랜드의 메리를 왕위에 올리려는 음모들이 이어졌다. 엘리자베스 1세는 프란시스 월싱엄이 이끄는 정보조직을 활용하여 이들 음모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고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여 스코틀랜드의 메리를 처형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시기 잉글랜드는 당대 유럽의 강국이었던 프랑스 및 스페인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보이고 있었다. 즉위 초기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던 엘리자베스 1세는 해외 식민지 문제와 유럽 내의 세력 결집 등으로 결국 스페인과 갈등이 커지게 되었고 1585년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다가 제임스 1세가 즉위하고 나서야 매듭지을 수 있었다.
중세 이후 이어져온 유럽의 처녀성 숭배는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개인숭배로 이어졌다. 잉글랜드는 많은 찬사와 문학, 초상화, 행사 등을 통해 자신들의 "처녀 여왕"을 숭배하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크리스토퍼 말로 등이 잉글랜드 연극 부흥을 주도하였고, 프란시스 드레이크, 월터 롤리 등이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서 유럽의 강국들과 경쟁하였으며, 경제 역시 성장세를 이어갔다. 엘리자베스 1세는 44년을 통치하며 한 시대를 대표하게 되었고[4], 이 시기는 흔히 엘리자베스 시대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