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장기사랑&장기지킴이 원문보기 글쓴이: 그림자
지명유래
신라시대(新羅時代) 지답(只沓)이 고려 현종시 장기현(長鬐縣)이라 개칭할 때 북으로 현 대보면에서 남으로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까지 길게(長)뻗은 지역이며 촌명인 마산(馬山)과 장기읍성(長鬐邑城) 남쪽의 산이 용마산으로 마(馬)자와 관계 깊은 말목장(鬐)지역이라 하여 장기(長鬐)란 명칭이 만들어 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영남 읍지에 산을 등지고 바다와 임한 지역으로 좁고 길다. 배산임해지(背山 臨海 地) 而長)이라 하였고 송시열(宋時烈) 선생(先生)이 이곳에 유배올 때 마산촌(馬山村)이란 마을 이름이 있다는 것을 들으시고 고을 이름에 기(鬐)자가 들어 있고 마을 이름이 마(馬)자가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장기(長鬐)의 지명은 지답(只沓) 기립(鬐立) 장기(長鬐) 봉산(峯山) 지행(只杏)으로 불리어 오다가 지역 주민들의 지역 명칭 회복운동으로 1991년 12월 1일 다시 장기(長鬐)로 공식 명칭을 변경했다.
읍내리(邑內里)
장기면의 진산인 동악산(252m)에서 동으로 내민 산등성이에 옛 장기읍성이 있고, 이 성안 마을을 성내라 한다. 성내의 서편을 현 서촌리에, 동편을 읍내리에 속하게 하였다. 읍내리는 장기면의 소재리로서 우체국, 파출소, 농업협동조합등의 공공기관과 장기향교, 근민당, 척화비, 죽성제 등이 있으며, 느티나무 당수에 동제를 모신다. 이 읍성의 남쪽으로 뻗은 산을 용마산이라 하고, 이 산 아래 마을을 용전이라 한다. 용전 동편에 죽성과 하성이 있으며 죽성과 용전 사이에 서원마을이 있다.
☞성안[城內]
옛 장기읍성 안에 있는 마을이며, 성을 동서로 양분햇을 때 동편는 동부리로 현 읍내리 소속이며 서편은 서부리로 현 서촌리에 해당 된다
☞용전(龍田)
읍성의 남쪽에 위치하며, 이 마을의 뒷산이 용마산으로 이에 유래하여 용전이라 하였다. 죽성에 이어 대나무가 많으므로 죽전이라로도 부르나 이곳 주민들은 용전이라고 부르고 있다.
☞서원(書院)마을
죽성과 용전 사이에 우암 송시열 선생을 기리는 죽림서원(竹林書院)을 창립하자(1707), 이 곳을 서원이 있는 마을이라하여 서원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말이 줄어 서원말, 서말이라고도 부른다.
☞죽성(竹城)
읍성 남쪽 아래로 대나무가 마치 성곽을 이루어 놓은 듯이 많이 있어서 죽성이라 한다.
☞하성(下城)장터
장기읍성 동문을 따라 내려오면 현 장기면사무소가 있는 곳과 장기초등학교 입구에 마을이 있어, 읍성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성이라 한다. 이 하성 지역에 성내의 저자거리(장기읍성 북문쪽, 현 서촌1리 마을 회관 앞)에 있었던 시장이 옮겨지면서 장터가 되었다. 오늘날 장기농협에서 장기초등학교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여기 있던 시장을 1948년에 임중 2리로 옮겨 새장터라 부르게 되자, 읍내리에 있었던 옛 시장터를 구장터라 부르고 있다.
마현리(馬峴里)
장기면의 진산인 동악산의 한 지맥이 동주하다가 옥녀봉을 이루는데, 이 옥녀봉 동남향에 형성된 마을이다. 장기천은 서에서 동으로 흘러 동해에 흐른다. 장기천 건너에는 현내들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향교가 위차한 곳으로 문장가가 많이 나왔다 하여 명장(明章)이라 불리었으며, 이 명장을 상명,중명,하명으로 나누었다. 조선조 태조 5년(1396) 장기향교를 창건하자 상명을 명장이라 하고, 중명, 하명으로 나누었다. 조선조 태조 5년(1396) 장기향교를 상명을 명장이라 하고, 중명.하명을 합하여 교동이라 했다. 임진왜란시 장기향교는 소실되어 곧 중건(1600)되었으나 나중에 귀석곡(지금의 장기초등학교 동편)으로 옮겨가고(1725) 그 자리에는 임란 공신 약우 이눌(若愚李訥)공의 유허비가 있다. 장기란 읍호도 마산촌이란 명칭에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송시열(宋時烈)선생이 유배되어 살던 집의 주인인 오도전(吳道全)이라는 이가 썼다는 글에 읍호지자촌명지마자사유의미명(邑號之字村名之馬字似有意味命)이라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마현리에는 송시열 선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장기초등학교 경내에 있으며, 임란 때의 충의지사 약우 이눌 공을 기리는 삼명서원및 장기초등학교가 있다.
금곡리(琴谷里)
수양산(181m) 남쪽 골을 따라 기밀[今日]들을 이루고, 그 옆으로 상금, 중금, 하금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동으로는 영암리에, 서로는 마현리에 접하고, 남으로 장기천(용암천)이 닿는 곳에 용암마을이 있다. 하금 서쪽 부침재 망불령(望佛 嶺)이 마치 용과 같이 길게 뻗어 있어서 용암이라고 하며, 전설이 깃든 할배바위, 할매바위가 서로 등지고 있다.
☞기밀[今日]
조선 명종때의 선비 허진수(許進壽)라는 분이 이 곳에 기거하면서 동해 일출을 보며 거문고를 탓다고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용암(龍岩)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용암이라 한다. 금곡리에는 허진수를 제향하는 금산서원과 삼효각, 죽와정등이 있다.
영암리(靈岩里)
수양산 지맥이 남으로 흐르는 동편 기슭에 동해와 접하면서 수용포, 관암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서로는 금곡리와 남으로는 신창리에, 북으로는 대진리와 경계를 접한다.
☞갓바위[冠岩]
영암리의 중심마을로 북쪽의 수용포라는 초진이 있었던 곳이라 전해진다. 영암3리이다.
신창리(新倉里)
장기천 하류의 넓은 현내평야(1,100ha)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신양과 독산이 해풍을 막아주는 해안에 죽하마을이 있고, 그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대양마을과 창암마을이 있다.
☞신양(新陽)
원래 이 지역이 바다였을 때 배가 드나드는 곳이라 하여 뱃머리, 배물, 볏말 등으로 불리며 이 곳이 들판으로 바뀌자 새로 생긴들이란 뜻에서 신평 또는 신양으로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시 오성팔현의 위패를 권안 시켰다는 성판 권안 유허비 성판권안유허비(聖板權安遺墟碑)가 있다
☞죽하(竹下)
옛날 이 마을에 무늬가 고운 담뱃대 재료로 쓰이던 소상반죽(瀟湘班竹) 이라는 대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마을이다. 영천서 왔다는 전설을 간직한 독산이 있다
☞대양리(大陽里)
동해바다와 접해있는 마을로 아침에 큰 태양을 맞이하는 곳이라하여 불려진 명칭이며 매년 3월에 동제를 지낸다.
☞창바우[倉岩]
이 마을 앞 바다에 곳집같이 생긴 바위에 연유하여 불리어진 마을이다. 매년 정월과 6월에 동제를 모시고 있다.
양포리(良浦里)
경주시와의 경계를 이루는 감재산[枾嶺山](286m)에서 발원된 수성천이 동북 방향으로 흘러 양포만에 이르는데, 이 만을 끼고 발달한 마을이다. 양포는 수질이 좋아 일찍이 냉동공장이 건설 되었으며, 항구로서의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남북으로 연결된 감포-구룡포간의 도로와 양포에서 포항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어서 교통의 요충이기도 하다.
☞치진리(治津里)
옛날부터 송어가 많이 잡혀 송어구미방(松魚九味坊)이라 부르던 것을 1873년 이후로 마을 이름을 확정하면서 제일 먼저 생긴 마을이며, 중심마을이였으므로 치진리라 하였다. 현재 영일수협 장기지점이 있는 곳이다
☞토계(土溪)
양포교회가 있는 마을로 수성천의 하류로서 토사가 쌓여 이룩된 마을이라 하여 토계라 한다.
☞갈밭각단
양포교회에서 수성천 건너편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옛날 이 곳에서 갈대가 많이 우거진 곳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막각단
수성천과 동해바다가 마주치는 남쪽에 고기잡이에 필요한 어막이 늘어져 있어서 막각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한다.
☞양월리(良月里)
양포 서편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달이 뜨면 제일 먼저 달빛이 비치는 곳이라 하여 양월이라 한다. 양월리를 양포 1리로, 갈밭각단과 막각단을 합하여 2리로, 토계를 3리로, 치진리를 4리로 한때 부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5개 자연 부락을 양포리로 통합되었다. 양포초등학교가 있으며, 효자 장인풍(張仁풍 )을 기리는 정효각이 있다.
계원리(溪院里)
감재산[枾嶺山]의 한 지맥이 동으로 뻗쳐 연화산을 이루는데, 연화산 동쪽 산기슭과 동해에 임한 곳에 마음이 형성되어 있다. 황계리와 원당병합하여 계원리라 하였다.
☞황계리(黃溪里)
지금의 계원 1리로 동해바다로 돌출한 곳에 형성된 마을이다.
황계리에는 계원초등학교에서 1995년 격하된 양포초등학교 계원분교장이 있으며, 양포무인등대 및 연화산정에는 옛 복길봉수대의 터가 남아 있다.
☞소봉대(小峰臺)
황계리에서 해안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면 육지의 돌출부가 있다. 경치가 좋을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묵어 갔다는 얘기가 있다. 복길봉수대의 전초 역할을 하였다 한다.
☞원당(院堂)
일명 대원이라고도 한다. 또한 이 곳은 옛날 평안원(平安院)이 있던 곳이라 하여 대원 또는 원당이라 한다.
두원리(斗院里)
감재산의 한 지맥이 동으로 뻗쳐 연화산을 이루어 경주시와 포항시를 가르는 경계를 형성한다. 장기면의 최남단에 위치한 마을로 원하, 지경, 두내 등 세 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원하(院下)
계원리에 있었던 옛 평안원 아랫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와전되어 오날개, 원화(原花)라고도 한다.
☞두내(斗內)
두 개의 내가 만나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두내라 하였으며, 지형이 둥글고 오목하여 마치 말(斗)모양 같다고 하여 두내라 부른다 한다.
☞지경(地境)
경주시와의 경계되는 마을이라 하여 지경이라 부르게 되었다. 골짜기의 풀들 붉은 빛을 띠므로 적석 또는 석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수성리(水城里)
감재산에서 발원하여 수성천이 북동쪽으로 흘러 양포만에 이르는 수성천 좌우로 감재(枾嶺· 洞), 소매기, 원방, 널목, 성황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 감재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 마을이 없어졌다.
☞소매기
감재와 원방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작은(小) 매기(두들)라는 뜻이다.
☞원방(元坊)
수성에서 맨 처음(元) 생긴 마을(坊) 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널목
지금의 수성리 중심마을이며, 작은 매기에 비하여 넓고 큰 매기(목)라는 뜻으로 널목이라 한다. 옛 지명에 판공(板孔)이라고도 한다.
☞성황(城隍)
임중리와 수성리를 잇는 고갯마루에 산재해 있는 마을로 옛 이 곳에 성황당이 있어서 불리어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의 공신 학포 정유서(學圃 鄭維瑞), 유록(維祿) 형제의 유허비가 있다.
임중리(林中里)
영취산 남동기슭으로 십리장림 임중숲이 이어지고, 동북쪽에는 현내들이 장기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되어 있다. 임중숲 남쪽을 숲안이라 하여 현재의 임중 1리이고 북쪽으로 장기천의 하천변을 개간하여 장터를 만들었다 하여 새장터(新市場)라 하며 임종 2리라 한다. 임중숲은 인공으로 조성한 오래된 숲이었으나 1967년도 농토 개간을 위하여 벌채하고, 지금은 장기중학교 경내에 20여 그루의 고목이 남아 있을 뿐이다.
☞숲안[林中]
원래 숲안이라 하였으며 왜미기, 덕림, 남아, 수영골, 외촌, 평림, 숲걸(숲거리)의 마을을 임동내 칠동이라 했다. 지금 역골이라 부르는 곳은 옛 봉산역(峰山驛)이 있었던 곳이다. 이 역은 경주의 조양역과 연일의 대송역과 연결되었다. 임중리에는 고려 충선왕시 오도안찰사를 역임한 계헌(癸軒) 오방우(吳邦佑) 공을 제향하는 덕림서원과 덕계 나주 임재화(林再華)공의 유허비각인 덕미각(德美閣)과 효자 김사민(金士敏)을 기리는 정효각및 의사 만취 정치익(鄭致翼)의 추모비가 있다.
☞새장터
1948년 장기초등학교 입구에 있었던 시장을 이 곳으로 옮겨 '새장터' 라 하며 현재는 임중 2리이다. 그리고 1949년에 설립된 장기중학교가 있다.
방산리(芳山里)
삼봉산 한 지맥이 남동으로 내려오다 묘봉산에 이르고, 묘봉산 마주보는 동쪽에 망해산(250m)이 있다. 묘봉산 아래에 괴정이 있고, 망해산 아래에 평동이 있다. 두 마을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이 만나는 곳에 육송정이 있고, 육송정 동남에 팔어실이 있고, 팔어실에서 방일천 건너편 동악산 아래에 거산이 있다. 거산, 팔어실, 육송정을 방산 1리라 하고 평동, 괴정을 방산 2리라 한다.
☞거산(巨山)
동악산(252m) 서쪽 산 기슭에 있는 마을로 큰 산(동악산)을 등지고 있다 하여 거산이라 한다. 고려조 기구현( 鬐丘顯 ; 丘는 立의 오기라 추측된다) 장평부(長坪府) 의 현기지라 전해진다. 그리고 달성서씨의 동산재(東山齋)가 있다.
☞팔어실(八魚室·八於室)·방일(芳日)
여덟 마리의 고기가 노니는 형국이라 하여 팔어실이라 하며,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팔어곡부곡에서 연유하여 팔어실이라고도 한다. 광서(光緖) 년간(1875-1908) 에는 방일(芳日) 이라고도 하였다. 방일과 거산을 합쳐 방산이라 한다. 방산 팔경이 팔어실을 중심으로 동악조양(東岳朝陽), 증봉석조(甑峯夕照), 율오청풍(栗塢淸風), 송정명월(松亭明月), 응봉숙무(膺峯宿霧), 관등장송 (觀嶝長松), 석암시종(石庵時鍾), 망산초가(望山樵歌)이다. 경주김씨의 안산서원과밀양박씨의 봉덕서원 있다.
☞육송정(六松亭)
팔어실 북쪽 고석사 입구에 있는 마을로 경치가 좋고 소나무 정자가 좋다 하여 육송정이라 한다.
☞평동(平洞)
옛날 고씨, 남씨가 사이좋게 살았다 하여 평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며, 동국여지승람에 평장사(平章寺)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모아 동명과 절이름이 연관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신라때 창건하였다는 고석사가 있다.
☞괴정(槐亭)
큰 괴목(느티나무)이 있었으므로 괴정 또는 괴동이라 한다. 서쪽 골짜기에 석남사지(石南寺址)에는 남파대 사비(南坡大師碑)가 있다.
산서리(山西里)
묘봉산 동남과 만리성산 동쪽으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새터, 서화마을이 있고, 감재산 북동쪽으로 월산마을이 있다. 이들 하천들은 동악산 서남족 망매(網梅)에서 만나 장기천으로 흐른다. 이 세 마을을 산서리라 한다.
☞새터[新基]
최국원이라는 사람이 영덕으로부터 이 곳에 새로 터전을 마련하였다 하여 새터라 한다. 경주 장포 최국원(崔國元)을 기리는 구산재(龜山齋)와 최학진(崔鶴桭)의 효자각이 있다.
☞서화(瑞花)·서화실(瑞花室)
산서리 중앙에 있는 마을이다. 매화나무에 얽힌 전설에서 상서로운 꽃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화 또는 서화실이라 한다. 유독 매화나무와 얽히는 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 고려 예조판서를 지낸 경주 수은 김충한(金沖漢)과 그의 7대손 서계 김응장(金應章)을 추모하는 서산서원과, 김시상(金時相)의 효자각이 있다. 1996년 폐교된 산서초등학교 터가 남아있다.
☞월산(月山)
초승달이 산을 지나 다시 출현한다고 하여 함월산이라 하고, 그 골짜기를 음월곡이라 한다. 이에 연유하여 마을을 월산이라 한다. 인눌산에는 1905년에 창건된 범인사(梵印寺)가 있다.
서촌리(西村里)
동악산 북쪽 망해봉에서 남동쪽으로 내려오는 푸지산 기슭에 노곡동과 명촌, 장기읍성 내 서쪽 일부를 서부라 하여 서촌리에 포함시키고 있다. 산으로 둘러싸여 농토가 적으며, 노곡 앞 도로는 감포-포항간을 연결한다. 행정구역상 서부와 명촌은 1리이고, 노곡은 2리이다.
☞서부(西部)
서부는 장기읍성내 서쪽 일부를 서부라 하였으며, 지금도 동헌터,창고터,옥골,저자거리(시장터),여제당 등의 유적과 명칭이 남아 있다.
☞명촌(村村)
옛 장기읍성 북쪽 바로 아래에 관속들이 많이 살아서 그들 마을을 높여 부른 이름에서 명촌이라 한다.
☞노곡(蘆谷)
일명 기일(起日)이라고도 하며, 이 기일을 나누어 윗길, 아랫길이라고도 한다. 갈대가 많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노곡이라 하였다 하며, 해가 돋으면 제일 먼저 햇빛이 비쳐지는 곳이라 하여 기일이라고도 한다. 만취(晩취) 엄주홍(嚴柱洪)의 유허비와 옛 장기현의 사직단터(읍성 서쪽)가 있다.
금오리(金吾里)
망해봉 동쪽으로 기울어진 곳에 창지리가 있고, 남으로는 서촌리, 그 가운데 동으로 흘러 내린 곳에 금오가있다. 남으로 흐르는 신계천이 금오에서 꺾이면서 금오들(서면들)을 형성한다. 서촌리 푸지산 지맥을 따라 동으로 가면 망월산이 있고 아래에 범오가 있다.
☞쇠골[金谷]·쉬골
쇠가 많이 생산되었다 하여 쇠골이라 불렀다고 하며(쇠가 생산된 유적은 없음), 옛날 과거 보러가는 선비가 지나가다가 쉬어 갔다고도 하여 쉬골이라고 한다.
☞범오(凡吾)·버밑·보밑
범오라는 명칭에서 유래했다고 하나 오히려 범오란 명칭이 있었기에 범오못(凡吾池)이라 칭하였을 것이다. 범오란 말의 뜻과 유래는 분명치 않다.
대진리(大津里)
수양산 북쪽 지역 학곡천(灘川) 하류에 동해와 맞닿은 곳에 대초전, 드망, 매진의 3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북으로 뻗은 도로가 북으로는 구룡포, 남으로는 경주시 감포로 통한다. 해안에는 백사장이 있고 수심이 얕아서 해수욕장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다.
☞대초전(大哨田)
대추나무가 많다 하여 조전(棗田), 또는 대초란 음을 빌어 대초(大哨)라고도 표기하였으나 대초전(大哨田)의 오기인 듯하며, 일명 해어포(海禦浦)라는 명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영암리의 수영포와 더불어 수군만 호진의 진보(鎭堡)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드망
고기잡은 후리망을 많이 한다 하여 붙여졌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매진(梅津)
매화나무가 많아서 매진이라 하였으며 대초전과 매진을 병합하여 대진리라 하였다.
모포리(牟浦里)
뇌성산에서 남으로 기울어진 곳에 칠전마을이 있고 칠전마을 동쪽 동해의 둘출부에 형성된 마을이 모포리이다.
☞모포(牟浦)
이 곳은 어느 지역보다도 봄에 보리가 일찍되는 포구라 하였고, 보리가 제일 먼저 되는 구석이라 하여 버리꾸지[包衣浦]라고도 하였으며, 바위가 동해로 돌출하여 구석을 만들고 있다 하여 바우꾸지[巴衣浦]라고도 하였다. 뇌성산 봉수대를 비롯하여 고려 말엽부터 수군만호진이 설치되었다가 효종 9년(1658)동래로 이진하였다.
☞칠전[七田·漆田]
뇌성산 기슭에 7가지 보물 뇌록(磊錄), 인삼(人蔘), 오합(蜈蛤), 유뢰(維瀨), 봉청(蜂淸), 자지(紫芝), 동철(銅鐵)이 생산되는 곳이라 하며, 또 이 산에는 옻나무가 많다하여 칠전(漆田)이라고도 한다. 국가중요민속자료 제 187호인 모포줄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1962년 봉산초등학교 모포분교로 출발하여 1967년 초등학교로 승격한 모포초등학교가 있다.
학계리(鶴溪里)
뇌성산 서남쪽에 위치한 열, 재필, 학잠 등 3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동해면 조항산 남쪽 죽정리에서 서쪽으로 기울어진 물은 정천, 신계를 거쳐 이 곳으로 흐르며, 남으로 기울어지면 학곡을 거쳐 학계리에서 만나게 되어 하천쪽이 넓어지면서 대진천을 이루어 동해로 흐른다.
☞열·얼개[乙溪]
지금의 학계리의 중심마을로 신계천과 학곡천이 마주치는 여울이라 하여 그렇게 부르고 있다.
☞재필(才必)
열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 곳에 재피나무가 많아서 재필이라고도 하고, 이씨 집안에 재주있는 분이 많이 태어나서 이 곳에 태어나는 사람은 재주가 반드시 있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학잠(鶴잠)
이 마을은 학계리의 입구가 되는 마을로 박사당재라 불리는 고개밑 양지바른 자리에 위치한 마을이다. 박사당재는 마을 뒤 고개 위에 옛 박씨 집안의 사당에 있었다고 한다.
학곡리(鶴谷里)
투구산 동남쪽에 형성된 마을이 죽실이며, 남으로 내려오면서 형성된 계곡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박실이다. 신계천과 마주치는 곳에 학삼마을이 있다.
☞박실[朴谷]
죽실에서 흘러내리는 골짜기기 길고 마치 길죽한 박모양과 같다고 하여 박곡, 박실이라 하였다고 하며, 박씨가 살던 곳이라 하여 박곡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상류뷰터 차례로 웃박실(윗), 중간 박실, 아랫박실이라 한다.
☞학삼(鶴三)
이 마을 북쪽의 산에 학 세 마리가 날아와 장군봉에서 놀았다 하여 이 산을 학삼산이라 하고 마을도 학삼이라 하였다. 임란공신 창녕 죽계 이대임(李大任)공을 기리는 학삼서원과 신도비가 있다.
신계리(新溪里)
대곡리 용수산에서 남으로 한 지맥이 내려오다가 등봉산과 장군봉(학삼산)을 이루는데, 이 두산서쪽 기슭에 말골, 귀밑, 바위밑, 신덕이 있고, 대곡에서 내려오는 신계천 남쪽에 솔밭밑 마을이 있다. 마을 앞을 지나는 포항-감포간 도로가 있다.
☞말골[淸谷]
마을의 지하수가 아주 맑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귀밑·구계(九溪)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마치 사람의 귀와 같이 생겼다 하여 '귀밑' 이라 불려졌으며, 들 한가운데 우물을 파고부터 마을이 쇠퇴하였다고 한다. 아홉 구비나 돌아 흐르는 시내가 있어 구계(九溪)라고도 한다.
☞바위밑·호암(虎岩)
옛날에는 창계, 청계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범같이 생긴 바위 아래라 하여 호암이라고도 한다.
☞신덕(新德)
호암마을 동쪽으로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신덕이라 하였다.
☞솔밭밑
신라때는 큰 마을이었다고 하나 사람이 별로 살지 않다가 포항-감포간 도로가 개통되면서 많이 살게 되었다. 신계리에는 암제 이운기(李運基)의 설보기념유허비와 숭덕비가 있고, 학암 김용동(金容棟)의 학덕을 기리는 유허비가 있다. 1916년에 설립된 신계침례교회가 있다.
창지리(倉旨里)
망해봉 북동쪽에 옥녀봉이 우뚝 멈추고 그 동편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마을이다. 상정리 서남으로 기울어진 계곡으로 흐르는 신계천이 대곡을 거쳐 마을 동편으로 흐르고 있다. 상창, 중창, 서진마을을 창지 1리라 하고, 반금, 솔배기, 장재끝, 새밭골을 창지 2리라 한다. 옛 봉산면 사무소는 117-1번지이고, 봉산면 지서터는 창지리 195-3번지이나 건물은 헐리고 밭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연암 이상근(李相根) 공의 학덕을 기리는 유덕비가 있다
☞중창(中倉)
창지리의 중심마을이며 옛 봉산면의 소재지였다. 옛날 이 곳에 군량미를 저장하는 사창이 있었다고 하여 창지리라 불렀다고 한다.
☞서진(西陳)·선얖
현재 장기초등학교 봉산 분교장이 있는 마을로 봉산(蓬山) 서쪽에 위치한다하여 서진(西陳)이라고도 하고, 산 얖( '옆' 의 방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선얖으로 불린다.
☞바위밑·호암(虎岩)
옛날에는 창계, 청계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범같이 생긴 바위 아래라 하여 호암이라고도 한다.
☞반금(反琴· 反今· 返禽 )
옥녀봉 동편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의 지형이 거문고를 엎어둔 것과 같다하여 반금(反琴)이라 부른다.
☞솔배기(솔매기)
반금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이 등성이에 소나무 많이 있던 두들(배기, 매기)이라하여 솔배기, 또는 솔매기라 붙여진 이름이다.
☞장재끝
반금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지형을 사람의 신체에 비유하여 옥녀봉은 머리이고, 반금은 허리 부분이고, 이 마을은 다리 부분인 정강이라 한다. 정강이의 끝부분에 해당된다고 장재끝이라 한다. 1962년 설립된 학삼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가 있다
☞새밭골[新田谷]
옥녀봉 남쪽 산등성이를 개간하여 농토를 일구고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새밭골이라 한다. 이 곳에는 오래된(300년이상 추정) 고가가 있다
대곡리(大谷里)
성적산(聖蹟山) 동편으로 흐르는 하천을 따라 대곡, 상대, 중대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용수산 동쪽 산기슭에 용수골이 있다. 상대골과 용수골을 합치면 매우 길고 넓다 하여 대곡(大谷), 한실이라 한다.
☞대곡[竹谷]
대나무가 많이 있다하여 죽곡이라 하였으며, 근간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상대(上大)
죽곡에서 흐르는 계곡과 지통곡의 계곡이 마주치는 곳에 남향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이며, 큰 골짜기에 위치한다 하여 한실[대곡]이라 한다.
☞중대(中大)
정천리에서 흐르는 하천과 상대천이 흐르는 곳에 새들(대곡들)이 펼쳐지고 장기-포항간 도로가 들판을 가로 지르고 있다.
☞용수곡(龍水谷)
옛날 용이 살다가 등천을 하였는데 그 곳을 용소라 하고 용이 머물던 곳을 용굴이라 하고, 용이 등천한 산을 용림산, 또는 용수산이라 한다. 따라서 마을 이름도 용수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용수곡 입구에 범에 물러가는 남편을 구한 박춘무(朴春茂)의 처 김해김씨의 정열비가 있다.
죽정리(竹井里)
조항산 일지맥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투구산에 머무는데 그 산등성이에 형성된 마을이 상정리이며, 투구산 남서로 기울어진 골짜기를 따라 중정리가 있고, 남동쪽으로 기울어진 봉왕산 기슭에 죽실(竹實·竹室)마을이 있다. 이 곳에서 발원한 죽실천은 동남으로 흘러 박곡으로 이어지고 투구산에서 남서로 흐르는 중정천은 대곡리를 거쳐 학곡 앞에서 만나게 되어 대진 앞 동해에 이른다.
☞상정(上井)
죽정리의 중심마을이며 지하수가 풍부하여 옛부터 물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나 있다. 상정,중정,하정마을이 있으나 하정마을은 정천리에 속한다. 향단 이선수(李宣수)를 기리는 정방제사가 있으며, 한말 의병장 장헌문(葬憲文) 장군의 출생지이다.
정천리(井泉里)
정족산의 북동쪽으로 펼쳐진 참샘이, 장승배기, 퉁점을 정천1리라 하고, 냉천마을을 지나는 하천과 죽정에서 흐르는 하천과 만나는 곳에 정천2리에 속하는 하정이 있다. 서로는 오천읍과 북은 동해면과 경계를 이룬다. 정천리에는 운천 김윤찬(金潤瓚)의 효자비와 백운 김광화(金光華)의 충절유허비및 만취 이헌칠(李憲七)을 기리는 이요정(二樂亭)이 있다.
☞참샘[冷泉]
약물이 솟아나는 참샘이 있어 가뭄에 변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질병도 고친다고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퉁점[銅店]
옛날 이곳에 구리쇠가 생산되었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포항시 남구 동해면으로 되어 있다가 1995년 6월 21일 장기면 정천1리로 편입되였다.
☞장승배기
장기면과 오천읍의 경계인 세계원재 고갯마루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 장승이 세워졌던 곳이라 한다.
☞하정(下井)
원래 이곳은 가마솥 형국이라 하여 정방(鼎坊)이라 불렀으나 근년에 들어와 죽정리에 속하는 자연부락인 상정, 중정 아랫쪽에 위치하므로 하정이라 부른다. 옛 모이현원(毛伊峴院)이 있었던 곳이어서 원대, 원들 등 이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