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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밀라노 칙령
성경 읽기를 여러 번 거듭하면서 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예언서를 읽고 이해가 되었을 때 느끼는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이 세계역사라는 것입니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와 전쟁사 8권, 에드워드 기번의 (역사)로마제국쇠망사 6권, 시오노 나나미 씨의 (인간) 로마인 이야기 15권, 십자군 이야기 3권, 로마 멸망 이후 지중해 세계 2권도 읽기를 추천합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는 로마사의 중간에서 시작하고 로마인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역사적 내용 중에 생략되는 부분이 있어서 둘을 읽어야 완성되는 것 같아서입니다.
역사 인물 중에 대제는 유럽인들의 시각으로 정해진 느낌입니다.
B.C.4세기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 이슬람세력을 유럽에서 물리친 후 로마의 페트로스(베드로) 템플에서 기도 중에 교황 레오Ⅲ에 의해(사전 거래 후의 연출) 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 800년에 신성 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한 샤를마뉴(찰스 마르텔) 로 3명이지요.
불가리아 국경 근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나이수스 (니시로)에서 백인 대장 시절에 발칸의 빈농 출신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로마 장병들에게 숙소와 술을 제공하던 선술집 딸인 어머니 Helena에게서 275년(여러 설 중에 유력한 해)에 출생하였다지요. 국경지대라서 자주 출몰하는 북방의 야만족과의 전투를 보면서 자랐다지요.
285년 디오크레시아누스 황제가 로마제국의 통치를 양분하여 막시미아누스에게 서방의 황제로 세울 때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장군으로 승격하여 막시미아누스 휘하에서 라인강 방어선에 근무하는 중에 293년 다시 4두 정치로 바뀌면서 동방의 정제는 디오클레시아누스 부제는 갈레리우스였는데 부제가 되는 조건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 발레리우스와 결혼해야 했다지요. 서방은 정제에 막시미아누스에 부제로 승격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정제의 의붓 딸 데오도라와 재차 결혼하게 되면서 콘스탄티누스의 생모 헬레나는 이혼당하였다지요. 동방의 정제라지만 로마제국의 모든 실권은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가 쥐고 있으므로 함부로 이의 제기하거나 반대의견을 제시하면 신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때라서 아무리 정든 아내지만 이혼하고 정략적 결혼에 응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콘스탄티누스는 18세에서 28세까지 동방의 정제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의 수도 항구 도시 니코메디아에서 볼모 신세로 살아야 했나 봅니다.
초기 기독교 대 박해자로 악명높은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의 303년 칙령으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잔혹한 탄압과 재산까지 빼앗는 실상들을 목격하면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지요.
동방의 부제 갈레리우스와는 이집트와 페르시아 전투에 부하 장수로 참가해서 군인으로서의 역량을 쌓기도 했다지요.
305년 동방과 서방의 정제들이 자진 퇴위하여 정제 자리에서 물러나는 때를 기회로 실권을 쥐고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청원하여 서방 정제로 승격한 아버지 곁으로 보내 달라고 하였는데 허락되어 29세 때 아버지 밑에서 장군으로 복무하면서 야만족 퇴치에 참전하여 장병들에게 지휘관으로서의 실력을 인정받게 되고 호감까지 쌓게 되었다네요.
아버지 곁으로 온 후 1년만인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여 장병들이 후계 정제로 옹립하였으나 308년 가을에 선제인 디오클레시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그리고 동방 현제인 갈레리우스 3인 회의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부제로 승인되었지요.
밀비우스 전투
부제에 정식 취임한 그는 정제로 가는 길에 최대의 걸림돌 공적 막센티우스와의 결전을 준비하여 312년 알프스 산을 넘어가 로마의 북부 플라미니아 가도 끝에 테베레강을 건너는 밀비우스 다리에서 격돌하게 되지요. 막센티우스 군은 일만팔천의 기병과 십칠만의 보병으로 다가오는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고 공격자인 콘스탄티누스 군은 보병 4만 기병 8천에 불과했지요.
복원된 밀비우스 다리(사진출처 :위키백과사전)
312년 10월 27일
병사들에게 전날 밤 꿈에 계시받은 대로 XP(ΧΡιστοῠ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두 알파벳을 합성한 글자를 방패에 새기게 하고 기습선공으로 몰아붙이자 난전 끝에 막센티우스 군이 밀려나게 되면서 진격하는 후방 군과 뒤섞여 중무장한 채로 수 많은 병사들이 테베레강으로 추락하는 중에 황제 막센티우스도 함께 추락하여 수장되어 버렸다지요. 다음날 시체를 건져 참수한 후 창끝에 그의 머리를 꽃아 로마로 행진하여 갔다지요.
전투경력이 부족한 데다가 유인 전으로 활용하려고 밀비우스 다리 옆에 부교를 설치하였는데 막센티우스 황제가 건너기도 전에 혼란 중에 병사가 부교에 맨 줄을 미리 끊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밀비우스 다리로 건너는 와중에 후방에서 전진하는 병사들과 밀려오는 후진과 섞여 혼전하다가 4배나 적은 콘스탄티누스 군에 대패한 것이라지요.
처음에는 막센티우스가 로마 성에서 장기 농성 전으로 나오면 병력의 수가 적어 거대한 로마를 포위하기에 불리한 콘스탄티누스가 척후병을 보내 막센티우스 군의 동향을 살피게 했는데 다행히도 로마 성 방어전이 아니라 앞장서서 대군을 이끌고 출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알프스를 넘어온 최악의 불리한 상황이지만 빠른 기동으로 결판을 내야 하는 그에게 승기를 잡을 절호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네요.
치밀하게 준비하고 작전의 각본대로 격돌한 밀비우스 다리 전투는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에 대한 빠른 대처를 하지 못하여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지배자 34세의 막센티우스 황제가 312년 10월 27일에 로마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지요.
원로원은 승리자 콘스탄티누스에게 정제 승격을 결의하고 황제의 개선문 공사를 착공할 때 신임 정제는 로마의 근위군단마저 해산했다지요.
삼십 육 세의 콘스탄티누스황제는 가슴속 야망을 실현할 한 단계를 더 내딛기 위해 전쟁 전에 먼저 이복 누이 콘스탄티아를 동방 정제 46세의 리키니우스에게 혼인 동맹으로 결속을 맺었지요. 결정적 순간에 배후를 공격당할 염려 없이 막센티우스와의 전투를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콘스탄티누스 가계도 요약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306년 7월 25일 사망) | |||||
본처 | 황후 | ||||
헬레나(여관겸 술집 딸) | 데오도라(황제디오클레시아누스의 의붓딸) | ||||
↓ | ↓ | ||||
콘스탄티누스대제↘ |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 |||
본처 | 황후 | ||||
미네르비나 | 파우스타(막시미아누스의 딸) | ||||
↓ | ↓ | ||||
부제 크리스푸스 | 콘스탄티누스Ⅱ | 콘스탄티우스Ⅱ | 콘스탄스 | ||
아버지와 같은 처지로 출생하여 부제로 활약하며 동방 정제와의 전투에서 해전을 지휘 승리하여 아버지의 신임이 쌓여 갈 때 황후 파우스타와의 간통혐의로 326년 이스트라반도 끝 풀라 감옥에서 29세로 비밀처형됨 | 317년부제 337년 정제 340년 피살 | 부제324년 337년정제 361년병사 | 333년부제 337년 정제 350년 피살 | ||
단독황제로 등극할 마지막 걸림돌 동방 황제 리키니우스와 전쟁 시 해전을 장남 부제 크리스푸스에게 맡겼는데 월등하게 우월한 상대를 지혜롭게 승리하는 것을 보고 황제가 흡족해 할 때 황후 파우스타가 자신의 세 아들의 미래가 불길함을 직감하고 콘스탄티누스의 장남 크리스 푸스와의 불륜설을 터트렸고 후에 어느 날 황제의 목욕장으로 들어갔을 때 황후의 목욕을 거들던 시녀가 나가자 갑자기 문이 잠기고 뜨거운 증기 때문에 숨을 거두었다지요. |
312년의 가을 밀비우스 전투 전해인 311년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가 5월에 8년 전의 반기독교적 조처들을 철회하고 세르카에서 질병으로 사망하자 동방 정제를 서방 정제인 리키니우스가 가져가는 바람에 서방 정제 자리가 공석일 때 312년 승리자인 서방의 카이사르 콘스탄티누스가 원로원 결의로 서방의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었다는 것이라지요.
밀라노 칙령
밀비우스 전투의 승리로 사실상 로마의 실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은근히 과시하면서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를 밀라노로 초빙하여 합의하에 313년 6월 15일 칙령 발표 기독교 세력이 미미한 서방보다 많은 동방에 대한 미래 포석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지요.
내용
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어떤 종교든 상관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완전하게 인정받는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애로서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은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 주기 바라면서... ... .
몰수된 뒤 경매에 부쳐진 교회 재산을 사들여 소유하고 있는 자는 그것을 반환할 때 국가로부터 정당한 값으로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여기에 명기한다.
디오클레시아누스 전임 황제의 혹독한 대박해 때 몰수된 교회 재산의 반환과 국가보상까지 약속하였다. 특히 기독교는 서방보다는 동방 쪽에 그 수가 많았고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 국가보상이 집중되었다고 하네요.
기독교 대박해의 발단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가 기독교 박해를 시행하게 된 동기는 주로 동방에서 기독교에 선교 된 군인들이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말씀에 순종하여 전쟁 수행을 거부한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이어서 군대 내에서는 미트라교를 밖에서는 태양신을 섬겨야 한다는 명령까지 거부하는 사태에 이르자 심각성을 인식하고 군사와 관리들에게 신들에게 희생제를 지낼 것을 명령하고 거부하면 파면 조치를 6년간 시행 드디어 303년 2월 24일 칙령으로 제국 전역의 기독교회 건물을 파괴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등 기독교인들을 잔혹하게 처벌하면서 성직자 전원을 체포 구금 평신도들까지 투옥되어 희생제를 드리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가혹한 벌을 내렸다지요.
발단은 갈레리우스가 302년부터 303년 겨울까지 니코메디아에서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에게 반기독교적 조치를 요구하였으며 이로 인해 심한 매질과 화형 사자 밥이 되는 끔찍한 박해가 이어졌다고 하네요.
후속 조치들
동방의 리키니우스가 교회 재산 반환문제에 소극적으로 나오자 324년 마지막 걸림돌인 리키니우스를 제거하고 단독 황제가 되자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황제 때부터 상속된 사유재산 중에 로마의 최대 지주인 황제의 경작토지를 교회에 기증한다고 선포
성직자 들의 독립 공인
성직자 계급의 독립을 황제 령으로 강력후원함
모든 공무원이나 군인들은 의무적으로 국가종교 신들에 대한 제의에 참석해야 하는데 이를 면제해 주고 군무와 공무에서 배제하여 독립적으로 오로지 교회업무에만 집중하도록 조처함.
일요일 휴업령
주님께서 부활하신 일주일의 첫째 날을 휴업하도록 선포하여 로마 태양신 축제일의 로마적인 것을 눌러 버리려고 하였는지 일요일 휴업령을 선포하여 군인 공무원들 노예들까지 쉬게 하여 자유로운 기독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배려함
끊임없이 침략해 오는 게르만 고트족들에 대한 방어를 고려해서 자신은 군 총사령관으로서 통제력 발휘를 위한 통합을 고려하여 침례를 받지 않고 그대로 폰티픽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로 국가 제관의 지위를 내려놓지 않고 있었지요.
천도
우상과 여러 신들의 도시 로마를 버리고 자신의 기독교적 이상을 실현할 새로운 수도 비잔티움으로 천도를 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330년 5월 11일 완공식을 거행하지요.
6년 동안 도시조성공사를 하여 로마시처럼 14개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원로원과 포름 상하수도 시설과 특히 거대한 지하 물 저장고를 완비하여 테르마이(공중 목욕장)와 12사도 교회를 건립하고 대규모의 시장 건축과 서커스 전차 경주장 육상 경기장도 갖추고 정무관들의 새 수도로의 이전을 장려하여 세제와 저택공사에 필요한 자재까지 혜택을 주었다네요.
정리
310년 자신의 장인이며 궁정에 살며 콘스탄티누스가 죽었다고 하며 도전하는 고문관인 막시 미아누스를 마르세유에서 체포 강압하여 자살하게 함
312년 10월 27일 황후 파우스타의 오빠 막센티우스 밀비우스 다리 전투 중 테베레강으로 추락 익사함
315년 이복 누이 콘스탄티아와 결혼한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를 무찔러 자진 퇴위케 하고 야만 고트족과의 반란음모죄로 처형함
324년 다신교 제사 금지 이교의 재산을 몰수 베들레헴과 예루살렘교회 건축에 사용 풍기문란을 법률로 엄금하고 제례와 관련된 매춘금지를 명령 사제들에게는 교구 내의 면세와 사법 권한까지 부여함
326년 부제이며 장남 크리스푸스 비밀체포 아드리아해 이스트라 반도 끝 풀라 감옥에 감금 고문 사망케 함 죄명은 황후 파우스타와 간통혐의
326년 같은 해 20년 결혼 생활로 4자녀(딸 콘스탄티나포함)를 둔 아내 파우스타가 목욕장 증기탕에 들어갔을 때 밖에서 잠근 상태로 증기 가열로 사망함. (장남 크리스푸스와 간통혐의)
325년 니케아 공의회 주관
로마의 5대 교구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오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교구 중에 알렉산드리아 교구장 아타나시우스 대주교에 속해있던 사제 아리우스가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여 삼위일체설 교리에 어긋나자 파문 조치하였는데도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자 제국 내의 분열은 곧 파멸을 가져올 우려 때문에 황제의 심복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 주교 호시우스를 파견 조정하려 하였으나 정리가 되지 않자 황제가 325년에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황제가 의장이 되어 회의를 주관 ‘공동 커뮈니케’로 삼위일체설을 재확인 공표하였지요.
황제는 기독교의 통일을 중요시하여 공동 커뮈니케 서명을 거부하는 아리우스 동조자 2명을 이단(paganus=Pagus 촌놈에서 유래 )으로 하여 라인강 건너 고트족 땅으로 추방을 명하였다지요. (얼마 후 해제시킴)
정통 기독교 신앙으로 한 ‘니케아 신조’를 내놓고 같은 해 어느 금요일에는 안티오크에 모인 회중들에게 ‘사도들에게’라는 신학과 관련된 긴 연설을 하였다지요.
삼위일체설을 인정하는 교리에 정통한 황제로 세계사에서나 기독교 교회사에서 이바지한 공로가 지대하다고 하겠습니다.
337년 봄 5월 22일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출발 소아시아로 건너가 기독교도로 만들어 교세를 확장하기 위한 페르시아 원정을 출발 팔레스티나에 당도하여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았다지요. 부활절 직후부터 병이 중 해져 일어나지 못하고 니코메디아 황제의 저택에서 병석에 누워 니코메디아의 주교 유세비우스 주관 그동안의 죄과를 회개하는 임종 례를 드렸다지요.(교회사 유세비우스 아님)
지중해의 패권자 62세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었다지요.
그분의 유해는 로마의 전통적 황제들의 무덤이 아니라 새로운 수도 12 사도 교회 내 12 사도 관(棺) 옆에 13번째로 놓였다지요.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여사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예루살렘방문 예수님의 무덤과 여러 곳을 탐사한 내용은 생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