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이 노래는 가수 「하 수영」이 지난 1976년도에 불러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노래다. 그는 잘 생긴 얼굴에다가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여성의 심금을 울리며 무명가수의 설움을 단번에 날렸다. 애절한 가사와 부드러운 멜로디, 저음의 맑은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휘저으면서 곧바로 가요의 정점에 올랐던 것이다.
더구나 이 노래는 평생을 억눌려 지내며 시린 가슴을 부여잡고 죽도록 고생만 하던 아내들을 어루만져주는 청량제와 같은 노래였다. 그 내용은 참았던 설움을 위로하고 달래주는 희망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남편이 알아주는데 어찌 짠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하 수영」은 영광도 잠시,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활동이 제한되면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더니 그만 뇌출혈로 쓸어져 34살로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마치 한 많은 여인들이 세상을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요절한 모습이었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시린 손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 접어 다져온 이 행복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땀방울로 씻어온 나날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미운 투정 고운 투정 말없이 웃어넘기고
거울처럼 마주보며 살아온 꿈같은 세월
가는 세월에 고운 얼굴은
잔주름이 하나둘 늘어도
내가 아니면 누가 살피랴 나 하나만 믿어온 당신을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지난 6일 오후에 이 곡을 작곡했던 「임 종수」 선배를 만나 저녁 식사를 함께하였다. 명필에다가 시인이며 문화예술에 탁견을 가지고 많은 업적을 남긴 송 전지사가 주선한 자리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국악예술 고등학교의 교장으로 봉직하고 있는 현직 명창도 함께하여 가요와 창에 얽힌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원래 「하 수영」은 성악을 공부해 가요는 부르지 않고 팝송을 불렀다고 하였다. 우연히 그를 처음 만나 그의 독특한 저음에 반해 곡을 주게 된 것이다. 원래 고음은 연습을 통해 연마가 가능하지만 저음은 타고난 것이어서 쉽지 않은 자질이라고 한다.
이어서 『동백 아가씨』와 더불어 최고의 곡으로 유명한 『고향역』에 얽힌 일화를 상세히 들었다. 산골 마을을 떠나 그래도 도시와 가까운 형님의 집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통학 열차를 타기 위해 이십 리 산길을 뛰어 간신히 기차에 매달리면 차창 옆으로 바람보다 먼저 눕는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짓던 추억담이 눈시울을 적시게 하셨다. 이후 가수가 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수로서 성공하기엔 확신이 서지 않아 작곡으로 방향을 전환했다고 한다.
그 최초의 성공작이 「나 훈아」가 부른 『고향역』으로 바로 무명 작곡가의 설움에서 벗어났다고 하였다. 당시 인기를 누리던 「나 훈아」를 만나기 위해 3 개월을 레코드회사를 찾아가 기다린 끝에 만났다고 한다. 처음 제목이 ‘차창에 어리는 모습’이었고 가사도 매우 슬픈 내용이었다고 하였다. 이에 「나 훈아」 가수가 당시 막 유행하는 신나는 곡조로 편곡을 요청함에 따라 떠오르던 시골역의 코스모스와 기적소리를 연상해서 만든 곡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오늘날 까지 누구나 애창하는 국민가요가 된 이유는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어머니와 고향을 연상케 하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평소 「배호」 가수를 좋아한다. 노래방에 가서도 그의 노래가 우선이다. 물론 「나 훈아」와 「조 용필」의 노래도 좋아하지만 애처롭고 슬픈 곡조에다가 독특한 음색에 취하여 「배호」 노래를 즐기는 편이다. 더구나 일찍 요절한 사연이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면서 가끔 추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배호」를 처음으로 본 것은 1968년도 가을 이었다. 당시에는 극장을 무대로 공연을 하던 시기였는데 일대를 관장하는 선배의 배려로 고교 2년 학생이 변장을 하고서 공연을 본 일이 있다. 너무 노래가 좋아 마음속에 간직하였는데 몇 년 후 뜻밖에 그의 공연을 육사에서 구경한 것이다. 얼마나 기쁘고 기분이 좋았는지 틈나는 대로 그의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상급생에게 질책과 기합을 받고 반성문을 쓰기도 하였다. 아뿔사! 그러던 그가 신장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그해 가을 29살의 나이로 먼 세상으로 떠나가고 이젠 슬픈 노래만 남아 항상 애처롭게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한 때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가 누군가를 두고 많은 다툼이 있었다. 속으로 「조 용필」이라고 생각해 오다가 최근 들어 생각이 바뀌었다. 「조 용필」의 노랫말에는 나름 철학적인 내용에다가 젊은 시절에 온 힘을 다하여 목청을 다듬고 부침을 겪으며 성공을 한 그의 인생에 대한 점수를 주었던 것이다. 더욱 서울 올림픽을 전후로 부른 노랫말에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신념이 담겨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나 훈아」 역시 조 용필에 못지않게 뚜렷한 주관도 있는데다가 만인의 애인이던 「김 지미」와 이혼을 하면서도 선선하게 모든 재산을 넘겨주고, 세계 가요계 사상 유래 없이 먼 나라의 「소크라테스」 형님을 소환하였으며,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희생된 젊은 영혼을 위로하는 노래를 만들었던 그가 보통 가수를 능가하는 진짜 노력하는 가수였다는 생각으로 바뀐 것이다.
여하튼 작사나 작곡을 하면서 그 짧은 낱말에 정서를 표현하고 살아 숨 쉬는 멜로디를 악보에 담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이는 필경 위대한 시인과 작곡가의 작업에 필적할 일이다. 그만큼 온 정신을 집중하여 알맞은 표현을 찾아 썼다가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해서 나온 결실인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어렵지 않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지내다보면 영광의 세월은 소리 없이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그런 시간이 오지 않는다고 좌절할 일도 아니다. 어차피 가는 세월 앞에 서둘거나 초조할 일이 아니거늘 여유롭게 지낼 일이다.
자리를 함께한 「왕 기철」명창의 간단한 창도 운치가 있어 만찬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특히 임 선배님의 내내 끊임없는 유머와 위트는 오랜만에 근심을 날리고 나이가 들어도 기품 있게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한 마리 학과 같아 두고두고 여운이 남았다. 주옥과 같은 노래를 부른 기라성 가수들을 키운 임 선배님은 지금까지 150여 곡을 작곡했는데, 최근 『강천산 애기단풍』이란 신곡을 만들어 고향사랑에 앞장서고 계신다.
재삼 가정과 고향의 소중함을 주제로 정담을 나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귀가해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선사하여 고생한 아내의 마음을 잠시나마 달래준 보람찬 하루였다. 대중가요는 보통 서민의 정서를 반영한 마음의 창임에 틀림이 없는데, 또 다른 가요가 나와 모두가 애창하며 아픈 추억을 달래는 그 날이 활짝 열리길 기대한다.
(2022.11.9.작성/11.11.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