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표와 기의의 확장 지점 -정윤천의 신작시집 《발해로 가는 저녁》을 중심으로
<시인. 문학평론가> 박철영
근원을 알려고 했을 때 굳이 지류를 거슬러 올라가 봐야 아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태동 이래 소통의 도구로 사용된 말이 문자화 되면서 학문적으로 연구 규명된 것이 인류 언어학이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사학의 갈래 중 하나였던 표현의 문제에서 분화 진화되어 시란 형식이 되었고, 그렇게 쓰인 것을 시詩라고 볼 때 그 시를 가려 읽어야 하는 세태가 요즘이란 것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시를 접하면서 일상의 불화들을 접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의 경계를 살피게 한다. 불확실한 시대 공간에서 작금의 현대시現代詩들은 다소 개인적이거나 투쟁적인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다. 시를 통해 드러난 시의 언어들은 시인의 생애를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면서 독자에게는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여 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일상적 언어에서 치열한 마모를 거쳐 드러낸 시어는, 시다운 시가 갈수록 귀해지는 기현상 속에서 참으로 유의미한 일이 되었다. 충실한 시의 전형을 찾아내는 것도 시를 쓰는 일만큼 고귀한 일이라는 얘기이다. 한 동안 활발한 시의 유형으로 나타나 문단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나, 크게 진전되지 못한 채 하나의 지류로 떨어진 ‘미래파의 시들 역시 반성과 모색을 통하여 발전되어 나가야 하리라고 믿는다. 한편으로 시라는 문체가 지녀야 할 개성은 일상을 초월하거나 자기 삶의 근간을 확장시켜 나가는 일이라고 볼 때 시적 정체停滯의 요구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정 부분 삶의 근간은 자연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일상 언어의 표기 방법에서 기표와 기의를 말하지 않고서는 시詩를 이야기하기 힘들다. 그 바탕 속에서 지속되어온 확장된 의미 작용이 기호라고 보았을 때 인간과의 관계론적 사유에서 유발되는 서정성은 어떠한 시적 토대보다 견고한 위치에 서 있게 된다. 따라서 인지된 세계와 자기 동일성의 일치 지점이라는 서정 공간에서 발화되는 시적 세계. 이는 단순히 서정시의 일별에 대한 지침만은 아니다. 개인 언어의 집적을 통한 은유로 유발되는 정윤천의 여섯 번째 시집 《발해로 가는 저녁》을 살펴보는 자리에서 그의 시가 간직한 “전통”과 “미래”를 아울러 보기로 하였다.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들은 일반적 서사성을 응축한 시어와 공간으로 드러난다. 대부분 단정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시의 시작점들은 일정한 호기심을 유발하며 가독성을 유지시키는 장점을 드러내고 있다. 수사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담담한 시의 구조는 형식보다는 사유에 기대고 있어 보인다. 또한 잘 구워진 질그릇 같은 은근한 심리 묘사와 장치들 역시 정윤천 시인이 간직한 장점으로 여겨볼 수 있겠다. 혹은 그만의 시적 개성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더더욱 그의 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정윤천의 시에 대한 신념과 같은 것들이다.<서정시가 아니어도 된다> 에서 존재에 대한 실존의 의미까지를 묻고 있는 그의 시안은 이미 기표와 기의를 함의한 제3의 영역까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지붕이 없는 사원이 거기에 있다 수도원과 고해소와 갠지즈강이 있다 새벽 마다 거기에 오르는 승려들과 요기*들이 있다
사람의 히말라야보다 두 배나 높게 여겨진다는 거기에 올라선 이들은 시詩보다 서둘러서 물구나무를 서보이기 시작한다
등딱지에서 꺼내든 저마다의 날개 위에 새벽의 습기를 닿게 하려고 거저리**들 이 나미브 ***에서 생을 구하는 자세
그러려니 생은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 대가리를 거꾸로 처박고 폼이 나지 않아 도 되고 정전이 되어 한 동안 불이 들어오지 않아도 되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 명같은 건 외우지 않아도 된다
만다라 꽃씨보다 작은 습기의 알갱이들이 날개에 맺혀 물구나무의 맨 아래에 붙은 입술까지만 닿으면 된다 서정시가 아니어도 된다.
* 요가 수도자. ** 풍뎅이의 일종. *** 지구 상의 가장 오래된 사막
-<서정시가 아니어도 된다> 전문
이 시의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언뜻 시의 내용이 서정시에 관한 반 서정성의 의미로도 읽힐 수 있겠으나 시인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바라봄에 관한 의미 있는 진술의 순간을 엿볼 수 있다. 무릇 시적인 순간이란 것이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점과 시의 바깥에 존재하는 은유의 세계로 시인은 독자들을 이끈다. ‘서정시가 아니어도 된다’라는 결어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파란만장들이 일정한 틀이거나 규범 가치 등에 메이지 않아도 되리라는 외침이 묻어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일상을 토대로 한 상상력으로만 발현된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리라는 성찰이었을 것이다. 시 미학에 우선하지 않는 시를 생각했을 때 근원은 인간적인 삶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결국 시적 인식은 시대가 요구하는 권위와 체제와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시인은 갠지즈 강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러내어 시詩의 근원을 주조한다. 인도라는 사회가 구속하고 있는 신분 제도의 불합리에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식 세계를 일반적이지 않는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이 찾고자 하는 시적 토대는 사회 제도 속에서 규제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사람의 히말라야보다 두 배나 높게 여겨진다는 거기에 올라선 이들은 시詩보다 서둘러서 물구나무를 서보이기 시작한다”며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행 속에 치열한 삶의 진정함으로 까지 시의 제재를 승화시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라는 형식은 생명을 걸고 히말라야의 고도를 오르듯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신성한 고행의 순간들을 “거저리”라는 미물들을 통하여 반추하여 준다. “만다라 꽃씨보다 작은 습기의 알갱이들이 날개에 맺혀 물구나무의 맨 아래에 붙은 입술까지만 닿으면 된다”는 절실한 실존의 방편을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안일한 낭만성까지를 거부하는 듯한 “서정시가 아니어도 된다”는 각성의 지점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한 방법론의 지점들은 살아가는 곳곳에 존재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직관과 비유의 방식은 시인만의 특별한 감각에 의하여 잉태되는 것이다. 갠지즈 강가의 고행자들이 역시 사막의 “거저리”들처럼 수행의 물구나무로 먼 우주를 바라보거나, 지금껏 우리가 알고 지냈던 머리에 달려있었던 게 아닌 ‘땅’에 닿은 ‘입술’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입술은 먹고사는 생존 체계에서 자연과 가장 밀접하게 닿아있는 지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막상 냉혹한 생존과 맞닥뜨린다면 시가 마냥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는 듯 시인의 시적 풍경을 한 편의 서정시로 펼쳐내 보여주고 있다.
쇠 치는 대장간이 남아 있었다 튀밥 솥 엉덩이 아래가 금방이라도 열릴 듯했다 국밥집 앞에는 그런대로 줄어져 가던 사람 띠가 늘어서 있었다 대장간 안이 외따로웠다 호밋자루를 고르는 노파의 손길이 재작년보다 주저거렸다 밥값도 못 건진 풍구불이 꺼져가는 소리를 내었다 대장간이 남아 있었던 근처에 거기 붙어 있던 대장장이의 팔뚝이 자랑스러웠다 국밥집 돼지 창자 냄새가 그리 떳떳하지는 않았다 국밥만 하고 간다는 발걸음 하나가 갈지자를 그었다 막걸리도 몇 사발 껴들었던 것 같았다 튀밥 솥 밑에서 봄꽃이 피든 소리는 변함없었다 자랑스럽거나 부끄러웠다는 말들이 그저 한몸 같았다 화순이나 담양 장날 해름참 같았다.
-<서정시 같았다> 전문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에는 가장 오래된 인간이 살았던 유구지遺構址였음을 알게 한다. 쇠락해가는 삶이 그렇듯이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에나 흥하고 망한다는 흥망이 존재한다. 시인은 피고 지는 세상을 통해 한 편의 시를 설파하고자 한다. 시인도 비운 속을 채우려고 끼니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기웃거리다 바라본 시장 통에서 쇠락해가는 대장간을 발견한다. 한때는 대장간이 있던 곳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흥興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 쇠락을 함께 건너온 촌로의 곤궁한 걸음들 뿐이다. 그렇게 시인의 시적 사유가 발화되는 세계는 명확해졌다. 풍요가 아닌 곤궁과 궁핍에 관한 사유가 오히려 정서적인 풍요를 답지하는 공간이다. 그렇게 이 시의 착상 지점은 바로 우리가 외면하거나 도외시했던 지점이라는 걸 발견하게 하고, 온갖 사람들의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균열되어가는 소멸의 한 때를 돌이켜 보여주며 그런 그곳에서마저 “부끄럽다는 말과”“장하다는”말이 “한 몸”이었음을 강변하는 자세를 취해 보이고 있었다. 정윤천 시인은 <괜찮습니다>에서 도덕적인 자기 검열 의식을 펼쳐 보여 준다. “헌 신을 버리고 새신을 삽니다./ 뒤꿈치가 한 사날 불편할 수 있습니다// 밤늦게까지 를 씁니다/ 잠옷 차림의 하숙 주인이 두꺼비집을/ 내려버리고 들어갈지도 모릅니다”라며 집요하게 따라붙던 곤궁의 처소를 일깨워 내었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시인의 의식이 이채롭다.‘새 신’을 샀던 날도 세 들어 사는 집에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집주인을 생각하며, 밀린 집세에 전전긍긍하는 시간은 상처 입은 자아의 회복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르시시즘처럼 다가오는 자기 고백의 시간으로 누구나는 한결 순결해질지도 모른다는 의식이 깔려있다. “저 위에/ 시자 하나가 빠져 있기도 합니다.”라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구원해주는 자아의 탈출구를 열고 있다. 비상문을 열고 도착한 그곳도 결국은 거울에 가려진 막다른 곳이었다고 할지라도, 시인은 우선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등에 박힌 시詩>가 드러내 주는 세계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딸아이의 방에는 등이 온통 드러난 드레스 차림의 뒷모습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뒷모습이어도 딸의 모습이 확실해 보였다 온통 드러내 놓고 등이라도 태우고 싶었던 열불의 날이 있었으리 브래지어 자국 같은 흰 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좀처럼 끝을 내지 못했던 내 시 한 줄처럼.”을 보면 한 편의 시를 위한 고행의 모습을 한 발 비껴서 보여주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는 중이다. 방 안이라는 거울, 그는 그 속에서 발견한 타자의 모습인 딸을 통해 자아의 의식적인 동일성을 재확인한다. 정윤천의 시집 속 다양한 시편들은 난경難境에 의지하지 않고 평이함 속에서의 진경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상에서 건져 올린 다양한 시적 의미들은 강건한 사유의 체에 걸러져 하나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언어의 기표와 기의라는 양면성의 세계를 통해 의식과 무의식 속의 세계를 형상화하려는, 사실적 서사를 수렴하는 과정에서 건져 올린 건강함이 아닐까 새겨보게 한다. 자아와 타자의 간극을 동일성으로 정렬시켜 공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빌미를 견지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가 <시인의 말>에서 밝혔던 “여기는, 장미에 관한 영화를 찍고 간 자리”라는 그 자리는, 우리가 사는 현실이라는 층위를 기점으로 과거까지를 소급하고 있는 중이다. 정윤천 시인의 시론은 과거의 기억에 대한 접근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일정 부분 눈치챌 수 있다. 그 발화점의 맨 앞에 놓인 <초년>이라는 시를 보면 그런 인상이 더욱 웅숭깊게 감지된다.
망초밭이 따라왔다 부추밭이 더 열심히 따라왔다 만물상회 차부 앞의 흰 봉지를 갔었다 심부름을 밀가루 봉지에는 어른이 되어서도 찾아 나서야 할 국수틀을 돌리던 하염없는 일과 상여 꽃을 접어 파는 무섭고도 아름다운 일을 치르던 친구네 사이에 끼어 있는 먼지 푸석한 점집의 문턱 한 줌이 담겨 있었다 무섭고도 아름답기로는 점집 안도 환했던 것 같았다 궁금한 데가 많았던 하얀 분粉 같은 하루는 어디에서 날아왔을까 밀가루 봉지를 싸맨 신문지에 와 걸렸던 갈래 어디로 바람아 너도 차부 앞의 큰길에서 돌아오던 그때 군데군데에서 더듬거렸던 것 같았다.
-<초년> 전문
잊혀진 풍경이 고스란히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돌려진다면 욕망이 배제된 과거는 상처가 되지 않는다. 잘 인화되지 않는 추억 속에서 시인은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경 속 사진첩을 들추어내었다. 자연의 부분에서 인간의 삶이 스민 서정시의 유력한 징후가 배태되었음을 알게 한다. 과도한 욕망으로 인한 급격한 변화의 체제 속에서 누구나 한두 번쯤은 거슬러 보았을 법한 추억의 일상이 여기에 놓여있다. “망초밭”과 “부추밭”이라는 구분은 이미 따로일 수 없다. 사실 그에겐 망초밭도 부추밭도 “초년”의 밭이었을 뿐이다. 시에서 차용되는 “망초밭”은 그에게 일상의 밭이었을 것이고, 뒤이어 나타난 “부추밭”은 시 속의 장면에서 더듬거리며 나타나는 “밀가루” 심부름에 관한 희미한 유사성의 배치이다. ‘부추 전’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 밭가를 따라나서듯 만물상회 심부름을 나선다. 그곳도 시인에게는 하얗게 핀 망초 꽃밭처럼 하얗게 꽃을 피워내는 부추밭과 동일한 공간이었다. 흰색을 띤 밀가루를 사고 하얀 국수를 떠올렸을 것이다. 만물상회를 지나면서 소환된 친구네 “상여집”과 “점집” 역시 하얀 이미지의 공간이다 “분粉처럼 하얀” 그렇게 분별을 시작하게 되었던 정윤천의 “초년은, 예민한 시의 촉수를 통해 일러주는 우리들 모두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초조한 시간의 더듬거림이 아니었을까. 밀가루 봉지를 싸맨 신문지의 엉성한 틈을 헤집으며 불어가는 바람 속으로,‘큰 길’에서 돌아오는 정윤천의 자아에는 흔들림이 엿보인다.‘군데군데’로 분화되어가는 탈피의 의지를 이 시는 마지막까지 암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시를 통한 언어의 분화처럼 시인의 인식도 조금씩 세상을 분별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슬비는 소리를 낸다>는 시에서 보면, 말은 따라 하면 그런대로 되는 것이었지만, 시가 되는 세상은 늘 시인에겐 그 너머에 있었다.““보슬비는 소리도 없이” 들리는 데로 하라는 데로 따라 부르면 노래까지는 된다// 언감생심 시는 불러지지 않는다”며 시의 의미를 불러 일으키는 장면이다. 시인의 일상은 매번 고통을 수반하는 수행임을 말해준다. 보슬비가 내리는 소리를 따라 부르다 한 편의 시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아름답게만 들리던 “보슬비가 소리를 낸다 닭 뼈와 빈 깡통과 소주병과 담배꽁초 등속을 한 데 쓸어 담은(담아 버리고 싶은) 쓰레기 봉지 위에 닿으면 오토바이 뒤통수에서와 같은 소리들을 지른다.”며 긴 고통의 밤을 새웠을 시인을 온통 까맣게 먹칠해버린다. 그럴 때면 시인은 또 다른 선배 시인을 생각한다.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의 노래를 떠올리며 위로받으려는 듯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에서 “기타 소리가 생겨난 뒤에야 기타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낙엽이 떨어지고 난 뒤에서야 벤치들은 태어나고 그 벤치에 걸터앉아 기타 소리를 쓰다듬었던 그가 가을 속으로 떨어질 때 당신의 손수건 한 장이 나뭇잎에 덮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벤치라는 공간에서 점철된 상상력은 시인의 내부로 향하고 있다. 박인환을 떠올렸지만, 궁극은 지나가버린 세월이라는 시간을 향하고 있고, 그 시간의 전후를 분별하면서 맨 마지막에는 써넣지 못한 시구詩句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시인도 이런 때는 난감했을 것이다. <숨> 이란 시를 보며 날카로운 분별로 설명할 수 없는 “생선에게서 제일 값나가는 부위가/ 숨이라던/ 시를 읽은 적이 있었다”는 이명윤의 시를 인용한 ‘숨’이라는 말, 앞서 말했듯이 기표와 기의의 중간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언어의 의미 작용도 인간의 감성 속에서 존재한다는 비의를 조심스레 ‘숨’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에도 ‘숨’은 쉬기를 반복하였다. 특히 이번 시집의 표제시인 “발해로 가는 저녁”을 살펴본다.
발해에서 온 비보 같았다 내가 아는 발해는 두 나라의 해안을 기억에 간직하고 있었던 미쁘장한 한 여자였다 마을에서는 유일하게 자전거를 다루어 들을 달리던 선친의 어부인이기도 하였다 학교 가는 길에 들렀다던 일본 상점의 이름들을 사관처럼 늦게까지 외고 있었다 친목계의 회계를 도맡곤 하였으나 사 공주와 육 왕자를 한몸으로 치러 냈으나 재위 기간 태평성대라곤 비치지 않았던 비련의 왕비이기도 하였다
막내 여동생을 태우고 발해로 가는 저녁은 사방이 아직 어두워 있었다 산협들은 연거푸 벗어나자 곤궁했던 시절의 헐한 수라상 위의 김치죽 같은 새벽빛이 차창에 어렸다가 빠르게 엎질러지고는 하였다 변방의 마을들이 숨을 죽여 잠들어 있었다
병동의 복도는 사라진 나라의 옛 해안처럼 길었고 발해는 거기 눈을 감고 있었다 발목이 물새처럼 가늘어 보여서 마침내 발해였을 것 같았다 사직을 닫은 해동성국 한 구가 미처 닿지 않는 황자나 공주들보다 먼저 영구차에 오르자 가는 발목을 빼낸 자리는 발해의 바다 물결이 와서 메우고 갔다 발해처럼만 같았다.
-<발해로 가는 저녁> 전문
안타깝게 여기에선 누군가의 숨이 멈췄다. 그 순간 시인에겐 모든 게 멈출 수밖에 없었다. 숨만 멈춘 것이 아니라 기나긴 그의 제국의 “종묘사직”이 멈춰버렸다. 그 자리에서 정윤천 시인 특유의 처연하고도 곡진한 서사가 유장한 시적 형상화로 현현해 간다. 관념적이지 않은 그의 서사는 시라는 품격을 아우르는 아름다운 언어의 시간을 펼치어 보인다. 발해’라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 유발되는 시어의 무한 확장은 중의적 의미의 내면의 슬픔을 선연하게 부조하고 있다. 또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생로병사의 세계를 막연한 희로애락으로 소비하지 않았고, 자연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서정적 자아를 타자화 하지 않는데 바쳐져 있다. ‘발해’라는 소멸된 과거 시제를 소환하여 아픈 상처를 비유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환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발해와 ‘비련의 왕비’에 그치지 않고 ‘사 공주’와 ‘육 왕자’를 통한 인간의 의지를 담아내기까지 이른다. 한 국가의 소멸처럼 인간의 삶도 그 과정을 거치지만, 그것은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는 발목을 빼낸 자리는/ 발해의 바다 물결이 와서 메우고 갔다”라고. 빼어난 시를 통해 발화된 그의 시적 세계는 끊임없는 접면을 넓히려 들 것이다.‘발해’라는 가상 언어 공간은 문학이라는 영토로 무한 확장해 나갈 것이다. 기표와 기의의 중간지대는, 다름 아닌 자아라는 각성으로 나아간 고도의 시적 상징으로 환유의 영역임을 보여준다. 그의 시에 대한 확장의 기제는 이미 <기차>에서도 예견되었다. “기차를 처음 보았다 미운 아홉 살 무렵이었다 먼 곳이 와서 지나가며 있었다 기러기같이 날아가야 할 날들이 너처럼 길어져 가고 있었다 ”는 시인의 예언은, 그 마저도 먼 훗날까지 미지로 남게 되는 그의 시의 여백 미학이며 한 실례이다. 그래서 <전주> 또한 단순한 지명만은 아닐 것이다. 단순한 언어도 그에게선 다양한 은유를 내포하게 된다. “완전할 전全에 고을 주州 같은 이름을 지닌 마을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여겨 보거나 마당에는 까마득히 눈이 쌓이는 겨울밤에도 천지분간이 까마득한 시구 속으로 매달려 날을 새고야 말 것 같던 누군가는 지내는 곳일 것 같은” 곳이‘전주’라고 하여도, 한편으로 그는 <금남로> 에서 처럼 목격한 일들을 복기하듯 기억의 평원을 회복하고 있기도 하였다. “죽은 돌을 들어내던 시인의 손길이 시인의 시에서처럼 만단정회 하여 있었을 때”와 같이, 그의 시의 여정이 혼신의 노력에 바쳐져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 같았다. <방문訪問> 에서 처럼 “냉장고 뒤에서 새소리가 난다고 졸라대어도 차마 들여다보지 못하고 말았다 방문訪問이 열리자마자 까맣고 불안한 눈동자는 마주치고 말았던 어느 방문의 한순간이 떠올”랐다는 안타까운 소치가 있다. 이면의 세계까지 닿지 않고는 완성될 수 없는 시에 따른 미리 봄의 방증이다. 시인의 삶이 또한 언어의 외연을 넓혀가는 장인 정신이어야 함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결론이다. 그의 시가 마련한 새로운 개척의 영토 위에서 정윤천의 시가 더 큰 꽃잎들로 피어날 것임을 믿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