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후감>
부패한 자본주의 사회의 환멸
-김승옥「서울의 달빛 0章」
안규수
이 소설은 1977년 제1회 이상 문학상 수상 작품이자 천재 작가 김승옥의 마지막 작품이다. 「서울의 달빛 0章」이라는 소설 제목이 풍기는 이미지에 대하여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서울의 달빛 0章」으로 인해서 나는 순진한 독자들에게서 많은 질문을 받았었다. 대학에서 문학 강의를 하는 시인조차도 광포한 문체에 대해서 비난 섞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월남전 파병, 유신체제 발동, 경제성장, 급격한 거대 도시화 등으로 전통적인 규범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던 1970년대의 도덕적 붕괴 참상을 언어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나로서는 그러한 문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주인공 ’나‘는 작가인 내가 아니라 1970년대의 비극적 붕괴의 가장 큰 피해자인 우리 모두이다.”
이 소설은 결혼과 이혼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가족의 사회적 의미와 1970년대 인간 삶에 대한 은유가 담겨 있다. 그것은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부패한 자본주의 사회의 환멸이다.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생선 시장의 개들처럼 꼬리를 뒷다리 사이에 감아 넣고 눈을 슬프게 치켜뜨고 다니다가 형편이 좀 나아지면 발정한 개들처럼 닥치는 대로 붙을 자리만 찾아다닌다. 사람들이 바라는 건 필요 이상의 음식, 필요 이상의 교미, 섹스의 가수요, 부잣집 며느리 여름철에 연탄 사 모으듯 남의 아내 건 남의 아내가 될 여자 건 닥치는 대로 붙는다. 남의 사랑을 위한 빈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물처럼 공기처럼, 여력만 있으면 빈자리를 메우려 든다. 인간은 자연인가? 메우고 썩힌다. 썩은 사타구니에서 쏟아지는 썩은 감정, 자리를 차지 못한 자들의 증오, 평화가 만든 여유, 여유가 만든 가수요, 가수요가 만든 부패, 부패가 만든 증오, 부패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남은 일은 증오의 누적, 그리하여 전쟁, 전쟁은 필연이다.”
필요 이상의 욕망은 평화마저도 위협하고 사회를 부패시킨다. 그에 따른 결말은 필연적으로 전쟁을 일으킨다. 작가가 포착한 70년대 현실은 인간의 과대한 욕망이 인간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위기의 시대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 ‘나’는 돈 때문에 몸을 파는 한영숙이라는 여인의 적나라한 모습을 통하여 썩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작가의 울분을 통렬히 그리고 있다. 「서울의 달빛 0장」에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가족과 친구들이 간헐적으로 끼어들긴 하지만 중심인물은 두 사람뿐입니다. 주인공 화자로 등장하는 대학교 시간강사인 ‘나’와 탤런트이며 그의 아내였던 ‘한영숙’이 그들이다.
소설은 ‘나’가 최고급 승용차를 사면서 시작된다. 그때는 이미 한영숙과 이혼한 이후이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그와 한영숙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에피소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들의 첫날밤이 그려지고, 처녀막을 상실한 아내를 향한 의처증으로 결국은 이혼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후 아내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며 갈등에 빠져든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며 많은 여자를 상대하면서 아내였던 한영숙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삭인다.
그는 최근 구입한 최고급 승용차 ‘레코드’를 타고 한영숙이 일하는 방송국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아내를 만나 승용차를 구입하고 남은 돈이 들어있는 통장을 아내에게 건네주려 한다. 그러나 “저어…나…영숙이 아파트로 가끔 놀러 가도 되겠어?”라는 말이 보여주듯 그는 한영숙을 아내로 받아들이기보다 가끔 만나 욕구를 분출하는 상대로 여길 뿐이다. 한영숙은 그의 그런 제안을 수용하지 않고 통장을 찢으며 분노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그도 자존심이 살아 있는 한 인간이다.
‘나’는 부유한 집안의 출신으로 대학 교양학부의 시간강사라는 점에서 부르조아 지식인이다. ‘나’와 결혼한 한영숙은 태생적으로 부모와 네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도시 빈민층으로 신분에 차이가 있다.
첫날밤 처녀막의 유무로 의처증이 발동한다는 점에서 ‘나’가 순결 이데올로기로 사로잡힌 구시대적 인물임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가 문제시하는 것은 탤런트인 한영숙이 지닌 상징성에 있다. 탤런트 한영숙을 바라보는 세인의 시선과 그 시선을 온몸으로 욕망하는 그녀에 대한 불만이다. 즉 소유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들 부부 문제의 본질은 탤런트 한영숙이라는 여성을 독점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렇게 따지면 그녀에 대한 그의 이해는 자신이 독점할 수 없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일에 그칠 뿐이다. 이는 그녀에 대한 이해가 아닌 그녀를 향한 비열한 욕망일 뿐이다. 그들의 결혼이 이혼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다행인지, 한영숙은 탤런트라는, 상품화된 성적 이미지를 지녔지만, 돈으로 소유될 수 없다는 그녀의 자존이 멋지게 돌아서고 만다. 비록 성이 상품화되었다지만 인간 자존의 의지를 허물 수는 없다. 사랑한다면,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 자존에 대한 존중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을 통하여 작가가 우리에게 직시시키는 현실은 인간에 대한 진정한 가치가 실종되고 사랑의 관용마저도 더럽혀진 자본과 욕망만이 출렁이는 70년대의 상황이다. 이런 현실은 결국 인간 사이에 소통의 부재와 완전한 고립이라는 공식이다. 작가는 이런 속물화된 고단한 현실을 산업화의 초입이던 1964년 서울의 밤거리를 통해 보여준 바 있다. 이런 예감은 단순히 예리한 감수성으로만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김승옥 작가의 현실에 대한 안목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참신한 구어체의 문장, 내적 체험의 시간을 치밀하게 재구성한 플롯,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사회성보다 본질적인 의식의 내부에서 주제를 끌어낸 문제의식, 관념이나 정감을 감각적인 영상으로 기술하는 표현기법 등이 문학적 공감을 자아내 김승옥작가의 대표 소설이다.
70년대의 나는 20대의 열혈 청년이었다. 월남 전쟁 죽음의 늪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나는, 악몽이 발현되는 트라우마로 정신병원을 드나들었다. 그 일로 불면증에 시달려 퇴근 후면 친구들과 어울려 술에 찌들어 ‘발정한 개처럼’ 거리를 헤맸다. 소설에서 감수성만으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작가의 현실에 대한 안목은 그 시대의 나를 직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슴이 쓰린 지나간 시간이지만 ‘서울의 달빛 0장’을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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