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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연 <후기>- 털보의 정체
과연 털보는 누구였을까?
우리는 털보에 대하여 여러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 속에서 털보는 어떤 존재였을까? 우선 그것부터 점검해 보자.
장골할멈 - 털보가 모내기 일을 도와줌 - 그를 고맙게 생각함 - 털보는 착한 사람임 - 털보를 단순한 선행인으로 파악
저꿀어른 - 털보와 함께 일을 하면서 그에게 질문 - 털보는 중앙정보부나 사찰기관 혹은 광주민주화운동 때 국민을 핍박한 자라고 생각함 - 사회역사적인 관점에서 과거 지은 자기 죄에 대한 마음의 고통을 안고 죄 닦음을 하고 있는 자로 파악
임씨 - 털보를 일 잘하고 말 잘듣는 사람으로 파악 - 자기 집 일꾼으로 싼 노임으로 부리려 함 - 털보가 거부 - 털보를 미워함 - 털보를 경제적 이익의 대상으로 파악
성월댁 - 털보를 사내로 생각함 - 털보와 애정행각을 은밀히 벌이려 함 - 털보가 거부 - 털보를 미워함 - 털보를 감성적 대상으로 파악
아이들 - 털보와 알몸 목욕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연을 날리며 함께 지냄 - 이곳에서 사는 사람이 아닌 먼별에서 온 사람으로 여김 - 신비스러운 그러나 가까운 친구같은 존재로 파악
높은 사람 - 털보를 수상한 존재로 파악 - 간첩, 사회 불만자나 사회 부적응자, 체제 전복자, 범죄를 저지른 도피자 등 불순분자로 파악했다고 짐작 됨
여우골 사람들 - 털보가 처음 나타나자 수상한 자로 여김 - 고된 일을 거들어주며 함께 하자 자식보다도 더 고마운 마음씨착한 자로 여김 - 높은 사람이 김영감네 집에서 까닭없이 변을 당할 뻔하자 임씨와 성월댁 말에 현혹되어 때려죽여야할 나쁜 자로 여김 - 털보의 근거지인 김영감네 집을 불을 놓아 없애버림 - 털보에 대한 감정이 이리저리 상황에 따라 극단적으로 흔들림
이처럼 각자의 처한 상황에 따라 털보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이 서로 현격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털보의 실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털보가 말한 내용 속에서 그의 정체를 매우 쉽게 알 수 있다. 털보는 각박한 도시 생활에서 찌들고 부조리한 현실에서 도무지 순수한 인간의 마음을 지키고 살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름대로 무욕의 삶을 살며 그 순수한 인간의 삶을 동경하고 그 모순과 부조리가 타파되어 해결되기를 소원하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별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호랑이 연을 만들어 띄우면서 그가 염원하는 것들은 그의 개인적인 탐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가 사회가 맑고 투명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다.
그 염원만큼이나 털보의 삶 또한 순수하다. 재물을 축적하려 하지도 않았고, 심한 노동을 통해 많은 생산물을 생산해 그것을 팔아 재화를 획득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노동을 팔아 경제적인 부를 이루려는 것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오직 그날그날 먹고 살면 그뿐으로 만족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고단하게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노동을 아낌없이 헌신했다.
털보가 그 여우골에서 한 일은 남의 집 일 도와주기와 어린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 그리고 호랑이 연 날리기가 전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보고 이해하는 시각은 천차만별이다. 굳이 서방의 철학자 베이컨이란 자의 우상론에 입각하여 해석해 본다면 이는 동굴의 우상에 해당된다. 자신만의 경험과 교육의 정도, 성격적 차이, 세상에 대한 이해의 정도 등으로 인한 편견 때문에 다른 사람이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임씨는 경제적 이익의 대상으로 털보를 생각했고 성월댁은 감성적 대상으로 파악했다. 경제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이는 오늘날 사람살이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경제활동이 주를 이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경제적 대상으로 인식되어 버렸다. 모든 사람살이의 가장 핵심적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이 경제적인 대상으로서의 인간 파악이다. 인간은 곧 노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털보는 이를 단호히 거부해 버렸다. 노동은 곧 돈이고 이익이라는 충실한 자본의 틀 속에서 살아가는 임씨의 입장에서 보면 털보는 정신이 돈 놈일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성적인 인간 존재는 무엇인가? 인간 존재의 본질이 곧 감성이므로 이는 원초적인 인간 생명 활동을 이루는 근원이다. 특히 남녀의 성애론적 관계는 모든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일찍 과부가 된 성월댁은 건장한 신체를 가진 혼자 사는 털보를 사내로 인식하게 되었고 마음속으로 그를 애모하게 된다. 그러나 털보는 어렵게 성월댁이 술 힘을 빌려 성적 관계를 요구해 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단호히 거부해 버린다. 이는 자연적인 남녀라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거부한 것이다. 털보는 성월댁 입장에서 보면 바로 ‘오살을 할 놈’인 것이다.
그렇다면 털보는 왜 근본적인 경제활동도 원초적인 남녀관계도 모두 거부해 버린 것일까? 이는 털보가 현실 사회 속에서 행해지는 경제활동도 남녀관계도 모두 제대로 된 인간 관계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파악이 전제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털보는 현실 속에서 이상을 보면서 그 이상을 향해 현실을 숨 쉬고 있는 인간임을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털보의 그 마음을 아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지향하는 것은 별이고 그 별의 순수를 실현하는 존재를 호랑이로 말하고 있다. 그 별의 순수를 지닌 것이 아이들이고 곧 아이들은 이 사회의 미래이며 그 아이들이 곧 정의를 그대로 실현시키는 호랑이임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털보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그 인간이 갖는 한계 즉 사회적 부조리가 해결된 순수한 세계를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별의 마음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털보는 맹목적으로 먼 별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뭍 생명이 살고 있는 지구가 그 별들은 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곧 그것은 온갖 생명이 더불어 살고 있는 지구가 별 중의 최고의 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음이다. 그러기에 털보는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식물과 곤충 짐승들을 신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또 경탄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일까? 털보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털보가 지향하는 것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니었고 오직 그만의 자유였다. 아무런 걸림이 없이 자유로운 자, 곧 대 자유인이었던 것이다. 그 자유인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 있고 또 아이들처럼 순수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으며 또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털보는 일상의 모든 것을 신비롭게 볼 수 있었고 또 무욕의 마음이었기에 아무런 이름도 돈도 재산도 권위도 명예도 권력도 성적 대상도 즉 인간이 만든 쓸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사람들 속에서 탈 없이 어울려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털보를 가만 두지 않았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인간과 사물을 파악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눈에 털보는 실로 괴이한 존재일 밖에는 없었다. 특히 높은 사람 눈에는 털보는 참으로 크나큰 문제를 내포한 존재였던 것이다.
최고 상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체제 수호적인 높은 사람 눈에 털보는 분명 이 사회의 체제를 몹시 혼란하게 할 수도 있는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적의 간첩이나 사회 불만자, 사회 혼란자, 체제 전복자, 사회 비판자, 혹은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중인자 등 여러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이는 획일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인간 이해에 대한 편협하고 단선적인 특징이다 할 것이다. 이런 편협하고 획일화된 사회구조 속에서 용케도 잘 적응하여 크게 성공한 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 외의 다른 것들은 도무지 생각하지 못하기도 할뿐만 아니라 또 다른 것들을 용납하려 들지도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불순분자이며 자신과 다른 삶이나 의견을 갖는 자들은 자신처럼 성공하거나 출세하지 못해 그러는 나쁜놈, 혹은 모자란 놈이라고 일찍이 파악해 버리고 배척해 버린다. 그것이 사회의 커다란 폭력과 부조리를 낳는 근원적인 문제인데도 그들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전혀 인정하지 못하는 삶, 체계적인 틀 안에서 모든 인간이 일사분란하게 군대조직처럼 돌아가는 것만을 옳다고 교육 받았고 또 그것만이 올바른 삶이라고 알고 살아가는 자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인간이 살아가야 한다고 믿고 그것을 강요하고 협박하며 살아가는 자들의 세상 속에서는 이 산하에 살다 사라져버린 사람을 잡아먹는 무서운 호랑이처럼 털보같은 삶 또한 도무지 용납되어서도 아니 되고 또 용납되어질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털보는 그들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존재다. 높은 사람의 날카로운 눈빛에 털보 자신이 제멋대로 분석되어 지고 있다는 것을 털보는 누구보다도 먼저 알았을 것이다. 아니 높은 사람류의 한계를 너무도 분명히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털보가 높은 사람의 생각과 삶을 마치 제 손바닥의 손금 보듯이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만하게 자기 잘난 줄만을 철석같이 믿고 승승장구하며 자만에 빠져 살아가는 높은 사람류의 인간은 그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가? 현실은 늘 높은 사람의 편이다. 베이컨 식으로 말한다면 높은 사람은 극장의 우상이다. 일류대학, 사법고시 행정고시 같은 국가고시합격이라는 그런 것을 등에 업고 나타나는 고급 관료들의 위엄과 권위에 눌려 일반 무지렁이 민초들은 무비판적으로 그에게 복종한다.
심리학자 칼융이 말했던 그 집단무의식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박힌 집단무의식은 학벌과 권력, 돈, 권위, 무자비한 폭력, 수탈 그런 것일 게다. 거기에다 뿌리 깊은 관료주의와 외세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너무나도 명약관화하다.
한국 현대사를 살아오면서 그러한 집단무의식에 깊이 빠져 살아온 여우골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직접 노동을 통해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그들의 사유재산을 넘보며 자신만의 사유재산을 전혀 형성하려 하지도 않았던, 그리고 언제라도 직접 노동을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는 털보를 악한으로 내몰아 제거하려고 들떠 일어서고 만다.
매일 임씨처럼 경제적인 이익을 쫓아 사는 사람들이나 성월댁처럼 감성적 본능에 따라 탤런트나 배우 가수 스포츠 스타나 비싼 외제 명품만을 쳐다보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털보는 그들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도달할 수 없는 과분한 존재였던 것이다.
다만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아이들만이 털보의 순수를 이해하고 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 역사의 미래라고들 하는데 그 아이들의 순수란 것도 이제 이 땅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일등이라는 경쟁에 휘말려 매일 학원으로 내몰리며 영어 수학 일류대학 그리고 모든 세상의 부조리에 물들어야만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꿈을 가질 수 없는 아이들을 보면, 이 세상에서 털보는 영영 꿈일 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 산하에 오래전 호랑이가 살지 않게 되었듯이 털보 같은 삶도 이 세상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는 삶이 아닌가!
꽃은 스스로 꽃이라는 아무 자의식도 가짐 없이 저 자연의 순리에 따라 피어 향기를 내뿜고 씨앗을 달고 죽어가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꽃이 스스로 자기는 아름다운 꽃이라고 그렇게 사람들이 불러준다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 이미 꽃이 아닌 것이다.
과연 사람들은 털보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주 까마득한 오래전 이 이야기를 읽은 어떤 고명한 늙은이는 부당한 자에 대한 징치라고 힘주어 말했는데 참으로 유치원생다운 용기 있는 말이었다.
아마도 그 늙은이는 높은 사람이 김영감네 집에서 보았던 것은 죽음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호랑이는 곧 높은 사람의 부조리한 삶을 맑게 밝히는 존재여야 했는데 그것은 곧 죽음으로 만이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섭고 끔찍한 일이다. 어찌 인간의 삶의 진실은 죽음에 임박해서만이 보여야만 하는 것일까? 그만큼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이고 또 부조리한 실존이란 말인가? 맞다! 죽음이다! 훌륭하다!
그런 늙은이 같은 자들이 지금 세상의 좋은 것들은 모조리 거머쥐고 있다. 도무지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의 글을 몇 편 읽어보았는데 묘사와 사건만 있지 철학적 사유는 없었다. 겨우 사회에 대한 고발이나 자기만의 개성적인 묘사 글, 문체 따위를 고민하며 개성을 말했는데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는 누구나 다하는 고작 지술자의 기술뿐인 것이었다. 그따위 기술이나 배우려고 대학원인가하는 그런 곳에 돈 들이고 요즘 말로 스팩 쌓자고 교수 좀 되어 보자고 편히 대접받으면서 잘먹고 잘살아 보자고 실권을 쥔 담당 교수라는 자에게 온갖 아첨과 아부로 추접 떨며 고상한 척 다니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렵게 돈과 시간을 투자해 읽었던 대부분의 그런 류의 글에는 인간과 사회 그리고 세계에 대한 심오한 철학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또렷한 사회와 역사에 대한 진실이 배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게 그들의 한계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이름에 지위에 만취되어 한껏 도시고 까불면서 온갖 염문을 뿌리면서 잘들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기에 모든 이론과 철학을 저 서방에서 빌려와야만 했던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나 자신의 한심하고 천박한 욕망뿐 아니라 허접스런 모든 것을 때려치워버릴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 뒤로 모든 그럴듯한 것들로 부터 한껏 자유로울 수 있었다. 고작 한반도에서 그것도 남한에서 살아가는 내가 아니라 어떤 눈먼 작자들이 알아주든 말든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세계 속에서 아니 우주 속에서 살다가는 나를 인식해야할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임씨처럼 성월댁처럼 혹은 높은 사람처럼 털보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세상이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에 노예들과 종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어 함께 주먹을 부르쥐고 털보를 징치하려 항상 분노로 들끓는다. 어디에도 제대로 된 인종을 찾아보기 드문 세상이다.
과연 털보는 누구였고,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나는 지금도 20년 전 내 눈 안에서 잠깐 보았던 그 털보를 잊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이 땅에서 살아 숨 쉬는 동안 그 털보를 영영 잊지 못할 것만 같다. 호랑이도 털보도 이 땅에서는 영원히 다시 살수 없을지 모르기에 그리하여 나는 이 주관적인 나의 오래된 편린을 산산이 부숴진 사금파리같은 유물을 여기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첫댓글 호랑이 연을 재미있게 읽어주신 회원분들을 위하여 전에 적어둔 후기를 여기 올립니다. 다른 뜻은 없고 다만 지금이나 옛날이나 이 땅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털보같은 삶이 과연 이 땅에서 존재가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면 왜 그럴까? 뭐 이런 생각들을 해보았던 그때의 기억들에 대한 반추와 털보에 대한 어떤 나 나름의 느낌과 동경에 대한 기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호랑이 연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 좋은 밤 되시기를.....^^*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작금의 사회환경속에서
털보의 삶 을 살기에는 밀어내야할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초연하게 그삶을 지켜갈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와 깨우침의 시간들
이었을까요.
'초연하게 그삶을 지켜갈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와 깨우침의 시간들
이었을까요.'
그노시스님 감사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자기 수양을 통해 어떤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참으로 매순간 치열한 고뇌와 깨우침의 시간을 부대껴야 함을 통찰하여 말씀해 주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껍데기는 그럴듯 한데 막상 접해보면 단 두 시간이 못지나 그 고약하고 추악한 흉허물을 보아버리고 마는 실망스런 인종들이 널려있는 세상이지요.
얕고 탐욕스런 그러나 제법 그런체하고 싶은 인종들....
그노시스님의 훌륭한 말씀 깊이 감사드립니다
늘 강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이 사회 덩어리가 그들을 양산해내는 거대한 고물기계 덩어리' 인간은 환경적 동물이라고 에릭프롬이 그랬나요. 연약한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야겠지요.
때에 따라서는 온갖 악행도 서슴지 않으면서.....
역사라는 것을 뒤집어보면 그 끔찍하고 흉악한 순간들이 ..... 세계 도처에서 현재 진행형인가요
늘 날카롭고 지혜롭고 용기있는 대처에 깊은 감사를.......^^
다양하고 재미있게 쓰시는 글 잘 보고있습니다.
대부분 경제적 이익을 쫒는 개인 뒤에는 냉혹한 경쟁으로 토끼몰이하는 일그러진 사회구조가 존재하죠
그 사회에서 내꺼를 보다 안정적을 확보하려는 본능적 몸부림이
타인에게 가혹한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그 알량한거 마저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때문이죠.
이 세상 대부분의 폭력은 그런 무수한 "임씨"의 이름으로 자행되는거죠
그들 눈에는 털보가
처음에는 '경제적 이익에는 무관한 멍청한 놈'
좀 지나면 '생각보다 똑똑한 놈'
나중에는 '내가 쌓아놓은 근원적으로 무시하는놈, 더불어 그걸 빼앗아 갈 수 있는 놈'이되는거죠
이쯤되면 처음의 무시가 폭력으로 바뀝니다.
'이 세상 대부분의 폭력은 그런 무수한 "임씨"의 이름으로 자행되는거죠 ' 한울타리님 댓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 많은 이익과 더 많은 쾌락을 향하여 아마도 이게 이 땅을 사는 인종들의 인생 목표가 아닐까요?
그리하여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삶, 채워도 채워도 잡아먹어도 잡아먹어도 누려도 누려도 항상 부족한 삶, 얄팍한 지위와 허명으로 유혹하여 낚시질을 해서 거대한 권력을 형성하고 그 권력으로 찍어누르는 무형의 몸부림들, 그리고 폭력들, 무한대의 이익과 쾌락을 향해 사는 사회.....
날카로운 통찰력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늘 강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좋은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털보가..
자유와 별을 그리워 했던건..
이익 이라는 이성과 사랑이라는 감성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에 해답을 얻고자 하다보니..
그 귀결점이 그리된듯 싶은데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
이익을 기반으로한 이성이 곧 생존본능 이고..
사랑에 감성이 곧 종족번식본능 이란걸 자각..
했었더라면 아마도 좀더 치열하게 살면서..
정치판을 기웃거리게 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아님..
그런 본질적인 자각이 있었더라도..
아직은 때가 아님을 간파 하고나서..
세속에 오염이 덜된 산중 아이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걸어보려 했을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산은 산 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