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을 뽑으며
손진숙
“내일 풀 뽑으러 갈래?”
지곡언니의 전화였다.
“갈게요.”
특별한 일이 없어 선뜻 응낙했다.
몇 해 전 형부가 정년퇴직하자 시 외곽에 꽤 넓은 땅을 마련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밭에는 이랑마다 상치, 파, 양파, 마늘, 고추, 들깨, 참깨, 감자, 고구마, 땅콩을 심어 그야말로 채소박물관이라 할만하다. 완두콩은 벌써 익어서 죄다 뽑아 쟁여 두었다. 밭에 들인 정성이 한눈에 환히 보였다.
우리는 참깨를 심은 이랑에 나란히 앉아 풀을 뽑기 시작한다. 이제 막 세상에 고개를 내밀고 빛을 보기 시작한 참깨 순의 성장을 방해하는 주범은 바랭이다. 바랭이는 완전 제거의 대상인 악성 잡풀이다. 참깨는 조금만 가물어도 비실거리는데 비해 바랭이는 어지간한 가뭄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뿌리째 뽑혀 기진맥진하다가도 소나기 한 줄금이면 되살아나 기세를 떨친다. 둘을 한 데 두어서는 참깨 순은 오갈이 들 수밖에 없다.
바랭이는 어린 참깨에게는 생사여탈권을 쥔 폭군이다. 찬찬히 보면 줄기가 가늘면서도 질기고 잎은 창처럼 좁으면서 끝이 날카롭다. 만져보면 까슬까슬해 사람의 손을 거부한다. 땅에 납작 엎드려 줄기를 사방으로 벋어 쉽게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잎과 줄기를 싸잡아 힘껏 채면 뿌리는 뽑히지 않고 잎과 줄기만 뜯긴다. 갈큇발 같은 뿌리로 흙을 단단히 움키고 앙버티는 듯하다.
호미로 뿌리 주변 흙을 파가며 뽑아내야 한다. 바랭이보다 사람이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고랑에는 이미 제초제를 쳐놓아 누렇게 말라 죽은 풀의 시신이 즐비했다. 풀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은 지독한 침략자임이 분명하다. 농기구로 뿌리 채 뽑아 죽이고, 그것이 귀찮으면 독한 약을 쳐 죽이는 살생자이니.
바랭이에게 다른 잘못은 없다. 참깨를 기르려고 갈고 거름을 준 땅에 태어난 죄뿐이다. 그곳에서 생존을 위해 억척스레 버텼을 따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참깨가 자라는 데 훼방을 놓았다는 죄목을 씌워 가차 없이 처형하는 것이다. 참깨나 바랭이나 풀이기는 마찬가지요, 풀이 흙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어느 풀은 북돋우어 가꾸고, 어느 풀은 뽑아내야 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만약 이 바랭이 열매가 참깨보다 맛과 영양이 더 있다면 어찌 되었을까?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풀 뽑아 본 적 있어?
언니의 낫낫한 음성이 잡생각을 깨웠다.
“결혼 전 시골에 살 때 뽑아 봤어요.”
“그럼 삼십 년 전이네.”
일하는 품새가 무척 어설퍼 보인다는 언니의 말에 어색하게 웃는다. 오금이며, 목덜미며, 등에 땀이 배어나 끈적거린다. 영락없는 농부의 딸인 나는 농사일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농촌과 멀리 산 삼십 년 세월에 기력이 쇠잔해지고 생각도 변한 모양이었다. 잠깐 허리를 펴고 선 눈앞에 아직도 참깨 이랑은 장강처럼 길어 보인다. 뽑아야 할 풀은 또 얼마일까.
손에 쥐고 있던 풀을 고랑에 던지면서 보니 바랭이 속에 참깨 순이 섞여 있다. 언니가 보면 뭐라 할까? 바랭이는 씨를 말리려고 깡그리 뽑아 버리면서 참깨 순은 실수로 뽑은 한두 줄기에도 잘못을 저지른 양 신경을 쓰는 내 모습은 또 무엇인가?
다시 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바랭이를 뽑으며,
“언니, 바랭이 말고 다른 풀은 안 보이네요. 쇠비름도….”
“요즈음 쇠비름의 인기가 상종가야. 있다고 소문이 나면 어느새 다 캐 가버려. 쇠비름 엑기스가 만병통치약이라나.”
나는 반색하며,
“바랭이도 인기가 치솟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별소릴 다하네. 그래서 바랭이 대신 참깨 순을 뽑은 거니?”
언니의 은근한 꾸짖음에 웃음을 머금었다. 내 정수리를 비추던 한낮의 햇살이 붉은빛 한 자락을 드리우고 지나간다.
땡볕 속에서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되다. 그러나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언니와 이야기도 하며 일을 하니 견딜 만하다.
오금이 쓰리고 등이 끈적이지만 부지런히 호미를 놀린다. 또 잘못 뽑힐 참깨 순이 몇일지는 모르지만.
《경주문학》52호|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