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은무척 빨리 자랐다. 나는 딸이 둘이 있는데 두 녀석이 성격이 달랐다. 큰 놈은 조금 내성적이이었다. 그리고 내가 무슨말을 하면 잘 따르는 편이었다. 반면 둘째는 성격이 밝고 자기 주장이 강했다. 큰 딸을 낳고 약2년 후 아내가 다시 임신한것 같다고했다. 산부인과를 가보니 임신을 한 상태에서 모르고 감기약을 먹어 잘못하면 기형아가 나올수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기형아를 낳느니 중절을 선택했다. 그리고 3년정도가 지난 후 둘째 딸이 태어낳다. 나는 사내놈이 있었으면 했다. 딸만 둘이다 보니 아들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특히 아들과 같이 목욕탕에 가서 놈의 등도 밀어주고 내 등도 밀어달라고 하고 싶었다. 아들을 앞세워 산에 오르고 싶었다. 등산을 함으로써 배울수 있는 인생 경험을 알려주고 싶었다. 딸들은 산에 가는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딸들이 싫다는건 아니다. 딸들은 살갑다. 내가퇴근을 하면 찰싹붙어 "아빠,아빠"하며 떨어지질 않는다. 사내놈들은 아무래도 애교가 없다고 한다. 초등학교땐가 더 어릴적인가 둘째딸이 연락이 안된적이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분명 집에 와야 할 시간인데도 집에 오질 않았다. 어디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있는 친구들집에 전화를 걸어봐도 아무도 몰랐다. 저녁 어스름이 지고 딸이 털레털레 골목길을 걸어왔다. 나는 딸에게 달려가 닥달을 했다. "이놈아 어디있다 왔어, 어디를 가면 어디를 간다고 말을 하고 가야지" 딸은 감짝 놀라 눈믈을 찔끔 흘리며 친구집에 놀러 갔다 온다고 했다. 십년을 감수했다. 자식을 앞 세운다면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나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그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그런 일을 당해보지 않고는 무어라고 위로할 수 없다. 여러 사건이 많고 많았지만 어린 고등학생들을 태우고 가던 배가 뒤집히는 사건은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내 자식이 그 배에 타고 있다가 같은 일을 당했다면 나는, 아! 생각하기도 싫다. 잠시동안 연락이 두절된 딸을 찾으러 산지사방을 찾아다녔다. 온갖 무서운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설마 아무일도 없을거야, 아무일도 없이 집에 들어올거야"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나는 무서운 아빠였을까? 다정한 아빠였을까? 일찍 아버지를 여윈 나는 가족을 풍성하게 이루길 바랬다. 그러나 집사람이 몸이 여리여리했고 생활형편도 아이를 여럿 키울 수 있는 사정은 아니었다. 애들이 어릴때 잘 해주지도 못한것 같다. 무슨일이 있으면 안된다고 윽박지르기만 했던것 같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다. 내가 학원을 한번도 다니지 못해서인지 공부를 할 때도 크게 신경쓰지 못하고 본인들이 알아서 하겠지 지켜보았다. 그러면서도 큰 딸을 내가 졸업했던 학교로 입학시켰다. 딸은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내 큰 딸은 나와 고등학교 동문이다. 선린은 상고에서 인터넷고등학교로 전교했다. 나는 딸에게 인터넷고등학교의 비전을 말하고 선린을 나오면 유학가기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딸은 고등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밀어주지도 못할걸 뫠? 추전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자기가 배운것과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둘째는 학교를 빠지는 날이 많았다. 아파서인지 가지 싫어서인진 잘 몰랐다. 그러다 고등학교 3년 초 느닺없이 글을 쓰는 학교에 진학하고 싶다고했다. 글쓰기를 배우기 위해 3개월인가 글쓰는 학원에 다녀야겠다고 했다. 3개월 학원을 다니고 대학교를 갈 수 있을까? 나는 의문스러웠지만 딸은 숭실대 문창과에 합격을 했다. 타고난 소질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운이 좋아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딸에게 아빠의 꿈은 소설가라고 말하곤 했다. 둘째딸이 대학에 합격하고선 내 꿈을 대신 이루워주겠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책을 꾸준하게 읽었던것이 딸이 대학을 선정하는데 도움이 된것 같다. 둘째딸은 대학을 나와 카카오스토리에 웹소설을 게재해서 웹소설 작가로 데뷔를 했다. 돈은 많이 벌지 못했지만 작가가 된 딸을 보며 뿌득했다. 사람은 누구나 먹고 살것을 타고 나는가보다. 지금 내 딸과 같은 젏은 친구들이 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맞는말이기도 하고 틀린말이기도 하다. 우리 세대는 어릴적 가난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더 심한 가난과 전쟁을 겪었다. 모든것이 무너져 내린 전쟁통에서도 자식들을 키워냈다. 다행인지 우리는 나라가 발전하는 시점에 젊은 시절을 맞이했다. 그래서 직장을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세대는 위로는 부모를 부양해야 했고 아래로는 자식들에게 부양을 받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다. 인생살이가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나라 최고 기업 삼성의 이재용 회장도 유치장에 구속되었다. 세상은 더욱 복잡다단해지고 나는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과연 내 자식들이 이 사회에서 작으나마 일익을 감당 할 수 있을지, 아빠로서 이것도 걱정, 저것도 걱정이다. 결혼을 해도 안해도 걱정, 직장이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 직장생활을 잘 하는지 걱정, 걱정 투성이다. 계속 끼고 살아야 하는지, 독립을 시켜야 하는지 답이 없다. 늦게오면 늦게와서 걱정 집에만 있으면 남자가 없어서 걱정, 모든것을 내가 대신 할 수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자피 혼자 사는 인생이다. 절대 누가,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줄 수 없다. 그래서 딸들에게 세상살이를 알려줘야 겠지만, 머리가 다 큰 딸들을 무슨 수로 가르칠수 있겠는가? 그냥 지켜만 볼 뿐 그래도 아빠라고 집으로 퇴근하면 "아빠"라고 달려드는 딸들이 징그럽고도 고맙다. "사랑하는 딸들아 이 세상 어떤 남자보다 이 아빠가 더 너희를 사랑한단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