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일 때는 완전한 섬으로 있어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하지만, 썰물일 때는 수면 밑 길이 드러나 섬과 육지가 연결되어 걸어서 이동할 수 있어 흔히 모세의 기적이 펼쳐지는 곳이라고 불리는 섬들이 국내에 몇 있다. 유명한 데를 꼽으라면 대부도, 제부도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제부도에는 차량이 오갈 수 있는 어엿한 도로가 존재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섬이다.
제주도에도 이런 곳이 있다. 서귀포 강정포구와 법환포구 사이, 지도에서도 크게 확대를 해야 보이는 생소한 섬 서건도이다. 서건도는 서귀포 권역에 머물면서 대중교통으로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서귀포 시내와 주변 지역을 연결하는 간선 노선인 520, 521번 버스가 서건도 입구 정류장에 정차한다. 큰 길에 내려 한적한 골목을 따라 600m쯤 걸어가면 바다가 나온다. 가는 길에는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이 머물다 가기 좋아 보이는 리조트도 보이고, 펜션들이 길을 따라 몇 군데 있다. 해안가에 다다른 곳에는 카라반 캠핑장도 있다. 이 숙소들을 지나쳐가면 낮고 작은 섬인 서건도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으로는 올레길 7코스에 속하는 멋진 해안로가 펼쳐진다.
서건도 입구 버스 정류장
서건도 가는 길. 올레길이 이곳을 지나 곳곳에서 표식을 볼 수 있다
밀물 때는 완전한 섬으로 있는 곳인 만큼, 모세의 기적이 펼쳐진 서건도를 만나려면 하루 두 번 있는 물때를 잘 맞춰야 한다. 야간에 있는 간조를 제외하면, 서건도는 사람들의 발길을 하루에 한 번만 허용한다고 볼 수 있다. 여행 일정 중 하루는 서건도에 간다면, 그 날은 서건도에 찾아가는 시간을 가장 우선으로 정하고 앞뒤로 다른 일정을 짜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섬이 열린 모습 하나만 보고 찾아가기에는 다소 아까울 수가 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여행하는 시간이 넉넉하다면 한 번은 시간을 맞춰 가도 괜찮을 정도로 찾을 만한 가치가 느껴졌던 곳이다.
서건도라는 섬 이름 자체는 숱하게 존재하는 여느 평범한 섬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지지만, 다른 이름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서건도의 또 다른 이름은 ‘썩은 섬’이다. 섬을 이루는 암석이 바다 속에서 폭발한 화산체에서 형성된 응회암인데, 이 암석이 쉽게 썩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땅이 척박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고래가 물이 빠지며 드러난 구덩이에 갇혀 빠져 나가지 못해 죽고 썩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썩은 섬’의 음이 변하며 서건섬, 서건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조에 맞춰 찾아간 서건도 앞에는 울퉁불퉁한 돌들이 넓은 길을 만들었다. 약 200m 정도 걸어 들어가면 섬에 다다른다. 섬 입구에는 일대가 해양보호구역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제주의 상징인 해녀가 탐방객들을 반긴다. 그 뒤로 번듯하게 나무 계단길이 나 있다.
섬이 낮아 몇 계단 되지 않아 쉽게 오를 수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본격적인 산책로가 이어지며, 벤치가 몇 개 놓여 있는 제법 넓은 쉼터도 한편에 마련되어 있다. 섬에 대한 정보를 별로 찾아보지 않고 왔던 터라 섬 내부는 흙 길로 이루어진 줄 알았는데, 웬만한 오름보다도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는 모습이 반전처럼 느껴졌다. 섬의 내부는 나무가 우거져 고즈넉한 공원 같은 분위기면서 숲의 정취도 잘 느껴졌다.
서건도는 벤치에 앉아 느긋하게 풍경을 바라보며 쉬었다 가기 좋은 곳이다.
서건도의 숲길은 오름의 것과는 조금 다른 정취가 느껴졌다.
본섬을 바라보는 풍경도 빼놓을 수 없다. 본섬과 거리가 가까운 만큼 섬 안에 들어왔음에도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제주도 한가운데 우뚝 솟은 한라산 뷰도 일품이다. 아쉽게도 정상에 구름이 걸려 멋진 산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해안가에선 볼 수 없는 구도이기에 그 모습은 독특했다.
섬 뒤쪽으로는 바다 가까이 내려갈 수 있는 짧은 계단이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수려한 서귀포 앞바다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범섬은 눈 앞에 깎아지른 절벽을 드러내며 솟아 있고, 서로 거리를 조금 두고 떨어져 있는 섶섬과 문섬은 마치 함께 있는 듯 나란히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섬 안쪽으로 가면 바다에 가까이 내려갈 수 있다.
범섬
오른쪽이 문섬, 왼쪽이 섶섬이다.
섬 자체는 10분이면 모두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작지만, 한적한 자연 속에서 바람을 쐬고, 경치를 구경하며 사진을 찍다 보니 30분이 훌쩍 갔다. 섬이 지닌 신비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마음만큼은 밤하늘을 보며 하룻밤을 지새우고 싶었다. 물이 다시 밀려 들어오기 전에, 짧은 서건도 산책을 끝내고 다시 해안가로 되돌아갔다. 섬을 잇는 길이 돌밭이라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섬을 드나드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섬 안에서 풍경을 바라볼 때 주변이 이미 붉게 물들고 있었는데, 섬 밖으로 나오니 해가 완연히 기운 모습이었다. 해안가에서 바라봤을 때 마침 해가 지는 방향이 서건도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떨어진 지점이었다. 바닷물도 조금씩 차며 사람들의 발길을 받아들이던 섬도 떨어지는 태양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 할 준비를 했다. 구름이 적당히 뜬 맑은 날이었기 때문에 멋진 일몰 풍경을 내심 기대했지만, 수평선 끝에 띠처럼 펼쳐진 구름 뒤로 해가 몸을 일찍 숨기는 바람에 상상만큼 멋진 풍경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제주도의 일몰 명소 못지 않게 서건도에서 바라보는 노을 또한 아늑하고 소박한 맛이 느껴졌다.
서건도 정보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강정동 산 1
관람 시간: 썰물 시간에 맞춰 방문
탐방 소요 시간: 약 30분
인근에 주차할 만한 공간이 없어 대중교통으로 방문하는 것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