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산청 왕산-필봉산
**산행일자 = 2014년 06월 22일(일요일)
**산행코스 = 구형왕릉-삼거리-약수방향-임도-약수터-망경대-가짜왕산-
-왕산-여우재-필봉산-동의보감촌
**왕산-필봉산
◆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시천면 경계를 이루는 지리산 천왕봉(1,915.4m)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약 2km 거리인 하봉(1,781m)에서 북동으로 방향을 틀어나간다. 이 능선은 쑥밭재를 지나간 1,315.4m봉에서 거의 동쪽으로 휘돌아나가다 약 2km 거리에서 다시 북동으로 방향을 바꿔 약 2km 거리인 왕등재에 이르러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나가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북동으로 가지를 쳐 나가는 능선이 있다.
왕등재에서 북동으로 달아나는 능선이 약 6km 거리에 이르러 빚어놓은 산이 해발 925.2m인 왕산이다. 왕산에서 계속 북진하는 능선은 약 1km 거리인 905.3m봉에서 북동으로 휘어져 내리다가 틉톱재에서 잠시 가라앉았다가 봉화산(526m)을 들어 올린 다음, 그 여맥을 임천강과 경호강에다 모두 가라앉힌다.
왕산 동릉 상 1.5km 거리에는 뾰족하게 솟은 암봉이 있다. 바로 필봉산(848m)인데, 왕산에 올랐다면 필히 이 봉까지 가보게 되는 인기있는 봉우리여서, 왕산과 함께 항상 산행이 연계된다.
왕산은 옛날 가락국의 궁궐 이름인 태왕궁에서 이름을 따서 태왕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수로왕이 말년에 이 산에서 휴양했다고 가락국 양왕 신도비에 새겨져 있기도 한 이 산은 가락국의 왕과 많은 사연이 있음을 알려주는 지명인 왕등재, 국골, 깃대봉 등이 각종 기록이나 문헌에도 나와 있다.
필봉산은 붓끝처럼 뾰족한 데서 이름이 유래됐는데, 여성의 유두를 연상케해 유두봉이라고도 불렸다고 전해진다.
필봉산 정상에 오르면 마치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에 떠 있는 기분이다. 사방으로 절벽을 이룬 정상에서 막힘없는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올라온 특리 방면 아래로는 광구계곡과 전통한방휴양관광지 공사장이 샅샅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봉화산 줄기 너머로 임천강과 경호강이 만나는 곳인 생초면이 대전 - 진주 간 고속도로와 함께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동으로는 황매산과 부암산이 하늘금을 이루고, 남동으로는 경호강을 건너는 고속도로와 함께 산청읍 번화가와 웅석봉이 어우러져 한 폭 아름다운 동양화를 연출한다.
남으로는 왕등재 능선 위로 지리산 찬왕봉이 하늘과 맞닿아 보이고, 서쪽으로는 왕산 정상이 마주보인다.
필봉산 정상에서 서쪽 급경사 바윗길을 내려선 다음, 숲터널 길로 8분 거리에 이르면 여우재에 닿는다. 여우재에서 6 분 거리인 무덤을 지나 25분 가량 올라가면 왕산 정상이다.
삼각점(산청21)이 있는 왕산 정상에서 조망은 필봉산과 거의 비슷하지만 필봉산보다 고도감이 떨어진다. 펑퍼짐하기 때문이다.
왕산에서는 서쪽 조망이 일품이다. 오봉계곡이 멀리의 임천강 상류 마천계곡과 함께 광활하게 펼쳐진다. 원점회귀 산행을 하려면 다시 여우고개로 내려오면 된다. 여우고개에 이른 다음, 광구계곡으로 50분 내려서면 전통한방휴양관광지 공사장 현장사무소다.
**구형왕릉
사적 제214호인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은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에 있다.
구형왕릉 앞에 전(傳)자가 붙은 이유는 그의 능이라는 확증이 없고, 단지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야의 마지막 왕인 제10대 구형왕이 묻혀있다는 (전)구형왕릉은 일반 왕능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형태로서 무엇보다도 돌로 쌓은 석총(돌무덤)이라는 점이 관심을 끈다.
구형왕릉은 일반 무덤과는 달리 가파른 산비탈에 주변의 막돌과 깬돌을 계단식으로 층층이 쌓아올렸으며, 총 높이 7.15m, 둘레가100여m나 되는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그 정상의 네모진 단 위에는 봉토분처럼 뒷산과 언덕으로 연결되고 모서리가 약간 살아있는 반구형(半球形) 봉분(封墳)을 만들었다. 즉 정상에 반구형 접시가 엎어져있으며, 그 아래 7단으로 형성된 피라미드가 산비탈에 묻혀있어 반 정도만 드러나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피라미드형 적석총(積石塚)은 제1단의 너비가 약 20m 정도되며, 1m 남짓한 높이로 7단을 쌓았고 전체 높이는 7.15m이다 ,
4단 중앙에는 높이 40cm, 깊이 68cm, 너비 40cm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지만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고 이것이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구형왕릉 앞면 중앙에는 가락국 양왕릉이라는 비석이 서 있고, 1m정도의 돌로 쌓은 담이 이 석총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또한 문인석, 무인석, 석수(동짐승), 상석, 장명 등이 1쌍씩 배치되어 있으나 이 석물들은 왕릉을 쌓았을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래에 김해 김씨 문중에서 민들어 세운 것이다.
'주변의 등나무와 칡넝쿨이 왕릉으로 뻗지 못하고, 이끼나 풀이 자라지 않으며 위로는 까마귀와 참새가 날지 않는다고 한다'는 능참봉의 말은 왕릉의 신비로움을 더해주려는 후손들의 염원이라라.
구형왕(양왕)
구형왕은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장군의 증조부이다. 521년 가야국의 왕으로 올라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구형왕은 밀양의 이궁대에서 신라 법흥왕에게 선양의 절차를 마친 뒤(가락국 기원으로는 491년) 낙동강을 지나 이곳 왕산의 태왕궁으로 들어와 은거하다 5년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을 인용한 “가락국2000년사”에 기록돼 있다.
류의태약수터 방향은 임도를 따라 가는길이고 구형왕릉 좌측에 산길 들머리가 있어요
구형왕=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로 가락국의 마지막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