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로 고통 받았던 수양관 건축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이사야 35장 2절)
1980년대에 프린스주택 주식회사를 경영할 때의 일이다. 사업을 확장하여 주말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경기도 일대를 다니며 주말농장 부지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주말농장은 무엇보다 서울에서 1시간 이내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주로 경기도에서도 가평군 일대를 다니며 부지를 물색했다. 내가 찾고 있는 부지는 큰 대로변에서 어느 정도 들어가 있고 군사보호지역이나 조림지역이 아니면서 역사 유물도 없고 상수도 보호지역이 아닌 곳, 그리고 거리도 서울에서 1시간 이내이고 건축허가도 날 수 있는 여건의 땅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알아본 지역이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대성리 일대였다. 회사는 주말농장 부지를 구입하기 위하여 그 일대 주민 19명의 소유로 되어 있는 농지와 임야를 한 명씩 찾아다니며 1년에 걸쳐 임야와 농지, 잡종지, 구릉지 등 4만 8천여 평을 구입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회사에서는 주말농장을 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우선은 서울에서 주택사업에 전념키로 하고 후에 경제적 여건이 좋아지면 주말농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중 당회장 홍순우 목사님과 당회원들을 모시고 대성리로 야유회를 가게 되었다. 야유회가 끝나고 그 일대를 돌아보던 중 우리 회사가 구입한 대성리 부지를 보여드릴 기회가 있었다. 당회원들은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시냇물이 흐르는 그 부지를 보면서 감탄하며 수양관(기도원)을 지으면 적격이라는 찬사를 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 교회는 본당을 짓고 아직 부채가 있어 봉헌예배도 못 드렸기 때문에 감히 수양관 건립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후 어느 날 함께 동행했던 정광조 장로님과 김영남 장로님이 함께 회사로 찾아와서는 대성리 부지를 교회에 팔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나는 생각할 여지도 없이 바로 거절하였다. 교회 재정상황도 어려운데다 장로가 되어서 교회와 거래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 장로님과 김 장로님이 몇 차례 권유했지만 나는 완강히 거절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가 교회를 상대로 이권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교인들끼리의 상거래 및 금융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셋째는 보증을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몇 분 장로님을 위해 재정 보증을 섰다가 모두 손해를 본 경험이 있었다. 교회생활 중 사업적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대개는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신자들끼리 상처를 입게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과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번 보고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가 교회에 부지를 판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홍 목사님을 위시하여 여러 당회원들이 우리 교회가 원하는 일이니 상행위로 생각지 말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매각하라고 강권하였다. 나는 무려 6개월을 버티다가 교회의 권유가 하도 강해서 결국은 지고 말았다. 교회에 팔면서 이익을 남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부지가 내 개인의 것이 아니고 회사 부지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교회를 상대로 이익을 내지 않고 회사에도 피해가 되지 않는 방안을 연구하였다. 그 방안은 회사가 구입한 원가에다 구입한 날짜가 1년여가 지났으니 구입한 날로부터의 은행이자만 받기로 한 것이었다. 당시 시가는 매입 당시보다 많이 올라 있었으며 모두가 탐내는 부지였음을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은행이자 18%를 적용하여 4만 8천 평을 1억 2천만 원에 매각하였다. 참고로 당시 사채이자는 40%이었고 후일에(2001년) 부지 옆으로 새 도로가 개설되면서 도로로 수용돼 교회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받은 부지 보상금만 6억 원이 넘었다.
그러나 이 일로 나는 많은 심적 고통을 받았다. 어려운 교회 재정으로 인해 잔금을 무려 1년여간 분할하여 받은 것은 금전적인 부분이었기 때문에 희생할 수 있었다. 더 큰 고통은 교인들 사이에서 김창열 장로가 교회에 자기 땅을 팔아 이익을 남겼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나는 교회를 상대로 거래를 한 것에 대해 후회하며 몇 날 며칠 잠을 못 자고 고민하였다. 그리고 교회가 형편상 매각대금을 다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 임야를 2천만 원을 주고 내가 다시 사들였다. 내 개인적인 금전적 피해도 있었지만 더 힘든 것은 장로가 교회에 땅 팔아서 돈 벌었다는 세간의 오해였다(장충단교회 50년사, 174쪽 참조). 수양관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지으면서 교회는 자금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 교회에서는 자금을 모금하는 방법에 대하여 많은 연구와 기도가 있었다. 그리고 교계 역사상 처음으로 수양관 건축을 위한 공채를 발행하기로 하였다. 교회는 모두 1억 5천 만원의 공채를, 2년 만기 수익률 48%, 3년 만기 수익률 72%의 고리로 발행하였다. 많은 교인들이 이를 구입하였으나 회수해 간 교인은 불과 50%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는 교회에 헌금을 하여 수양관 건축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85년에는 서울시 교육위원회 명의로 우리 수양관 부지를 “청소년 수련장”으로 수용하겠다는 통보가 온 일도 있었다. 교회는 교인 887명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항의 방문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그리고 결국 교인 1,000여 명의 기도와 땀으로 구입한 대지를 사수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이런 어려움을 거치면서 위치 좋고 아름다운 곳에 300여 평의 수양관이 지어졌다. 구 수양관에 이어 지은 신 수양관 건축물은 고 전금련 권사님의 헌금으로 이루어졌는데 우리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구심점이 되는 놀라운 기도원으로 성장하였다. 현재 수양관 부지는 3만여 평이 남아 있으며 수양관 건축을 한 부분에 토지 약 3천 3백여 평이 대지화되는 성과도 얻어 우리 교회의 큰 재산이 되었다. 이곳은 앞으로 신앙의 후손들이 필요할 때 사회복지재단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며 주 5일 근무가 확산되면 제2의 교회로도 사용할 수 있는 요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