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Dabos)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의 주제는 ‘4차 산업혁명의 이해(Mastering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였다. 근대화(Modernization)를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인 ‘산업화(industrialization)’는 19세기 영국의 증기기관의 발명에 의해 촉발된 제1차 산업혁명에서
시작하여 전기와 대량생산시스템의 발달에 의한 제2차 산업혁명, 디지털과
정보화에 의한 제3차 산업혁명을 거쳐 현재는 인공지능(AI), 로봇, 바이오,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 신기술이 이끄는 제4차 산업혁명기에 돌입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주제어에서 ‘Understanding’ 정도가 적당할 것 같은데 ‘Mastering’이란 말을 썼다는 것이다. 그만큼 다보스에 모인
최고경영자, 정치가, 최고기술자 등이 이 문제를 세계경제(World Economy) 및 인류문명(Human Civilization)의
미래에 중차대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첫 째는 국가의 산업전략(Industrial
strategy) 및 기업의 사업전략(Business strategy)의 문제이다. 제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신기술에 대한 선점의 문제이다. 두말할 것 없이 이 신기술을 자신의 핵심역량(core competence)으로
확보한 국가와 기업은 막대한 국부 및 이윤을 획득할 것이다. 이 혁명의 빛이다. 둘 째는 이 혁명의 그림자다. 바로 이 변화가 가져 올 국가간, 계층간 불평등이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고용의 문제이다. WEF가 배포한 ‘미래고용보고서’에서
보면 이 새로운 산업혁명으로 인공지능과 로봇이 보편화 되면 앞으로 5년간 선진국과 신흥시장을 포함한 15개국에서 사라질 일자리(710만개)가 새로 탄생할 일자리(210만개)보다
월등히 많다는 것이다. ‘고용 없는 성장’의 문제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진화사적이고 문명사적인 문제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신기술의 맨 앞에
인공지능과 로봇이 있다. 바로
이들의 진화가 과연 어디까지 진행될 것인가 이다. 그리고 인류의 진화에 미칠 영향이다. ‘딥 런닝(Deep learning)’ 또는 ‘머신 런닝(Machine learning)’이라 불리 우는 스스로 학습하는 알고리즘(Algorithm)을
통해 기계는 무서운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자연지능을 초월하는 특이점(Singularity)이 과연 도래할 것인가? 다음 달에 있을 호모사피엔스
대표인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대표인 구굴의 ‘알파고(AlphaGo)’간의 5번의 바둑 대결의 결과가 기대된다. 물론 이세돌 9단은 승리를 장담한다. 하지만 몇 년 후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알파고가
이긴다고 그것을 특이점을 돌파했다고 단정 지울 수도 없다. 하지만 모두가 우려하는 것처럼 이세돌 9단이 단 1패라고 하는 경우가 나온다면 현생 인류에게 적지 않은 과제를
던져 줄 것 같다. 바둑은 체스와 레벨이 틀리니까. 인간에게도
숙제인 무한(Infinity)에 대한 도전에 가까우니까.
이
번 글에서 상기 세가지 문제 모두를 논할 수는 없고 글 제목에서 제시했듯이 이 혁명을 씨알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내가 감히 씨알경제학이란 말을 쓰는 것은 현생 인류가 ‘모더니티(Modernity)’라는 기치하에 이룩하고 있는 이 경탄할 만한 성과가 과연 우주의 생명진화의 역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 지 씨알사상의 관점에서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이다. 제국의 지배엘리트들만이
아니라 우리 씨알들의 주체적 사고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이니 이 참칭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난 솔직히 ‘산업화’란 말을 그리 좋아 하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산업화의 빛과 그림자에서의 그 그림자 때문만이 아니다. 난
그 빛도 별로다. 그 빛이 무언가? 바로 물질적 진보요 풍요다. 그런데 바로 이게 문제다. 소위 말하는 서구적 근대를 기점으로 인류는
산업화(공업화)라는 기치아래 물질문명이 정신문명을 경이적으로
압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느새 인가 세상은 물질로 뒤 덮여 버렸다. 반짝이는 황금물결은 농촌의 너른 들녘이 아니 도시의 마천루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가진 자들의 탐욕은 끝이 없고, 못 가진 자들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친다. 아!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은 아닌데…….
내 보기엔 산업화란 물질에 인간이 밀리는
것이다. 산업화에 따른 자본축적이 진행될수록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 될 것이고, 이에 따라 고정자본인 물질이 가변자본인 인간을 밀어 내는 현상이 가속화 될 것이다. 물질은 부유해지고 인간은 가난해 진다. 물질은 쌓여가는데 인간은
그 물질을 쓸 힘이 없다. 인간은 항시적인 실업공포에 시달리다 실업자가 된다. 여기서 현대 경제를 읽는 중요한 키워드가 도출된다. 바로 과잉설비(Overcapacity)다. 경제학적으로 소비자의 수요를 초과하는
생산자의 과잉생산, 과잉공급이 문제인 것이다. 씨알님들이
필요 이상의 소비를 하지 않으면, 필요 이상으로 물질생활에 탐닉하지 않으면 현대산업사회의 위기는 항시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기업의 매출 감소가 바로 경제시스템의 위기로 나타나는 것이 현대산업사회이다. 상품이 남아 돌아도, 설비가 남아 돌아도 위기는 온다. 뭔 지랄발광인지…..경제학적으론 디플레 공포(D의 공포)라 한다. 케인즈가
말했듯이 소비가 미덕인 사회이다. 그것도 과잉소비(over-consumption)가. 과소소비(under-consumption)는 공황(depression)의 원인 중 하나가 되니까.
제4차 산업혁명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러한 위기의 돌파구이다. 신기술이
구사하는 화려한 수사는 씨알님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한다. 분명 기술의 진보가 가져 올 긍정적인 효과는
있을 것이다. 질병과 장애의 치료, 재난구조능력 증가, 멋지고 편리한 자동화 기계 등등. 하지만 난 이 멋진 신세계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이것이 멋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멋스러움의 배후에 남겨진 너무나 많은 허접함 때문이다. 단언컨대 이러한 신기술, 신자본이 오늘날의 경제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일정한 자본재편 및 과잉설비 해소가 이루어 지겠지만, 곧
새로운 형태의 ‘Overcapacity’가 문제될 것이고 대부분의 씨알님들은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인
재화 옆에서 시기와 좌절, 그리고 선망의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보기엔 기존의
정치경제학으론 해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보수파의 신고전파 경제학, 개혁파의 케인즈 경제학 및 제도학파, 진보파의 사회민주주의 등 모두가
답이 아닌 것 같다. 이 삼두마차 모두 자본의 재생산의 위기를 더 많은 생산으로 돌파하는 방법 밖에는
모르기 때문이다.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문젠데, 창출된다
해도 문제다. 인간정신은 점점 더 물질에 속박될 것이고, 지구는
견뎌내겠는가?
그러니 경제를 살려
달라고 정치인 및 기업인들에게 호소하지 마시라. 내 보기엔 저 들에겐 답이 없다. 마치 해결책이 있는 양, 표를 주면 답을 주겠다는 정치인을 믿지
마시라. 단, 정신 똑바로 차리시고 표를 주시라. 이러한 위기를 그나마 가장 덜 고통스럽게 해줄 정치인에게.
내 보기엔 답은 새로운
경제학에 있다. 바로 씨알경제학이다. 상기 세가지 경제학이
풍족(豊足)의 경제학이라면, 씨알경제학은 자족(自足)의 경제학이다.
‘풍족(豊足)에서 자족(自足)으로!’.
씨알경제학은 단순하다. 더 이상 기존의 어려운 경제학이 아니다. 복잡한 통계와 수식으로
무장한, 하지만 별 쓸모 없는 경제학이 아니다.
그런데, 이 씨알경제학의 시작은 전혀 경제학적이지 않다. 바로 그 시작은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라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론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줄 아는 씨알들이야말로 이 경제학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작하지 않으면 이 경제학은
자족의 경제학이 아닌 부족(不足)의 경제학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씨알경제학은 무엇보다
절약(節約)의 경제학이다. 기존의 재화 및
서비스를 아껴 쓰라는 것이다.
소비를 자제하자는 것이다. 과소소비의 미학(美學)을 찾자는 것이다. 재미 있게도
경제를 뜻하는 영어 단어인 ‘economy’의 또 다른 뜻이 절약이다.
경제는 절약이라는 뜻이다. 절약을 통한 자족의 기쁨을 아는 것이 이 경제학의 핵심이다. 부족을 참으라는 것이 아니다. 부족하면 재화 및 서비스를 구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그리 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구해지면
자족하시라. 풍족의 욕구는 꾹꾹 누르시라. 그래야 씨알경제가
산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제학이다.
씨알경제학은 거시경제학적으론
혼합경제를 지지하고, 미시경제학적으론 협동조합기업을 지지하는 경제학이다. 시장경제의 무분별한 확산은 막아야 한다. 칼 폴라니(K. Polanyi)가 이야기했듯이 화폐, 토지, 인간은 이 시장경제에서 빠져야 한다. 통화가치를 둘러싼 혼란, 부동산 가격 등락을 둘러싼 혼란, 저성과자 해고 및 비정규직 양산을
둘러싼 혼란 등을 보라. 이런 혼란은 국가가 계획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자본주의 기업은 협동조합 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 1인1표의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기업. 생산과 분배가 탐욕적 기업이윤
아닌 조합원 및 소비자의 필요에 따라 민주적으로 결정되는 기업, 그리고 해고가 없는 기업으로.
고통스럽겠지만 풍족의
경제학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씨알님들이 그리 하셔야 한다. 자본의
확대 재생산의 욕구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마시라. 아이들의 미래를 맡기지 마시라. 아이들의 직업을 구걸하지 마시라. 갖가지 변통과 모르핀이 등장하겠지만
끝은 같을 것이다. 고리를 끊어야 한다.
제4차 산업혁명은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신기루일 뿐이다. 저들의
호들갑에 속지 마시라. 씨알경제학을 같이 고민하는 것이 훨씬 인류 문명 및 진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너무 낭만적인가? 맞다. 그래서 씨알경제학은 친구가 필요하다. 내 보기엔 중농주의(重農主義), 칼 폴라니의
경제학, 생태경제학 등이 필요할 것 같다.
언제나처럼 긴 글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 드리며, 다음의 말로 이 긴 글의 끝을 대신하고자 한다.
‘시장은 국가가 통제하고, 국가는 국민(씨알)이 통제해야 한다. 씨알이
생각하고 자족하면 국가도 시장도 다스려 진다.’
첫댓글 누룩님, 큰 깨우침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씨알경제학, 우리 씨알의 길이고 미래입니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계산능력과 계산에 바탕한 예측판단능력은 인간을 능가할 것입니다. 바둑이 수읽기에 근거한 것이라면 머지 않아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바둑을 더 잘 두게 되겠지요.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일을 사람이 더 잘 하고 그런 일과 삶의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고 봅니다. 인공지능은 몸, 감각, 생명이 없고, 생명을 낳을 수 없고, 기쁨과 슬픔을 모르고 얼과 신에 이를 수 없으니, 자족하면서 생명과 감정과 정신과 영성이 더 깊고 풍성한 길로 가야겠지요. 자치와 협동의 생명공동체를 만들어 가야지요.
덜쓰고 덜버는 것이 우리가 살길이지요. 그리고 덜쓰고 덜버는 그 소박함으로 지금의 천박한 물질주의, 자본주의를 이겨낼수가 있지요. 그것이 바로 씨알경제학의 중심이겠지요. 자본주의는 밤늦도록 일하게 하고 모두가 일하게 하고 끊임없이 일하게 하고 또 하루종일 소비하게 하고 더 많이 소비하게 하고 더 새로운 것을 개인적으로 모두가 소비하게 하지만 우리씨알들은 가진 것을 공유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야지요. 혼자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쓰고 빌려쓰고 나누어 쓸때 비로소 씨알이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치와 협동의 기본이겠지요. 간디, 프란치스코, 디오게네스처럼 영적 정신적으로 그 삶의 뒤를 따라야지요.
박선생님과 푸른바위님이 다 같이 말씀하신 자치와 협동이야말로 씨알의 정치학, 씨알의 경제학의 핵심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씨알은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도와야 합니다. 그 스스로 함이 서로 함이 되어 다같이 대동세상을 열어갈 때 진정한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소박하게 생각해 봅니다. 언제나처럼 두 분의 따뜻한 관심 감사 드립니다.
누룩님의 경제학 강의 잘보았습니다.올바른 경제인데 우리의 욕심이 가로막고 있고 이 욕심을 부추키는 자본주의 경제가 그릇된 방향으로 가도 이것을 지적하고 대안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지금의 사회구조가 가로막고있어서 장님이 되어가네요 . 씨알님들이 어찌하해야 하나요?
왜 물으십니까? 이미 보여주고 계시면서. 하하. 저는 초가을님을 비롯한 여러 씨알님들이 그 모범을 보여 주시고 계신다고 생각 됩니다. 제가 씨알경제학 논의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경제학은 결코 독립학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제학자는 ‘세속의 철학자’라는 말이 있듯이 기본적으로 철학이며, ‘정치경제학’이란 말이 있듯이 기본적으로 정치학입니다. 따라서 씨알경제학의 올바른 실현을 위해선 철학으로서의 씨알사상과 정치학으로서의 씨알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여기서 박선생님이 말씀하신 ‘주체의 깊이와 자유에서 전체의 하나 됨에 이름’이 너무도 가슴에 와 닿습니다. 바로 씨알사상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씨알운동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시는 여러 씨알님들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초가을님도 항시 따뜻하게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장차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부와 직업이 집중되고 4차산업혁명으로 인해 증가된 국부는 나머지 다수에게 무상으로 분배될 것같습니다. 정치적인 계산으로나 경제적인 계산으로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붕괴되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해결된 다수는 시간을 협동과 여가 선용으로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 수많은 이해조정과 갈등조정의 고통스런 과정이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정교하고 폭깊은 설득의 정치력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우리 씨알들을 그때를 위해서 역량을 길러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씨알님 말씀처럼 4차 산업혁명은 분명 대량의 실업사태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의 복지정책이 경제활동인구의 약 5∼10%의 실업상태를 감안한 것이라면 아마 어느 학자 분의 예상처럼 약 50%정도의 실업상태를 감안한 복지모델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예상도 해봅니다. 하지만 부의 재분배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입니다. 박씨알님 말씀처럼 아주 고통스러울 것입니다.제 생각엔 국가에 의한 재분배 이전에 우선 거시경제정책상 산업 및 노동정책 등의 재편을 통해 시장에서의 소득분배를 최적화 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기존의 이윤 및 소득 증대 위주의 산업/노동정책이 아닌 지구를 살리는 산업,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노동이 어떻게 가능한지 씨알님들의 지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 보편적 복지확대를 위한 노력도 중요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복지제도는 19세기에 적합한 제도이고 인공지능이 산업노동을 담당하는 새로운 시장경제와 복지제도가 나오고 기본소득제도가 확립되면 좋겠습니다. 자치생활공동체를 중심으로 생명영성문화를 실현하는 생산 유통 소비가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임금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가치사회가 아니라 생명과 문화와 영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