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테마 ▶ 노마드, 영혼의 유랑인
다시 찾은 즐거움
손진숙
다시 찾은 즐거움이 있다. 다름 아닌 극장에 가는 일이다. 언제이던가, 서른 살 중반 무렵이었다. 영화 관람에 빠져들었던 시절이.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등산과 글쓰기로 관심이 바뀌면서 영화는 자연히 잊히고 말았다. 그 영화가 예순 살 초반인 지금 내 여가생활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용하는 극장이 아니다. 이름하여 ‘인디플러스 포항’이다.
‘포항문화재단’이 직접 운영하는 공공영화관으로, 지역민의 영화 문화 제고를 위해 운영하는 독립, 예술영화 상영관이다. 예전 ‘육거리시민회관’이 ‘중앙아트홀’로 변신하여 다시 돌아온 것이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영화를 상영한다. 2022년 4월~11월 매주 화요일 오후 2시 상영 영화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지난 4월 첫 상영부터 한 차례도 빠짐없이 관람하였으니 자칭 개근생이라 할만하다. 4월은 ‘영화사에 기록된 거장’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파르타쿠스》를 시작으로 10월 ‘영화로 읽는 세계문학’ 넷째 주 《올리버 트위스트》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11월 ‘영화사랑방’ 마지막 작품은 《하녀》로 예정되어 있다.
예상치 못하게 영화 상영이 취소된 경우가 있었다. 포항에 태풍 ‘힌남노’가 불어닥친 이튿날, 변함없는 기대를 안고 극장으로 갔더니 현관 유리문에 《8월의 크리스마스》상영이 취소되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헛걸음의 이유를 수긍하고 돌아섰던 기억이 두렷하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수요일부터는 하루 네 번 각기 다른 제목의 독립, 예술영화를 선보인다. 자유로운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상영되는 영화를 빠트리지 않고 모두 봐야겠다는 욕심에 하루 두 편을 본 적이 있었다. 오가는 시간까지 총 7시간을 영화에 몰입하다 보니 의욕과는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피로감을 이기고 연속 관람 몇 번 만에 이건 효과적인 영화 보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말은 영화 감상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적당’이 우리 생활에 왜 필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후로는 설사 종영이 되어 놓쳐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과욕하지 않고 편안한 시간에 여유가 있는 감상 태도를 취한다.
독립 · 예술영화는 상업영화 1편 볼 비용으로 무려 4편을 볼 수가 있다.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지만 한 끼 밥과 네 끼 밥의 차이다. 한 그릇 밥으로 느낄 수 있는 포만감을 무려 네 차례나 채울 수 있으니 얼마나 괜찮은 비법인가. 거기다가 화요일 무료관람 말고도, 10편을 관람하면 무료 1편 감상할 수 있는 스탬프 카드도 제공된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관객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어떤 날은 2층과 3층 객석에 단 2명일 때도 있다. 상영 종사관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다행히 다수의 관객이 좌석을 메우는 날은 흡족한 마음에 가슴을 활짝 펴 보기도 한다.
‘중앙아트홀’은 우리 집에서 도보로 30여 분 거리다. 더운 여름날에는 바삐 걸어 땀에 흠뻑 젖기보다는 남편 차량에 동승하는 일이 잦았다. 남편은 1년 365일 목욕탕을 애용한다. 특별히 다른 일정이 없으면 나의 영화 관람 시간에 맞춰 함께 출발해 극장 앞에서 내려주고 목욕탕으로 직행한다. 남편은 목욕탕에서 육신을 씻고, 나는 영화관에서 정신을 맑히는 셈이다.
올여름 혹독한 더위에 상영 영화 《드라이》를 감상할 때 발밑 에어컨 바람에 다리가 시릴 정도였지만 스크린에서는 마른 숲에 화재가 일어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화기가 내 심장에 와 닿은 듯 건조한 기운으로 극장 문을 나서자 넓지 않은 광장의 아담한 분수에서 솟아오르던 물줄기가 시원스레 내 안의 목마름을 적셔주었다.
《경아의 딸》을 감상할 적에는 나와 딸의 관계가 겹쳐져 보였다. 집 떠난 지 십 수 년째. 갈수록 엇박자인 딸과의 거리감. 어쩌면 딸은 엄마와 분리되어 홀로서기를 이루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애면글면하지 말고 험난한 세상 제 스스로 헤쳐 가도록 묵묵히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을 듯하다.
좋은 영화를 보기 위해서 상업영화관을 찾기도 한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살아가면서 생기는 불만과 오해가 스르르 풀리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화해로 마무리된다. 우리 인생에 안달복달할 일이 무엇일까. 나의 지나온 순간들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그러면 인생도 아름답게 장식되고 펼쳐지리라.
내일 수요일은 또 무슨 볼만한 영화가 있을까. ‘인디플러스포항 상영시간표’를 살핀다.
격월간 《그린에세이》 2023년 5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