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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성경인 <바이블>의 시작인 창세기 편은 해와 달을 포함한 만물과 인간이 어떻게 신에 의해 창조되었는지로 시작한다.
그리고 성경이라면 마땅히 세상이 어떻게 시작했는지 부터 출발해야 하는 걸로 안다.
그런 신 중심 사고에서 인간 중심 사고가 발전하면서 신은 일단 (괄호) 속에 넣어두고..
인간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탐구하는 자연철학자 또는 명상가라 불리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인간이 갖고 있는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감촉하는 다섯 감각능력과 그것들을 종합하는 인식 능력을 도구 삼아
신의 도움없이 자연을 파악했다.
그들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았기에 자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관찰하여
땅이나 금속처럼 단단한 고체성질[지], 물 같은 액체성질[수], 공기 같은 기체성질[풍] 그리고 그것들을 변화시키는 열성질[화]이 근본이라고 했으며..
고대에도 인도와 중동 지역은 서로 왕래가 잘되었는지 지수화풍 4대를 물질의 근본으로 여겼다.
그러나 동양은 지수화풍에 나무 성질[목]을 더해 5대를 근본으로 보았다.
이렇듯 이천오백년 아니 약 삼천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인간의 탐구 의지가 현재 에이아이 시대에 이르도록 한 것이다.
가을에 국화꽃이 핀 것은 봄부터 소쩍새의 울음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듯..
일론 머스크나 삼성 연구팀은 고대 자연철학자에게 아주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할 터인데..
하여 서양에서는 철학과 과학으로 발전되어 왔고, 인도에서는 종교로, 동양에서는 유학, 도학 등으로 정리되었다.
그런 가운데 나타난 것이 불교인데..
불교는 앞에서 보았듯이 [지금 여기 나]에서 출발한다.
철학과 과학 역시 지금 여기 나에서 출발하기에
불교는 과학이요 또는 철학이라 하는데.. 불교는 그것들 보다 훨씬 정교하면서 독특한 출발을 하고 있다.
신라에 살던 원효 선배님은 장터에 나가 북을 두드리며 "나무아미타불"만 염불하면 극락정토에 간다고 불교를 전했다는데..
염불만 하면 극락에 간다는 불교를 철학이요 과학이라 할 수 있나?..
석가모니에서 출발한 불교가 나중에 대승불교라는 종교가 된 불교에서
과학으로 불릴 수 있는 지점은
'일체의 출발은 12처' 라고 가르치는 석가모니의 오리지널 가르침이다.
12처설의 인식은 쉽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서양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의 말을 연상하게 하지만..
데카르트 선생은 감히 생각은커녕 상상하지도 못한 곳을 12처설은 바라보고 있다.
21세기는 과학 시대라고 하여..
자고 일어나면 무언가가 변한 세계가 펼쳐지는 만큼 정신없이 변하고 있다.
솔직히 나는 지금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쳐지고 있다.
이와 같은 격변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데..
그 두려움을 가라앉히는 방법으로는 강력한 폭력이 묘책이라는 듯..
세계는 극렬한 폭력인 전쟁을 앞세우는 자들이 정치에 앞장서고 있다.
20세기말 민주화는 보편적인 교육을 가능하게 하여.. 중고딩 실력이 국민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면..
전쟁과 같은 비 이성적인 폭력 대신에 이성적 판단이 일반화되어 심각한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안정된 사회가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고졸 이상의 학력이 보편화된 대한민국 현실은 평화는 커녕 이기적 탐욕에 빠져..
소수가 전체 이익을 가지려는 과두적인 독재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된 것을 보며..
인성 교육이 빠진 과학 교육만으로 평화로운 사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근대 철학과 21세기 과학은 무엇을 놓치고 있길래 소설 <1984>가 보여주듯.. 점점 더
세계는 소수의 파워가 사회와 국가를 억압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을까..
그 답의 하나로 일체를 조작하는 2법6쌍인 12처를 국가나 사회에서 잘 가르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12처란 무엇인가..
"두 가지 인연이 있어서 식(識)이 생긴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안과 색), (이와 성), (비와 향), (설와 미), (신과 촉), (의와 법)이다.
안(眼)과 색(色)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나니,
그것은 무상하고 유위(有為)이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심연생(心緣生)]이다.
만일 색과 안과 식이 무상하고 함이 있으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라면,
이 세 가지 법이 화합하는 접촉[觸], 접촉 뒤의 느낌[受], 생각[想], 의도[思] 이러한 모든 법도 다 무상하고 함이 있으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다.
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잡. 214. 2법경>
有二因緣生識。何等為二?謂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
如是廣說,乃至「非其境界故。所以者何?
眼、色因緣生眼識,彼無常、有為、心緣生,
色若眼、識,無常、有為、心緣生,
此三法和合觸,觸已受,受已思,思已想,此等諸法無常、有為、心緣生,
所謂觸、想、思。耳、鼻、舌、身、意亦復如是。」
"두 가지 인연이 있어서 식(識)이 생긴다." 고 했는데.. 여기서 식은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전자는 과거의 기억이나 경험을 뜻하는 식이고, 후자는 새로 생긴 식이 그것이다.
안과 색 등 2법이 만나 의미가 생기려면 안과 색이 만나 생긴 게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과거의 지식이 일어나야만 한다.
하여 안과 색과 안식,
이 셋이 접촉하면[3사화합촉] 비로소느낌[수]이, 느낌이 생기면 생각[상]이, 생각은 의도[행]를 낳고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식을 만들어.. 식이 늘어난다.
즉 12처의 접촉하는 방법은 2법6쌍으로..
보는 것을 예를 들면.. 보는 자[안]와 보이는 대상[색]이 만나면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기억인 안식이 일어나
안과 색과 안식[기억], 이 셋이 접촉을 한다.
여섯 쌍이라 하는 것은..
(보는 자[안]와 보이는 것[색])이 그렇듯이,
(듣는 자[이]와 들리는 것[성]),
(냄새맡는 자[비]와 냄새[향]),
(맛보는 자[설]와 맛[미]),
(접촉하는 자[신]와 촉) 그리고 그것을 종합하고 분석하는
(의와 법)이 있어..
그것들은 여섯 개의 쌍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2법에 의한 3사화합촉이 보통 당시 자연철학자나 철학자 시선과 다르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3사화합 설명을 처음 보면..
눈[안]으로 사물[색]을 보면 보는 것들이 분별되어 안식이 생긴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여
눈으로 사과를 보아 사과라는 인식이 생기고.. 그 사과가 외부에 있다고 아는 것처럼 눈에 의해 안식 일체가 생긴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12처의 3사화합촉을 그렇게 이해하면 잘못이다.
안입처나 상대인 색입처는 거기에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한 지각이 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마치 무명인 어둠이나 안갯속에 놓여 있는 것처럼.. 아린애가 눈으로 본다는 생각 없이 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물 시간에 감각작용 원리에 대해 배웠듯이..
안입처는 감각기관인 눈[안근]이 아닌..
망막에 맺힌 상이 신경세포를 통해 뇌에 전달된 것을 보는 능력[안입처]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 뇌에 전달된 상은 안입처에 의해 비로소 대상이 되는데.. 그때 이름이 색입처인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 있을 때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과거의 경험인 안식이 일어나..
안과 색과 안식 이 셋이 접촉을 하는 것을 3사화합촉이라 하는 것이다.
과학과 불교의 차이점은..
과학은 뇌 안에서 3사화합이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석가세존은 뇌가 아닌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하여..
그 셋은 마음을 연해 일어나는 것[심연생]이라 했다.
곧 마음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과학이 생물시간에 뇌에서 일어나고 있는 3사화합촉 가르친 후.. 그 지식을 바탕으로 홀로그램이나 다차원 세계 등을 발표하며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하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이천육백 년 전에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석한 불교 논사들은 별 발전 없이 덤덤하게 전해온 이유가 무얼까?.
석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인도 전역에서는 부파불교 시대라 하여 불법을 깊이 연구하는 붐이 일어나..
당시 뛰어난 수재들은 법을 연구하는 아비달마 시대라는 부파불교가 성행했다.
그런데 불행은 기존의 6근6경으로 설명하고 있던 세계를 석가세존은 마음 작용인 2법6쌍인 12처라는 찬란한 법으로 가르치셨는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들은 12처를 다시 존재법인 6근과 6경으로 환원하는 매우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그런 어리석은 장면이 <잡. 319경>에 바로 이어지는 <잡. 320경>에 전하고 있으니..
320. 일체 존재경(一切有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이 때 생문 바라문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 문안 인사를 나눈 뒤에 한쪽에 물러나 앉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구담이시여, 이른바 '일체는 존재한다'고 말했는데 '일체는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생문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에게 물으리니 아는 대로 나에게 대답하라. 바라문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눈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대답하였다.
"존재합니다. 사문 구담이시여."
"색은 존재하는가?"
"그것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문 구담이시여."
"바라문아, 색(色)이 있고, 안식[眼識]이 있으며, 안촉[眼觸]이 있고, 안촉을 인연하여 생긴 느낌인,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존재하는 것인가?"
대답하였다.
"존재합니다. 사문 구담이시여."
"귀·코·혀·몸·뜻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 (이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그것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생문 바라문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320경>은 12처를 6근과 6경 존재로 이해하는 자에게 그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그렇게 알고 있어라 하는 설명이다.
그러니 석가모니의 의도를 바르게 알고 바른 길을 제시하는 자가 경을 수집정리했더라면..
12처를 6근6경으로 아는 것에 대해 경책을 해야만 할 터인데..
<잡아함경> 편집자는 오히려 <319경> 에 이어 올려놓아.. 12처는 6근6경과 같다는 설일체유부의 일체유를 강조하고 있다.
그와 같은 잘못은 대승불교 반야부에도 그래도 전해져..
<반야심경>에 나오는 12처는 심연생이 아닌 존재인 6근6경으로 설하고 있다.
<반야심경> 편집자는 12처라 하면서 무 안색 이성 비향 설미 신촉 의법이라 하지 않고..
무 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으로 전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다 보니 현재 <반야심경> 해설자는 의심 없이 공 안에는 6근6경이 없다고 설명한다.
(<반야심경> 기록자는 당시 부파불교 교설인 12처를 6근6경으로 설명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으로 반야심경은 잘못이 없다)
아비달마 시대에 2법6쌍을 분명히 6근6경의 존재가 아닌 마음을 연해 생긴 법으로 틀림없이 관찰하고 있었더라면..
부파불교 시대 그 뛰어난 논사나 법사들이 어떤 설명을 내놓으면서 발전시켰을지..
부족한 나는 상상하지도 못한다.
현대 과학자들이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시간은 공간이다 하는 주장을 내놓으면..
불교 학인들은 그런 주장을 따라가느라고 바쁠 뿐이다.
부처님과 유물론자인 과학자의 기본적인 차이는
과학자는 대상을 존재로 보았기에 감촉되는 것 외에 질량의 변화를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물질의 근본적인 변화는 무상하고 무아로 보았기에 관심은 오히려 마음에 감촉되는 것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인식하도록 했다.
하여 대상을 명색이라 했다.
예를 들어 연꽃하면 이름[명]과 보이는 모습[색]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외부로 투사하여
그렇게 연꽃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과학자는 연꽃의 성분이 무엇인지 관찰하여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지 연구하고 개발품을 내어 놓는다.
과학은 노쇠하는 몸을 최대한 천천히 늙도록 연구하여 엄청난 결과물을 내놓았다.
이제는 이십 대인 딸과 오십대인 엄마의 외모는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다.
그에 반해 불교는 몸이 아닌 마음에 관심을 쏟는다.
십대인 마음이 칠십 대인 마음이 되면 얼마나 늙던가?.
마음은 늙지 않는다. 부증불감이다
유물론인 현대 과학은 앎이라는 작용이 뇌라는 공장인 물질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반면에
불교에서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으로 가르치고 있다.
앞에서 말한 일체는 12처에서 생긴다는 것과 12처는 마음을 연해 생긴다는 것을 결합해 보면..
일체는 마음에서 생긴 것으로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말이 이해된다.
그런데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유심조는
그 기반이 심연생인 12처가 아닌 존재인 6근6경이다 보니..
이빠진 동그라미처럼 진정한 에너지를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존재 세계인 6근6경 대신에 마음인 12처를 가르친 이유가 무엇일까?.
물질 존재는 우리에게 편리함은 줄 수 있지만.. 근본적인 고통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70세 할머니가 20세 아가씨처럼 앳되고 건강하게 살면 편한 게 틀림없지만..
진정한 행복은 몸건강이나 외모가 아닌 마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원천적인 것은..
세계는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마음 따라 조작되고 있는 것이 진리[법]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