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에 잊지 못할 일들
천진성 이희숙 / 송파11구
불광사와의 인연
결혼을 하고 시골에 있는 시댁에 내려갈 때 마다 보는 풍경이 있었다.
시어머니는 추운 겨울에도 매일 저녁이면 목욕재계 후 장독대에 정안수를 떠 놓고 기도를 하셨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욕실이 갖춰진 도시에서의 매일 저녁 목욕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궁벽한 시골살림, 뜨거운 물은커녕 목욕을 할 수 있는 시설조차 변변치 않은 시골에서 추운 겨울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목욕을 하고 기도를 한다는 것은 지극한 정성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20년 가까이 되지만 아직도 그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다. 또 그 정성이 나에게 감동으로 전해져 왔다.
때문에 나는 시어머니께서 살아생전 “가난한 부모로서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도밖에 없다”고 하신 말씀을 항상 마음속에 새기며 살았다.
시어머니의 자식걱정과 사랑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시어머니는 시댁 근처 사찰에 가셔서 자식들을 위해 등을 달아주셨다. 어리석었던 나는 시어머니께서 등을 다시는 것으로 우리가족 모두의 기도가 다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우리 집 큰 아이가 고3이 되던 해. 아이의 대학합격을 간절히 바랐던 나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마음이 급해지면서 아이의 대학 합격을 위해 내가 직접 기도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절에 다니려면 석촌호수 옆에 있는 ‘불광사’를 가라하시던 어느 노보살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가 2000년 3월경쯤으로 기억된다.
나와 ‘불광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불광사에 다니기 시작하며 먼저 불교 기본교육 수강을 위해 교육원에 등록했다. 또 매주 일요일이면 일요법회에 참석해 법문을 듣게 되었다. 그렇게 불광사 형제들과 어울리며 신행 활동하는 시간이 흘러갔다.
불광사에 첫발을 내 딛는 후 광덕스님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광덕스님의 정신과 사상, 전법에 대한 얘기를 듣고 “어쩌면 이 시대에 환생하신 부처님이요, 활불(活佛)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덕 큰스님께서는 내가 불광사와 인연을 맺기 1년 전에 입적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도 광덕 큰 스님을 한번도 뵙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명등 부촉받던날
2018년 6월3일. 이 날은 나에게 참 의미 있는 날이다. 바로 송파 11구의 명등부촉을 받는 날이었다.
가슴을 옥죄어 오는 명등 소임의 부담감으로 전날 저녁은 잠을 설치며 아침을 맞았다.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마음이 혼란했다.
그동안 선학보살님들께서 열심히 봉사해주시고 잘 이끌어 왔던 송파 11구를 맡아 명등으로 소임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먼저 앞섰다.
하지만 그 걱정도 잠깐. 결국 법회 말미(末尾)에 스님으로부터 명등 소임을 부촉 받았다.
법당에는 나의 명등 부촉을 축하해 준다며 구법회 30여분의 보살님들이 자리를 함께해 주셨다.
정신없이 구법회 보살님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첫 명등회의에 참석을 했다.
첫 명등회의 참석에서 나는 큰 충격에 빠졌다. 마치 악몽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명등회의 장소인 교육원 2층으로 올라가니
지홍스님 오늘 중대 발표가 있으니 좀 넓은 3층으로 옮기라 한다
많은 법우 형제들이 3층을 꽉 채우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속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지홍 스님이 마이크 들고 차마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은 발언을 하신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여기저기서 욕설이 터져 나오고 보살님들도 고성을 지르고
회의장 분위기는 금새 난장판으로 변했다
와~~ 회주지홍스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따박따박 말씀도 잘하시는데, 난 할말을 잃었다.
스님들의 욕망 가득한 추하고 더러운 뒷모습을 알게된 계기가 되었으니까
마음속으로 “아닐거야, 내가 무엇을 잘못 들었을거야”를 외치며 정신을 가다듬으며
신임명등 인사하고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이런일이 벌어져서 정말 난감했다.
그날의 그 충격적인 모습은 불자로 살아가는 동안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지홍사태의 시위하던 날
그때부터 시작된 불광의 지홍사태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던것 같다. 매주 있었던 조계사 앞에서 시위로
몸도 마음도 모두가 다 힘들고 지쳐있었다. 그해 여름 어느날, 그날은 보신각 앞에서 집회가 있던 날이었다. 점심 공양 후 구법회 선학보살님들 차를 타고 보살님 네 분과 다섯 명이 보신각으로 출발했다
출발 전부터 속이 좀 안 좋아서 좀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도착하면 늘 얼음물을 준비했다가 한 병씩 나눠주고는 했는데, 물 한병을 받아서 너무 더우니까 1/3정도 마셨던 것 같다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에 달궈진 콘크리트 바닥의 지열은
상상 그 이상으로 뜨거웠다. 등산용 돗자리 한 장 깔고 자리 정돈하고 목청것 소리 높여
노래 부르고 구호 외치고, 조금 지났는데 배가 사르르 아파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같이 간 보살님께 잠시 화장실 다녀온다. 해놓고 난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간 내가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니까 이상하다고 걱정이 됐는지, 보살님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난 화장실 안에서 도저히 일어서서 나올 수도 없을 만큼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천진성보살님! 천진성보살님! 천진성보살님!’
보살님들의 나를 부르는 소리에 겨우 대답을 하니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냐?’
큰일난거 같다고 손 따고 정로환을 먹였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급기야 119구급대를 불렀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고 머리부터 속옷까지 땀으로 흠벅 젖어 있었다 급체였다
구급차를 타니 이젠 살았구나 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나중에 어느 보살님 말씀들어보니 처음 보는 순간 시체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고 하셨다.
정상화를 간절히 발원하며 법원으로...
난 내가 살아생전에 법원 갈 일이 없을 줄 알고 살았는데, 지홍사태로 인하여 명등을 하면서 안 가 본 법원이 없을 정도로 동부지방법원으로 부터 고등법원, 대법원, 수원지방법원, 성남지방법원, 의정부지방법원 등 많은 법원을 불광법회 관련 사건 경청하러 다녔다.
재판결과가 잘 나와 하루빨리 불광법회가 정상화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단 한번의 재판도 빠지지 않고 법원으로 쫓아 다녔다.
성남지방법원에서 지정스님 관련 사건 재판 있던날은 유난히도 추운겨울 그것도 마지막 재판 자리가 없어 차안에서 벌벌 떨며 재판결과를 기다리며 엄청 고생을 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명등2년에 선학으로 어찌하다 보니 부회장 소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찾아왔던 인연들, 그동안 행복했던 순간들도 많았었는데, 몇 년 동안 겪고 있는 이사태가 언제 끝나려는지는 모르지만 불광정상화는 반드시 올것이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난 믿는다.
우리 절 청정도량에서 청정한 스님 모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오늘도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