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30.
필자가 연구 조사를 하고 있는 후쿠시마(福島)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 만난 일본 중학생은 자신을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케이팝(K-pop)의 적극적인 팬이라고 하면서, 한국에 한번 가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지난해 여름방학에 그 학생을 한국으로 초대했다. 필자는 여행 가이드로 나서 평소 가지 않는 케이팝 명소들을 둘러봤다. 도쿄의 중·고교생과 대학생들이 한류에 심취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방 작은 마을의 젊은이들 사이에도 한류가 침투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필자가 2003년 일본에 이사 왔을 때 처음 만난 일본 사람들과의 대화는 대부분 드라마 ‘겨울연가’에 관한 것이었다. 필자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면 ‘겨울연가’ 이야기가 나왔다. 일본 사람들과의 대화를 위해 ‘겨울연가’ DVD를 사 며칠 만에 다 보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 팬의 주축인 중년층은 계속 팬으로 남아있고, 최근 몇 년간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케이팝이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한국 문화와 사회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고 있다. 필자가 지도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졸업 논문을 한국 문화에 관해 쓰고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가려는 학생이 늘고 있다.
필자가 일본에 산 16년 중 올해가 정치적으로 한·일 관계가 가장 안 좋은 시기인 듯하다. 일본 정치인의 발언이나 언론 보도를 보면 한국과의 관계를 비관적으로 보는 논조가 강해지고 있다.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실마리가 풀릴지 막막하다. 그렇다면 일본 시민의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치적 견해에는 왜 차이가 나는 것일까.
한 가지 이유로 일반인의 정치에 대한 낮은 관심을 들 수 있다. 한국은 여러 연령층에 걸쳐 정치적 관심이 높은 편이고, 일상 대화에서도 정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에 반해 일본인은 전반적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낮다. 올해 7월 참의원 선거의 투표율은 48.8%로 지난 70년 주요 선거 투표율 중 두 번째로 낮았다. 올해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는 32%의 유권자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답했다. 또 일본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다를 경우 야기될 갈등을 피하기 위해 정치 대화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일본의 일반 시민들은 최근 한·일 관계가 나쁜 것을 피상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정확히 무엇 때문에 갈등하는지는 잘 모른다. 상대방이 자신을 비판하고 미워한다는 것은 알지만 정확한 이유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비교적 솔직한 일본 사람들이 드물게 “왜 한국은 일본을 미워하나요?” “위안부 문제에 관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요?” 하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일본 언론은 근본적 내용을 자세히 다루기보다 갈등을 깊게 하는 두 나라 정치인들의 발언에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일 간 역사 인식과 정치에 관한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것은 안타깝지만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한·일 관계를 정치적 문제로만 보지 않는 것이 갈등을 푸는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치와 경제, 정부와 민간 교류를 분리해서 생각하며, 지방 정부나 민간 차원에서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역사 문제에 대해 건설적으로 배우고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어 나갔으면 한다.
한·일 관계가 좋지 않아서 학생과 지방자치단체 교류가 취소되었다는 뉴스를 접할 때 정말 안타깝다. 일본을 정치적으로만 접근하면 그 사회를 이해하고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고, 언론에서도 정치 문제뿐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도 다양하게 일본 사회와 한·일 관계에 대해 보도하길 바란다. 부디 새해에는 한·일 관계가 개선돼 불안한 국제 정세 속에서 두 나라가 상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정주영 / 일본 국제기독교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교수
중앙일보